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를 아우르는 수도권은 우리나라 인구 절반이 사는 공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절반이 사는 공간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때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런 공간은 ‘향토적인 곳’, ‘우리 전통을 이어 가는 곳’, ‘어떤 특산물이 유명한 곳’처럼 과거에 묶여 있거나, 수도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를 가진 이질적인 곳처럼 소비되곤 한다. 마치, 오늘의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지난 세기, ‘사람은 서울로’라는 모토 아래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 결과 서울은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메트로폴리스가 되었고, 이러한 기조는 1990년대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이 아니면 안 되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지역 간 격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글로벌 시대에 떠오른 ‘지역의 이야기’는 때로 진부하거나 소위 말하는 ‘큰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역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의 언어이다. ‘지역의 소멸’을 이야기하는 201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지역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지역의 사생활 99>는 여전히 ‘수도권 거주자’들의 상상력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들이 발붙이고 있는 땅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들이 참여한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텀블벅 펀딩에 수백여 명이 기꺼이 참여한 것도, 알고 보면 서울이 아닌 타 지역에 대한 관심의 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판타지부터 오늘의 삶까지, 9개의 도시들
<지역의 사생활 99> 프로젝트 시즌 1을 통해 총 9곳의 도시가 조명 받았다. 고성, 공주, 광주, 군산, 단양, 담양, 대구, 부산, 충주(이상 가나다순)로 이어지는 시리즈에서 각 권마다 작가와 지역 본연의 색깔을 담아냈다. ‘지역’ 이외의 다른 제약이 없는 만큼, 지역을 중심으로 풀어낸 작가들의 상상력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강원도 고성을 다룬 정원 작가의 <알프스 스키장> 편은 홀로 남겨진 주인공이 뉴스를 통해 폐점 직전인 알프스 스키장에 강아지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헤어진 연인에게 연락을 하고, 어렵사리 폐쇄된 ‘알프스 스키장’에 닿기까지의 과정을 중점적으로 그려낸다.
충청남도 공주 편을 그린 북구플랜빵 작가의 <4공주>는 지역 축제인 백제문화제를 소재로 친구 사이인 중학생 4명이 모여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작은비버 작가의 광주광역시 편 <용도락_광주 맛집 투어>는 용이 택배 일을 하는 가상의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용과 함께 광주의 맛집을 여행하는 이야기를 재치 있게 풀어냈고,불친 작가의 <해망굴 도깨비>에는 작가 본인도 모르고 있던, 일제강점기의 무역항이었던 군산의 역사를 실재하는 해망굴과 환상 속 생물 도깨비를 통해 풀어냈다.
충청북도 단양 편 <가만히 있어도 사라지는 것>의 불키드 작가는 작품에 어반 판타지적 요소를 담아 청년세대의 담론과 기후 위기, 그리고 수몰 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부산광역시 편 <비와 유영>의 산호 작가는 특유의 아름다운 필치로 광안리 해수욕장에 떠내려 온 인어 ‘비’와 집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영’의 만남을 그렸다.
전라남도 담양 편에 담긴 래현 작가의 <1-41>과 고형주 작가의 <여름방학의 끝에서>는 학창 시절의 기억과 현재를 다루지만, 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냈고, 근하 작가는 대구광역시 편 <달구벌 방랑>을 통해 대구에서 살지, 떠날지를 고민하는 두 주인공 제이와 이현 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전한다.
여기, 오늘의 우리 만화.
<지역의 사생활 99>에는 어설픈 동경이나 연민의 감정이 없다. 흔히 ‘지방’으로 한데 묶을 수 있는 곳에 수도권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는 단조로움이나, ‘낯섦’을 바탕으로 키치하게 담아내는 외부의 시선도 찾아볼 수 없다. 책의 표지만큼이나 각양각색 빛나는 ‘지역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2021년 현재, 웹툰 산업은 눈부신 성장을 거두고 있지만 한쪽에서는 상업적 가치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마다의 매력으로 경쟁하는 웹툰 시장이 이제 전 세계를 무대로 본격적인 출사표를 던지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만화 시장의 격랑 너머로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그려내는 <지역의 사생활 99>가 더욱 반갑다. 2021년, 이곳에도 오늘을 그려낸 우리 만화가 있다.
이재민(웹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