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문에 이제는 불가능해졌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는 편이었다. 사람이 북적북적해 서로 지나다니기만 해도 어깨를 부딪칠 수밖에 없는 거리에서 시끌벅적한 음악을 듣는 것이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그런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곳은, 당연히 축제였다. 와우북페스티벌, 자라점재즈페스티벌, 펜타포트락페스티벌 ... 그중에서도 학창 시절 가장 자주 출석도장을 찍은 곳은 바로 코믹월드였다.
일명 여의도의 '굼벵이관'에서부터 들락날락했던 코믹월드. 한 손엔 부스를 안내하는 행사 소책자를 들고, 개인 홈페이지에서 유명한 작가들을 찾아다니며 동인지를 사 모으는 게 인생의 낙이었다. 코믹월드에 한 번 다녀오고 나면 다시 다음 한 달 내내 가방에 달고 다닐 액세서리가 바뀌곤 했다. 지금처럼 아크릴로 만드는 게 아니라 싸구려 코팅 지로 코팅한 종이에 펀치로 구멍을 내 만든 키링이어서 금방 너덜너덜해지곤 했지만. 행사장으로 향하는 지하철역 안에서부터 이미 코스튬 플레이어들로 가득했던 그 당시의 즐거움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은 거의 모든 축제가 '비대면' 혹은 '사전예약' 정도로 이뤄지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여행이 가능해진다면 그날의 즐거움을 되살려 세계 전역의 만화 축제를 돌아보고 싶다. 그날을 위해 일단은 '글로 배운' 방구석 만화 축제 정도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려 한다.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
고양이가 대표 상징인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축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만화 축제 중 하나다. 앙굴렘 만화축제에서는 매년 작품을 시상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출간된 <나쁜 친구>(앙꼬, 창비)가 처음으로 '새로운 발견상(Prix revelation)'을 수상했다. 매년 수십만 명이 방문하는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부스로 참여해 국내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축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에는 메인 행사장뿐 아니라 앙굴렘 곳곳에서 만화를 전시하고 만화 관련 행사를 개최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었던 건 2018년 열린 데즈카 오사무전이었다. 그 유명한 <우주소년 아톰> 원화가 전시되었다며, 다녀온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했다.
△ 젊은 창작자들을 지원하는 'Young Talents 2022' 대회 포스터
(출처 : https://www.bdangouleme.com/)
수준 높은 전시와 규모 있는 부스를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한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사실 제일 기대되는 부분은, 전시도 부스도 아니라 바로 작가들의 사인 코너다. 앙굴렘만화축제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부스마다 작가들이 일렬로 앉아 고개를 파묻은 채 그림 그리고 있는 사진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만화가의 사인은 그림이므로, 독자들이 가져온 책에 사인을 겸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선망하던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게 앙굴렘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아톰의 원화가 프랑스에 전시되었던 2018년, 부스에서는 우라사와 나오키가 직접 나와 사인을 했다고 한다. 그의 친필 사인을 받을 수 있다면 <20세기 소년> 전권이라도 들고 갈 수 있었는데... 코로나 19가 끝나면, 작가들의 책을 한 아름 안고 가장 먼저 줄을 설 테다.
바르셀로나 국제 만화 박람회(코믹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국제 만화 박람회를 처음 안 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을 통해서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출간했을 당시 띠지에 큼지막하게 '2010 스페인 만화대상 수상작'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만화대상이 뭐지, 하고 궁금증에 검색하다가 바르셀로나 국제 만화 박람회를 알게 됐다. 매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이 박람회는 1981년부터 시작되어 이전 해에 출판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여러 분야의 상을 시상한다. 시상 분야는 총 다섯 개다. 만화대상, 팬진상, 신인상, 어린이만화상, 스페인 작가상.
△ 올해(2021년)의 코믹 바르셀로나 포스터. 여성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Raquel Riba Rossy가 담당했다.
(출처 : https://www.comic-barcelona.com/)
바르셀로나 국제 만화 박람회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고, 스페인 만화도 잘 모르지만, 이 박람회만큼은 꼭 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웹사이트에 어린이를 위한 메뉴가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코너에 뭐 대단히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다. 컬러링 도안이나 간단한 보드게임으로 이뤄진 '코믹 플레이'(웹사이트에서 직접 다운받을 수 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려 업로드할 수 있는 온라인 게시판 등이 링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라는 느낌이 들어, 벌써 기분이 즐겁다. 언젠가 아이와 손잡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단은 그날을 기다리며 컬러링부터 하고.
샌디에이고 코믹콘(SDCC)
△ 2021 코믹콘 배너 (출처 : https://www.comic-con.org/)
(당연히 안 가봤지만) 샌디에이고 코믹콘은 어쩐지 만화축제라기보다는 서브컬쳐-테크 행사 같은 느낌이다. 아닌 게 아니라 2016년 샌디에이코 코믹콘에는 구글, 삼성, 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이 참여하기도 했다. 대체 이 기업들이 왜 여기에 왔냐고? 바로 VR 때문이다. 삼성에서는 4D 체험 의자와 VR 기기를 사용해 샌디에이고 코믹콘에서 체험형 영상 콘텐츠를 내기도 했다. 2018년에도 각종 기업에서 AR 게임을 코믹콘 현장에서 선보였다.
이처럼 샌디에이고 코믹콘에는 만화뿐만 아니라 게임, 영상, IT 등 다양한 분야의 산업이 포진해있다. 특히 마블과 DC코믹스가 워낙 세계적인 규모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다 보니 만화-영상-테크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보이는 것도 같다. 코미케의 코스튬 플레이도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샌디에이고 코믹콘의 코스튬 플레이가 조금 더 궁금하다. 코미케의 코스튬 플레이 사진은 대개 청년 코스어들의 사진이 주를 이루는데, 샌디에이고 코믹콘의 코스튬 플레이 사진은 청소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코스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코스튬의 'ㅋ'도 모르지만, 샌디에이고 코믹콘만큼은 나도 간단한 코스튬을 입고 참여하고 싶다.
일본 코믹마켓(코미케, コミケ)
포털에서 '코미케'를 검색하면 '구름'이 연관검색어로 뜨는 이유를 아시는지. 코미케가 열리는 현장에 사람이 워낙 많이 들어차 참여자들의 타액으로 수증기가 이뤄진다는 일명 '오타쿠 구름' 때문이다. 오타쿠 문화를 비하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멸칭이긴 하지만, 그런 구름이 생길 만큼 코미케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모인다. 입구부터 어마어마하게 줄을 서야 할 정도다. 코미케는 앞서 소개한 앙굴렘과 성격 자체가 다르다. 앙굴렘국제만화축제는 출판사나 각국 만화계에서 전문적으로 참여한다면, 코미케는 프로든 아마추어든 누구라도 작품을 그려 부스에서 판매할 수 있다. 만화 <툇마루에서 모든게 달라졌다>를 읽은 독자라면, 이미 코미케의 풍경을 간접적으로나마 본 적 있을 것이다. 유키 할머니가 깨끗하고 예쁜 천으로 책상을 덮고, 우라라 학생이 직접 그려 인쇄한 책을 진열했던 그 부스가 바로 코미케 행사장이다.
△ 코미케 웹 카탈로그 안내 배너 (출처 : www.comiket.co.jp)
코미케의 특징은 동인 부스와 화려한 코스튬 플레이다. 전시와 부대행사가 많은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 비해 코미케는 제각기 갖고 싶은 동인지와 굿즈를 선점하는 것이 참여자들의 최대 목표다. 참여자들에 따르면 코미케에 참여하기 전에 내가 어떤 굿즈를 살 것인지 타깃을 정리하고, 타깃에 맞춰 동선을 짠 후 움직이는 게 필수라고 한다. 잔돈이나 물통도 당연히 구비해야 한다. 만화를 사랑하는 마음 이상으로 한정판을 득하겠다는 열의가 있어야 살아남는(?) 곳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솔직히...아직은 갈 용기가 선뜻 나지 않는다.
샌디에이고 코믹콘이 열리는 시기엔, 행사장 근처 식당들이 저마다 입간판에 만화 캐릭터를 내걸고 캐릭터가 포함된 스폐셜 디시를 내놓는다고 한다. 만화 축제가 열리는 전시장에서뿐만 아니라 한 마을이 통째로 만화를 즐기는 떠들썩한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 마침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은 1월, 스페인 국제 만화 박람회는 5월, 샌디에이고 코믹콘은 7월, 일본 코미케는 12월에 열린다. 우리나라 부천에서 열리는 부천국제만화축제는 8~9월이다. 코로나19가 끝나고 나면(그리고 지갑에 여유가 있다면!) 한 해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만화 축제에서 보내고 싶다. 그때가 되면 글이 아닌, 현장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