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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파이더맨, 무리한 스토리 리셋으로 논란

미국 마블엔터테인먼트에서 수 십년째 인기리에 연재중인 스파이더맨 만화 시리즈가, 최근 감행한 무리한 스토리 초기화 때문에 만화 애호가들 및 일반 팬들에게 큰 반발을 사고 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헐리웃 실사영화판의 성공에 더욱 힘을 얻어서 지난 수년간 큰 성공을 거두던 중..

2008-02-04 김낙호

미국 마블엔터테인먼트에서 수 십년째 인기리에 연재중인 스파이더맨 만화 시리즈가, 최근 감행한 무리한 스토리 초기화 때문에 만화 애호가들 및 일반 팬들에게 큰 반발을 사고 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헐리웃 실사영화판의 성공에 더욱 힘을 얻어서 지난 수년간 큰 성공을 거두던 중, 본편 시리즈 이외에도 다양한 스핀오프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세계관을 최대한 활용해내고 있었다. 여기에 2006년의 대형 크로스오버 프로젝트인 『시빌워』 스토리라인과 맞물리면서 스토리 설정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여러 강력한 사건들이 극중에서 연달아 벌어졌던 바 있다. 그런데 그것을 최근 무리하게 한꺼번에 무효화시키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려서 빈축을 사고 있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만화 시리즈 표지중
스파이더맨 만화 시리즈 표지중

























예를 들어 스파이더맨이 전국적으로 방송에서 피터 파커라는 정체를 드러내고, 그 결과 어머니와도 같았던 메이 숙모가 습격당해서 생명이 위독해지고, 뉴-뉴어벤저스의 일원으로 정부측 슈퍼히어로 기관인 아이언맨 휘하의 S.H.I.E.L.D.의 추격까지 받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마블에서 이 모든 상황들을 정리하겠다는 장담을 하고 ‘하루만 더 One More Day’ 시리즈를 내겠다고 선언했을 때 팬들의 이목은 집중되었다. 게다가 그림을 맡은 것은 현재 마블을 경영하고 있는 총책임자 조 퀘사다Quesada 본인이었고, 각종 프로모션 역시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지연 끝에 결국 올 연초에 완결된 이 스토리라인은 대다수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했다. 스파이더맨이 악마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어서 과거를 수정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메이 숙모는 다치지 않았고, 피터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오래전에 고블린2세로 죽은 친구 해리 오스본까지 살아 돌아왔다. 게다가 방송에 나왔던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그 모든 것의 댓가로, 메리 제인과의 결혼생활 역시 없었던 것이 되었다.

출판사 중심의 캐릭터 프랜차이즈가 일반적인 미국 주류 만화계에서 과거 스토리의 설정 수정, 속칭 ‘retcon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 급작스럽고 전면적인 무효화는 최근 보기 드물었던 강력한 무리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위 ‘데우스 엑스 마키나’(결말부에서 논리적 연관보다는 초월적 개입으로 모든 상황을 급박하게 일거에 해결하는 이야기 장치)의 전형이라며 많은 독자들이 아우성쳤고, 심지어 이 스토리의 작가인 스트라진스키 Straczynski 마저도 그런 전개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신규 독자들에 대한 배려라면 이미 진행중인 ‘얼티밋’ 시리즈가 그 역할을 하고 있고, 작품 내적으로 보더라도 이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스파이더맨의 스토리라인과 맞물려 있는 뉴어벤저스 시리즈 외 다수의 인기 시리즈들을 수정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첫 후속 조치는 기존의 ‘Friendly Neighborhood Spider-Man’ 시리즈와 ‘The Sensational Spider-Man’ 연재를 중단하고, 본편인 Amazing Spider-Man 시리즈를 매달 3회씩 발매하기로 한 것이다.

도박에 가까운 이런 전면적 개편이 과연 반드시 필요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의 내용적 일관성을 희생할만한 일이었는지 많은 불만이 있지만, 대형 크로스오버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한 충격적 세계관 뒤흔들기의 연속이었던 지난 수년간 마블의 행보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는 측면도 있다. 즉 캐릭터를 활용한 무한 연재가 가능한 안정적 세계관을 유지하려는 속성의 미국 주류 만화 관행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두 마리 토끼 작전이 한계에 도달한 셈이다. 한 쪽에서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마블의 가장 유서 깊은 히어로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를 사망처리해서 진취성을 보인 반면, 가장 인기 있는 타이틀인 스파이더맨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으로 회귀하는 애매한 전략을 보인 것도 팬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이후의 스토리를 어떤 식으로 전개할지에 대해서 아직 많이 드러난 바는 없지만, 이번의 스토리 리셋은 미국 주류 만화시스템의 특징과 한계를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