칼럼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미래의 웹툰작가 김웹툰 씨의 하루 : 절망편

기술 발전이 웹툰 작가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만 미칠까? 기술 발전이 웹툰계에 초래할 수 있는 문제점은 무엇이 있을까?

2021-06-17 호랑



미래의 웹툰작가 김웹툰 씨의 하루 : 절망편


오늘은 203X년 6월 1일, 마감 날짜는 6월 3일, 마감까진 40시간도 채 남지 않았고, 아직 한 컷도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난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미 다음 화 이야기는 머릿속에 있고, 250여 컷의 1회차 분량을 그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침대에 옆으로 누워 태블릿을 키고 홈 화면의 펜촉 모양 아이콘을 터치한다. 익숙한 프로그램의 로딩 화면이 화면 가득 표시된다.

 

‘예술가’를 대체하는 AI

Webtoon Artist 2.0

Copyright 203X. TigerSoft All rights reserved.


‘서버에 연결하는 중입니다.’

‘사용자 인증 중…’

‘사용자 정의 그림체 불러오는 중…’


몇 초간의 로딩 시간 지난 뒤, 프로그램이 화면을 채운다. 화면 좌측에 있는 캐릭터 목록에서 ‘등장인물 A’를 터치하고, 상단 메뉴의 포즈를 터치하여 포즈 검색 창을 띄운다. ‘발차기’를 타이핑하자 수많은 발차기 동작들의 섬네일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가장 적합한 포즈를 선택하자 ‘등장인물 A’에 포즈가 반영된다.

발목의 각도와 컷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포즈 수정’을 터치하고, 발목을 드래그하자 원하는 각도로 발목의 포즈가 바뀐다. 이후 ‘카메라’ 메뉴를 터치하고 화면 레이아웃을 수정하고, 원근감 슬라이더를 조절하여 내 마음에 꼭 드는 화면을 구성한다. 이렇게 한 컷을 구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2분 남짓, 결과물은 직접 손으로 그린 것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깔끔하다.

이번 회차에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 ‘새 캐릭터’를 터치하고 얼굴형, 체형, 귀여움, 중후함 등의 슬라이더를 조절하자 금세 새 캐릭터가 생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내가 사전에 설정한 ‘그림체’에 맞추어 렌더링 된다. 이 툴만 있다면 그림을 전혀 그릴 필요가 없다. 이 툴의 인공지능은 수많은 작화 데이터로 학습해서 훌륭한 작가의 그림체를 그대로 흉내 내는 것도, 전례 없던 새로운 그림체를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내니까.

그렇다. 현재의 웹툰 시장에는 그림 작가가 필요 없어진 지 오래다.

오로지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토리, 연출만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이런 요소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전체적인 가이드를 잡는 일은 여전히 작가가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 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그림을 그리는 ‘미련한 작가’들이 종종 나오곤 한다. 이 툴로 웹툰을 만들면 온전한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난 그런 작가들이 도태되는 것을 자주 봐왔다. 툴을 사용하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많은 컷을 그리지 못해서 느린 진행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외면을 받고, 시간에 쫓겨 작화가 붕괴되어 외면을 받고, 극한의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에 결국 몸이 망가져 연재가 중단되는 경우도 보았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의 업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이런 툴의 기초가 되는 데이터… 좋게 말하자면 ‘재료’를 만든 공은 인정해 줘야 하지 않나 싶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계속 미련을 떠는 건 안쓰럽지만.


인공지능도 학습을 할 텐데, 뭘 보고 배울까

4시간 후, 원고의 반 이상이 완성되었다. 오늘 저녁에 작가 협회 모임이 있는데 가서 좀 놀아도 되겠다. 홍대 호프집에 도착하자 벌써 꽤 많은 작가들이 모여 있다. 벌써 취기가 많이 오른 작가들도 보인다. C 작가는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앞서 설명한 ‘미련한 작가’ 중 한 명이다. 데뷔한 지 10년이 넘은 작가로, 항상 그림을 직접 그렸다.

“아니 그 웹툰 아티스트인가 하는 툴 말이야, 그게 만들어주는 그림을 본인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나?”

몇몇 작가들이 인상을 찌푸리지만, C 작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얼마 전에 대학교 선배가 그 툴로 만든 작품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대. 선배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패턴을 그림에 심어 놓는 습관이 있는데, 그 작품에도 패턴의 일부를 발견했다는 거야.”

시끄러웠던 술자리에 순간 정적이 흐른다. C 작가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이상하지? 그 선배가 생각한 결론은 이래. 그 툴의 인공지능 학습에 사용한 데이터에 그 선배의 그림도 사용된 거지. 문제는… 그 선배는 본인의 그림을 사용하도록 허가해 준 적이 없어.”

말도 안 된다는 의견과 그럴 수 있다는 의견으로 나뉘어 작가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타이거 소프트 같은 큰 회사가 아무런 허락도 없이 작가들 그림을 학습 데이터로 사용했겠어요?”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봐. 내 주변 작가 중에 타이거 소프트로부터 그림을 학습에 사용해도 되냐는 요청을 받은 경우가 없었어.”

P작가가 의구심을 갖는다.

“에이, 꼭 그런 요청을 받았다는 걸 P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얘기 안 했을 수도 있지.”

“그럼 여기 작가들 한 30명 정도 있으니까 물어볼까?”

P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청을 높인다.

“여기 혹시 타이거 소프트로부터 작품 사용 요청을 받으신 작가님들 계십니까!?”

누구도 손을 들지 않는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는 그 툴이 개발되기 전부터 그림을 그려온 유명한 작가들이 많다. 이 작가들의 그림은 분명 툴의 학습 데이터로 사용되었을 터…

“아니, 정말인가 본데요. 그래서 그 선배 작가님은 어떻게 하셨대요?”

P 작가의 물음에 C 작가가 답한다.

“두 달 전엔가 자료를 모으고 변호사 선임해서 타이거 소프트를 고소했나 봐.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소식이 없네.”

그 소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그것도 꽤나 극단적인 형태로.


인생은 실전이야, 인공지능아

다음 날, 숙취 때문에 온전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태블릿을 켰다. 언제나처럼 펜촉 모양 아이콘을 터치한다.


Webtoon Artist 2.0

Copyright 203X. TigerSoft All rights reserved.


‘서버에 연결하는 중입니다.’


한참이 지나도 로딩 화면이 넘어가지 않고 멈춰있다가 이윽고 메시지가 출력된다.

‘서버에 연결할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시도하세요.’


아니, 무슨 일이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몇 번을 재시작해도 같은 메시지만 반복될 뿐이었다. 황급히 타이거 소프트 홈페이지에 접속해보았다. 고객 문의 게시판은 이미 흥분한 사용자들의 글로 포화상태였다.

게시판 상단에 오전에 올라온 공지글이 보인다.

Webtoon Artist 사용 불가에 관한 안내


당장 마감이 내일인데 하필 오늘 이럴까? 나는 짜증을 내며 공지글을 터치했다.


안녕하세요. Webtoon Artist 사용자 여러분.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금일 오전 10시부터 Webtoon Artist 사용이 불가하여 많은 분들이 문의를 주고 계신 상황입니다.

문의가 폭주하여, 개별적으로 대응을 드리지 못하고 이 공지글로 답변을 대신하는 점 미리 양해 말씀을 드립니다. 

자사의 Webtoon Artist 인공지능 학습에 작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작화 데이터가 사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혹을 제기한 작가분의 소송으로 인하여 오늘 오전 10시 본사 서버의 압수수색이 있었습니다.

서비스가 중단되는 일만큼은 막아보고자 했으나, 서버의 연산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하는 시스템의 특성상, 

부득이하게 서비스가 중단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정기 구독 결제는 오늘 시점으로 중단되며, 이미 결제하신 분들에게는 차액을 환불하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속히 서비스를 재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지 글을 읽어내려가며 내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문의 게시판에 들어가자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작가들의 게시글이 넘쳐난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기도 전에 담당자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아, 네… 다른 게 아니라 내일 마감…”

“작가님도 웹툰 아티스트 쓰고 계셨나요?”

“…네.”

“지금 그것 때문에 편집부 난리 났어요. 이번 주에 마감 못 하신다고 연락 주신 전체 작가님들 중에 반이 넘어요. 계속 연락 오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해하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서야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마감은 어쩌지? 툴 서비스가 이대로 끝나면 내 작품은?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작가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모두가 패닉 상태, 이곳에서도 딱히 해결 방법은 없어 보인다. 순간 내 심기를 건드리는 글이 보인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건가? 이 글의 댓글란은 이미 전쟁터다. 인공지능의 학습 데이터에 불과했던 그림쟁이들이 설치는 꼴을 보니 욱해서 참전하고 싶지만, 내게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리고 두 달 후

두 달 후, 웹툰 아티스트는 결국 서비스를 완전히 중단했다. 소송을 건 작가의 작품 외에 다른 작가들의 작화도 무단으로 대량 사용된 사실이 적발됐다나? 이 사태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연재작 중 90% 이상이 연재를 중단했다. 인기 최상위권이었던 몇몇 작품에는 플랫폼 차원에서 그림 작가를 섭외하여 지원하는 방법으로 연재를 유지했다. 다행히 내 작품도 해당되어, 2명의 그림 작가가 충원되었다. 물론 분량은 많이 줄었다. 250컷에서 60컷 정도로…. 지난주에는 ‘미련한 작가’의 대표 격이던 C 작가의 작품이 내 작품의 인기를 추월했다. 조바심이 들어 그림 작가들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해보지만, 말을 안 들어 처먹는다.

“작가님, 제가 그렇게 수정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해요. 전 웹툰 아티스트가 아닙니다.”

이따위로 하면서 나한테 요구하는 것도 많다. 느리고 실력도 없고 자존심만 세다. 그림쟁이들 주제에. 오늘도 나는 헛된 기대를 안고 펜촉 모양 아이콘을 터치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