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웹툰시대의 아날로그 일일만화] 만화방 책장 속 일일만화의 출발과 현재

웹툰 세상에 일일만화 이야기 꺼내기 / 2016년 10월 13일 기준, ‘웹툰’을 뉴스 검색어로 지정하니 ‘2016 글로벌 웹툰 쇼’와 웹툰 시장 규모를 분석하는 기사, 3억 원 규모의 웹툰 공모전 소식 등 하루에 보도된 분량이 여러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2016-10-18 주재국


웹툰 세상에 일일만화 이야기 꺼내기
2016년 10월 13일 기준, ‘웹툰’을 뉴스 검색어로 지정하니 ‘2016 글로벌 웹툰 쇼’1)와 웹툰 시장 규모를2) 분석하는 기사, 3억 원 규모의 웹툰 공모전 소식 등 하루에 보도된 분량이 여러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반면 ‘일일만화’를 검색했더니 가장 먼저 보이는 뉴스가 ‘한국만화박물관, 찾아가는 일일 만화박물관 운영’ 소식이다.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찾아가는 만화박물관 <만화, 그때 그 시절> 운영
그것도 무려 2014년 10월 8일 기사로 2년 전 이야기이다. 기사나 산업적 규모를 말하지 않아도 일일만화는 요즘 주목받는 만화가 아니다. 솔직히 쇠락한 일일만화 이야기는 스마트 폰 군중 속에서 장거리 공중전화를 찾는 느낌이다. 자연스레 원고 의뢰에 처음 든 생각이 난감함이었다.
그럼에도 필자의 만화 향유에 큰 영향과 즐거움을 준 일일만화를 돌아 볼 이 기회에 다음 제한을 두고자 한다. 그간 여러 자료로 일일만화 역사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약사(略史)로 접근한다. 또한 연관 글에서 일일만화의 의미를 다루므로 필자는 주관적 명암(明暗)을 다룬다. 반면에 식상함을 피하기 위하여 필자가 함께 했던 일일만화의 경험을 보완하여 기술한다.3)

대본소 체제의 맞춤형 출판 시스템, ‘일판’의 탄생
먼저 일일만화라는 용어는 사전 용례로 정리된 바가 없어 이 글에서는 업계의 일반적 분류 명칭인 ‘일판’으로 기술한다. 업계에서 일판이라고 한 유래는 이틀에 2~3권이 공급되니 ‘매일만화’ 또는 ‘일일만화’라 불렸으며4), 판형이 일반 만화보다 커서 ‘특판’, 오로지 대본소에만 유통되어 ‘만화방 만화’ 혹은 ‘대본소 만화’, 그리고 분량이 수십 권에서 시리즈 형식의 백여 권에 달해 ‘시리즈 극화 만화’로도 불렸다. 이를 종합한다면 그 명칭은 ‘대본소용 일일배본 장편 시리즈 극화만화’이다.
일판은 ‘대본소’라는 한국의 특수한 만화 환경을 기반으로 기형적 유통 구조와 동반 발전한 맞춤형 만화 창작으로 탄생했다. 요즘 ‘만화카페’라 하는 업종은 남대문 근처의 만화 좌판을 시작으로 전국의 만화가게, 대본소5), 만화방을 거쳐 지금도 북 카페로 변신 중이다. 점포는 거리에서 지하로, 지상층으로 이전했고 좌석은 긴 나무의자에서 소파, 그리고 누워서 독서할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변했다.
△ 좌측부터 대본소, 현재의 만화카페
북 카페라는 복합 공간 이전의 업소들은 그 주된 콘텐츠가 바로 일일만화인데 현재 그 자리는 코믹스라 불리는 작은 판형의 만화와 서점용 만화들로 채워졌다. 한편 대여 시장의 한 축인 도서대여점의 경우에는 애초부터 일판을 취급하지 않았다.
일판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발달한 ‘빌려 보는 만화 시장’의 중심이었던 대본소의 탄생과 생리, 그리고 대본소 총판의 구조를 같이 이해하여야 한다. 먼저 확연하게 구분해야 할 것은 ‘대본소 만화’ 또는 ‘대본만화’라는 명칭에서 보듯 서점용 판매 만화가 아니라는 개념이다. 즉 판매가 아닌 대본, 대여 구조의 시장에 최적화된 만화 형태6)이자 유통이었다. 물론 한국보다 일찍 발달한 일본의 대여 시장도 있어 대여라는 공통 시장으로는 대표적 양대 국가이다. 따라서 도서대여권이 전 세계에서 두 나라만 문제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만, 일판은 오직 한국에서만 나타났다.
대본소는 단순하게 바라보면 한국의 해방과 전쟁이라는 근대사의 피폐한 상황을 기반해 자생적으로 출발했다. 일본과 유사하게 만화가 포함된 잡지와 문고형태의 단행본 만화가 근대 만화 시장을 열었지만, 당시 사회는 만화를 소장할 여건이 아니었다. 즉, 아이들 전유물이던 만화를 아이들이 사서 집 책장에 꽂아 두기란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심지어 꽂을 책장도 없는 시절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자연히 아이들은 길에 펼쳐 둔 만화에 반색하며 동전을 내고 빌려 보게 된다. 이 방식이 1950년대 후반에 점포를 얻어 전문적으로 만화를 보여주는 만화가게, 즉 대본소가 된다. 저렴한 비용으로 소비와 창업이 가능하여 경쟁 업종도 없이 대본소는 전국 상권과 골목에 등장하게 됐다.
당시 열악한 출판 환경에서 대본소가 거침없이 확산된 배경은 첫 째, 단행본보다 대본소 만화를 출판하는 것이 출판사와 작가에게 경제적 수익을 보장하여 업소의 증가와 대본소 만화의 양적 증가가 맞물려 순환했고 둘 째, 전후의 부족한 원자재 환경에서 만화 제작을 낭비로 본 군사정권7)은 만화잡지 등을 폐간시켰는데 대본소 만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명이 빌려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대본소는 1980년대 초 오락실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이들이 집 앞 골목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다. 이후 1960년대 중반에는 대본소라는 독보적 시장에서 작가와 출판을 독점한 합동출판사8)가 등장하여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독점 출판사의 등장으로 당시 만화가가 만화가로 살기 위해서는 이 회사에 전속되어야 했으며 출판사가 작가 명(필명), 그리고 어떤 만화를 그릴지도 결정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활동한 만화가 중에는 일본 만화를 베끼거나 여자 이름으로 순정만화를 발표한 남성 작가9)도 있었다. 특히 60~70년대에는 독점출판사의 강요로 일본 만화를 대놓고 표절한 작품들이 다수 출판됐다. 이후에 대본소가 아이들 공간에서 성인들로 확산된 것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현세 작)10)이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만화는 대본소로 출판됐다.
대본소의 특징은 만화 소비의 빠른 회전에 있다. 빠른 소비를 위해서 대본소 만화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는데 첫 째, 신작 또는 후속편의 빠른 출판, 둘 째, 권 단위로 대여를 하는 상품의 속성 상 장편으로 구성하되 권당 쪽 수는 많지 않을 것11), 셋 째, 빠른 출판 혹은 창작을 위해 고정 캐릭터 활용, 넷 째, 스토리와 그림의 분업, 다섯 째, 화실12) 방식의 만화제작 분업화(라 쓰고 공장이라고 읽는다.), 여섯 째, 소장용이 아니므로 재질은 저렴한 갱지 사용, 일곱 째, 표지 제외 흑백 만화 등 기형적 조건을 갖추게 된다.
결국 대본소 만화는 이름을 알린 작가와 스타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화로 소비자가 반복적/습관적으로 찾는 상품이 됐고 대본소 시장에 맞춤형인 일일배본만화, 일판이 됐다.
이러한 일판은 총판 시스템과 함께 자기들만의 생태계를 구축해 나갔다. 첫 째, 돈과 독점을 무기로 구축된 갑을 관계의 시장이다. 선금 지급으로 출판사는 작가를 독점하고 지역 단위 총판은 출판사에 독점권을 받으려고 보증/권리금을 지불했다. 출판사나 총판은 만화방의 단독 공급자로 현금결제와 끼워 팔기, 공급 중단 등의 횡포가 가능했다. 둘 째, 작품에 대한 선별이나 반품은 불가했고 단지 작가별 선택을 가능했다. 현금 거래에 반품율 0%의 텃밭 시장이다. 셋 째, 대본 시장은 소형 서점의 개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독점 유통이었다. 실제 1990년대 후반 필자의 서점 준비 과정에서 지역 총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지 못하고 개인의 발품으로 준비해야 하는 현실은 독점 유통의 실체를 실감한 사례이다. 초창기 대본소 유통은 원총판-도총판-지역총판으로 거점 지역을 독점했는데 서점 시장이 열악한 당시에 총판 구조는 일판, 성인판, 무협소설, 단행본 등을 외무사원의 손에 들려 각 대본소에 배포했다. 더구나 신간이 출판되면 1차는 서울지역 대본소, 2차에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주요 도시, 3차를 마지막으로 나머지 도시 지역에 순차적으로 유통시켰다. 당시 일화 중에는 2차, 3차 지역이 편법으로 1차, 2차 유통 책을 빼돌려 미리 장사를 하는 사례가 발생하여 총판이 책에 지역 비표(秘標)를 하여 범인(?)을 잡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중요한 현실은 일일만화가 대본소 환경에서 작가와 출판사의 선금, 출판사와 총판의 권리금 관계로 인하여 채권채무가 복잡하게 얽힌 구조였다는 늪이었다. 일판의 개혁을 외치는 비판적 목소리들을 업계 종사자들이 코웃음 친 이유는 결국 돈 문제였다. 누군가 개혁을 외치는 경우13)에 우선적 문제는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채권채무관계를 동결하거나 해소해 줘야 가능한데 개혁론자 중에 안타깝게도 엄청난 부자가 없었으며, 몇 백억 원 정도를 투자할 여력이 있는 자본가는 당연히 일판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일판은 대본소 환경에서 일사천리로 성장해 갔다.

일판 세상의 명(明과) 암(暗)
매년 5월이 되면 만화를 불태우는 전국 행사14)가 열리고, 만홧가게가 청소년 탈선의 온상으로 비난 받았으며, 심지어 만화는 ‘불량’이란 단어와 1+1 상품으로 규제받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만화 시장의 독점적 유통과 소비처로 자리한 대본소는 그 수요와 공급의 범위에서 한계치까지 확산됐다. 성수기였던 1970년대에는 담배 가게처럼 많은 18,000여 대본소가 일일만화를 구매했다. 당시 15~18명 정도의 일판 작가들이 이틀에 두 권씩 출판을 하니 대형 업소는 매일 20~30권의 일판을 구매했다. 다작 작가는 연간 400여 권이 넘는 일판을 출간했고 소량 출간 작가도 연간 50여 권이 넘었다. 진화론의 ‘용불용설’이 뜬금없지만 대본소의 다작생존은 설이 아닌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달리는 기차에 석탄을 넣듯 신작을 빠르게 공급하지 못하면 그 선금/투자금, 그리고 현금유동성을 관리할 수 없었다. 결국 다작을 하지 못하는 작가는 일판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고 책 한권 출간에 들어오는 현금의 유혹 앞에 작가주의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됐다.16)
일판 호황기에 잘 나가는 작가와 출판사(합동 독점이었다.), 그리고 총판 사장들은 말 그대로 현금을 주체하지 못했다. 일판 작가로 되기는 어려웠지만17) 일단 대본소에 작가 이름의 책장이 생길 정도가 되면 이후 10년은 수입이 보장됐다. 찍으면 팔리는 시장이었다. 당시 일판의 양대 작가18)는 이현세, 박봉성 작가, 무협 지존은 하승남, 사마달, 황성, 천제황과 후발주자였던 야설록이었으며, 고행석, 오일룡, 박인권, 강철수, 김철호, 허영만, 이상무, 이상세 등이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다. 물론 김성모, 야맹장, 김성동 등은 일판 쇠락기에 진입한 작가들이며 묵검향은 말기에 등장했다. 참고로 대본소에 출판된 성인판이라는 책은 3~5권 분량으로 서점용 판형처럼 출간됐지만 성인 극화로 새 시장을 노린 일판의 변형이었다.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박봉성 작)19), <도시정벌>(신형빈 작)이 대표적 사례이다.

일판의 폭발적 성장은 어둠의 만화계를 대표하듯 많은 비난 속에 이뤄졌다.20) 그 비난은 ‘공장만화’라는 말로 압축된다. 일본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의 만화가들도 화실을 운영하지만 유독 일판 화실 시스템이 비난을 받은 것은 말 그대로 만화창작이 제조업 공장처럼 생산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생산을 가능케 한 두 방식은 스타 캐릭터와 분업이다. 물론 스타 캐릭터를 도입한 작가는 일판의 주요 작가들 외에도 고 고우영 화백, 김진태, 이진주, 이말년 작가들도 있고 해외 작가들도 있다. 이것은 창작의 한 방식이고 작가의 선택 사항이다. 허영만 작가의 경우처럼 예외적인 사례도 많다. 초기 대본작품에서 스타 캐릭터를 적용했지만 일판의 굴레를 벗어나면서 최고의 작가로 오르기까지 고정 배역의 편리함을 벗었기 때문이다.21) 또한 공장제 분업이라는 비난은 스토리는 물론 작화에서 데생 맨, 배경 맨, 지우개 맨(?) 등으로 세분화한 것을 넘어 대명(代名) 발표작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주제를 그려왔던 허영만 작가의 경우에도 독자들은 특이한 작품을 대본소에서 접하게 된다. 그것이 <블랙 홀>, <화이트 홀> 등의 작품이었는데 사후 세계나 신비현상 등을 다룬 이 작품이 꽤나 인기가 있었지만 전혀 새로운 이야기에 뭔가 그림체가 달랐고 등장인물의 세세한 묘사가 미흡하여 실제 본인의 작품이냐에 대해 열성 독자들은 의구심을 지녔다. 후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 작품은 ‘조운학’의 그림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흔했는데 당시 화실은 작가가 꾸리는 A 팀 화실이 있고, 제자나 다른 작가가 팀장으로 운영하는 B 팀이 있는 구조였다. 다작을 위해서는 이 팀이 두 개가 아니라 몇 개로 늘어나 많게는 백여 명에 이르는 화실 직원이 공장 직원처럼 만화를 제작한 것이다. 분업에 감춰진 또 다른 부작용은 그림 작가와 스토리 작가의 만화계 인식이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일판 업계에서는 그림 작가가 만화가로 대표되던 시기여서 스토리 작가는 실명 작가 취급을 못 받았다.22) 당연히 스토리는 그림 작가에게 모든 권리를 넘기며 매절23) 금액을 원고료로 받았다.24) 글/그림으로 표기되는 요즘의 당연함이 있기까지 이현세와 허영만 작가의 행적은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 이현세의 <남벌>에 와서 ‘글 야설록’이 표지에 인쇄됐으며 허명만의 <카멜레온의 시>는 ‘김세영 글’로 발표되면서 스토리와 작화가의 공동 창작이라는 현재의 인식으로 만화계를 이동시켰다.
△ 글 야설록, 그림 이현세, <남벌>의 표지 이미지
물론 현재까지도 <공포의 외인구단>을 ‘글 김민기/그림 이현세’ 작품으로 알고 있는 분은 많지 않다. 이것은 그림 작가 중심의 한국 만화계가 지닌 흔적이다.

반면에 어둠의 측면만 있지는 않았다. 물론 필자를 비롯한 소수의 의견으로 만화계의 일반적인 정리와는 다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만화를 문화라고 주장한다면 그 문화의 다양한 층위가 있다는 것을 일판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만화가 아동 대상의 교훈적 기능을 갖는다는 당시 정부의 시각과 고매한 문학작품이라야 가치가 있다는 시각, 그리고 소장 가치가 있어 구매할 만화가 작품이라는 시각, 공장이 아니라 온전히 한 작가의 손에서 창작된 작품이 올바른 만화라는 시각을 조금 벗어나 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는 비평가상 수상작도 있고 B급 영화도 있으며 회화에 <모나리자>가 있고 이발소 <돼지 가족> 그림도 있다.25) 모두가 영화이고 회화이듯 수준 높은 소장용 작품과 한 번 보고 마는 작품도 만화는 만화다. 단지 일판 만화가가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매 작품을 발표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그저 만화의 한 분야로 보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시각이라는 생각을 필자는 하지 않는다. 앞서 밝힌 화실 시스템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화실을 운영하여 일일만화를 발표했던 만화가들과 만화들이 모두 매도당해야 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시스템 하에서 발표된 수작들이 있다. 일일만화 시스템과 시대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과 덜 좋은 작품, 매우 부끄러운 작품까지 섞여 있다. 그러니 공장 만화는 나쁘다고 일반화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동시에 이 시스템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한 이들-허영만, 이현세, 고우영, 이두호, 윤태호 기타 등등-을 보면 불행한 시기도 긍정적 역할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만화가로 데뷔할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당시 구조에서 일판 시스템에서 버틴 작가들이 현재 중견 작가들과 선배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일판의 몰락과 버티기
필자는 일판 성숙기 말기~둔화기 초기에 시장에 진입하여 만화카페를 운영할 때 대본소와 달리 일판의 보유량을 20% 이내, 나머지는 코믹스판으로 운영했다. 당시 대본소는 그 보유형태가 일판 위주였던 시기이다. 좋아하는 만화에 일판이 포함된 세대였던 필자는 이 때부터 일판의 쇠락을 지켜보게 됐다.
당연하게도 일판의 몰락은 외적으로는 대본소의 급격한 감소였다. 일판만화의 독자는 확고했지만 그 반면에 신규 독자층의 유입은 단절되다시피 했다. 일판의 영화에 기대어 너도 나도 차린 대본소가 유일한 만화공간이었던 구세대와 달리 지금의 만화 독자들은 일본 만화, 코믹스, 디지털 파일 만화는 물론 만화 외의 문화향유 기회가 광범위하다. 당연히 일판의 열혈 독자로 유입되는 경우가 현격히 감소-대본소의 감소-일판 출간부수의 감소로 이어졌다. 외부 환경이 몰락하기까지 일판이 만화의 한 분야로 성장하기 위한 내부적 노력이 없었던 것도 당연한 원인이다.
일판 업계는 이러한 붕괴 조짐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자생력을 키우기보다 수익을 유지하기 위한 단기적 처방에만 몰두했다. 첫째, 지금은 일반화된 해외 화실 운영은 진출로 포장됐지만 저인건비를 충족시키는 탈출이었다. 국내 인건비를 줄이고자 동남아시아 인력을 채용하여 분업 작화를 했는데 규모 있는 일판 작가부터 시도했다. 인건비가 감소한 만큼 작품도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한 시기이다.26) 둘째, 비용 절감을 위해 페이지는 축소하고 정가는 인상했다. 셋째, 대본소 체제의 재구성(?)을 꿈꾸며 중국 진출을 모색했다. 주요 일판작가모임인 ‘금요만우회’를 주축으로 야설록 작가 등이 관련 인사를 영입하여 중국 각 성에 대본소 창업을 유도하고 여기에 그동안 출간됐던 수많은 일판을 공급하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27) 넷째, 신간이 아닌 재판의 출간이다. 작품보다 작가의 이름으로 선택하여 습관적으로 보는 일판의 특성 상 4~5년 전에 출간된 만화를 제목만 바꿔서 신간으로 출판해도 별 무리가 없이 유통되었고 소비되었다. 소수 독자들이 예전에 본 만화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흐름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재판의 경우 정가가 낮았기 때문에 이를 표시하고 공급하는 것이 당시 업계의 형태였으나 재판의 신간 포장은 이후 분쟁을 낳고 중단하게 됐다. 다섯째, 재판의 신간 유통이 제한되자 성인판형 재출간이 시작됐다. 일판 3권을 1권으로 인쇄하여 성인판형으로 출간했다. 추가적인 원고료나 제작비 없이 신간처럼 책을 유통하니 기존의 일판 콘텐츠 재활용 전략을 짠 것이다. 여섯째, 일판 재고의 디지털 스캔 서비스 시장으로 이동했다. 초기에는 구간 서비스였다가 온오프라인 동시 신간 서비스까지 진행되어 대본소와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섯 가지 과정에 크고 작은 난관과 분쟁들이 발생했다. 화실 인력 구조조정에 따른 잡음의 유출, 대본소 독점 일판의 유통 채널 이원화에 따른 대본소 반발, 구간 출판으로 유지하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반발 등 어수선한 시기에 필자의 중재와 조언은 일시적 분쟁 해소만 했을 뿐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해결을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고 다수의 대화에는 대표 채널이 필요하다. 그 기본을 위해 필자는 전국대본소의 의견을 모을 창구로 전국만화방연합회(온라인 모임에서 오프라인 협회로 확대), 전국도서대여점연합회를 온라인에서 개설했다. 정부와 작가, 출판사, 총판, 대본대여업주가 테이블에 앉는 것이 가능해진 것을 그나마 위로로 삼았다.
참고로 이러한 배경으로 만든 채널이 당시 이슈였던 도서대여권 법제화 운동과 맞물려 세간의 주목(보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28) 쇠락의 과정에 함께 한 필자의 의도는 전국만화방연합회(cafe.daum.net/comicsroom)와 개인 얼음집(http://jumosee.egloos.com/), 그리고 공식적 기고문 등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 대여권 법제화 공청회

일판의 현재
쇠락기에 시도했던 해외 화실 운영을 이제는 일판 작가 공동으로 운영해도 절약으로 버틸 수 있는 일판의 시대가 아니다.29)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아니라 그 많던 대본소는 현재 400여 개 미만(일판 취급 업소 기준)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 중반 1만 여개 업소로 집계 되더니 2012년은 3,638(순수 만화취급 만화방과 대여점은 811곳), 그리고 2016년 일판의 출판 부수는 350여부 정도라고 출판 관계자는 말한다. 손익분기점이 아니라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손익은 온라인 서비스에서 보완되어 유지를 가능케 한다. 활황기에도 그랬지만 현재 일판은 정부 지원 대상이나 만화계 이슈도 아니다. 수십 년 간 발표된 그 많은 콘텐츠를 박물관에서도 소장 자료로 포함시키기에 어려움이 있다.

일판을 지속하는 작가, 일판을 떠난 은퇴 작가, 일판을 떠나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 이제는 고인이 되신 작가님들이 추모되는 곳이다. 그럼에도 온라인 공간의 시장 진출은 일판의 지속을 가능케 하고 있으며 부가적으로 방대한 콘텐츠의 도서관 효과까지 지녔다. 지금도 일판을 꾸준히 애독하는 독자들이 대본소를 이용하고 있고 컴퓨터를 열고 있지만 일판이라는 형식의 만화가 어디까지 변신을 할 지 예측하기 어렵다.
한 때 다양한 장르의 장편 극화를 선보였던 일판은 이제 추억, 박물관, 회고, 역사 등의 단어와 더 자주 만나며 일판에 대한 아쉬움과 애정이 함께 묻어 있다. 글을 마치며 故 남재주(이재학), 故 박봉성(박종구), 故 용태성(김환형) 작가님의 명복을 빕니다.


주석

1) 도시의 미래 성장 동력을 ‘웹툰’으로 삼겠다는 부산광역시의 세계 최초 웹툰 축제로 올해 처음 개최되었다. 부산시는 현대 만화가 가장 먼저 유입되어 유통된 지역이라는 역사성, 서울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80여 명의 웹툰 작가와 100여 명의 예비 작가군이 활동하는 지역, 영화와 영상 등 기존의 도시 문화콘텐츠와 연계 시 시너지 효과 증대 등으로 축제의 문화 산업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2) 2016년 현재 5천억 원이며 2018년까지 8천억 원 규모로 성정할 것으로 예측.
3) 필자는 1990년대에 만화카페 ‘만화광장’을 운영하고, 도서대여권 이슈에서 전국만화방연합회 카페를 개설하여 연합회 발족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일일만화 쇠퇴기에 작가(‘금요만우회’ 중심), 출판사총판(한국만화출판협회)와 일일만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가졌다.
4) 공급의 말단은 ‘외무’라고 호칭하던 지역 총판의 영업자들이 담당하여 신간을 들고 매일 지역 만화 가게를 순회했다. 그렇게 매일 들리는 손에는 당연히 일판이 기본 품목이었다.
5) 貸本所는 말 그대로 책을 대여해 주는 장소를 말한다. 본(本)은 일본어로 책을 세는 단위였으며 지금도 배본, 출판본, 적본(赤本) 등으로 그 잔재를 드러내고 있다. 일본의 도서대여업소인 대본옥(貸本屋)이 대본소의 출처이다.
6) 만화처럼 무협지의 유통에서는 당시 박스 무협이 일판과 같은 속성을 지녔다. 서점 판매가 아니라 5권 1박스 형태의 세로줄 쓰기 무협 소설은 만화방에만 공급되고 만화방에서만 소비되었다. 필자의 초중고 시절은 <군협지>와 <백야성>을 시작으로 박스 무협과 혼연일체였으나 지금은 흔히 말하는 신무협의 소설들을 선호한다.
7) 역사적 아이러니는 1960년대 군사정권은 대본소 활황의 배경을 제공했지만 1980년대 군사정권은 대본소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 전두환 정권이 국민적 반발을 회피하기 위해 펼친 1981년의 3S 정책은 탄압의 대상이던 만화 시장에 <보물섬> 등 좋은 만화잡지가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 대본소 독주 시대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8) ‘주식회사 합동’은 당시 거대 출판사였던 부엉이 문고, 크로바 문고, 제일문고, 진영문고, 오성문구가 합쳐 1967년 출범했다.
9) 고 이재학은 합동출판사에 전속되었을 때 예명으로 순정만화를 그렸다.
10) 아이들이 보는 만화에서 어른도 보는 만화의 시대를 열었던 작품이다. 이 외에도 당시 대본소 만화로 출판된 작품 중에는 <객주>(이두호 작), <신의 아들>, <새벽을 여는 사람들>(박봉성 작), <별빛 속에>(강경옥 작), <북해의 별>(김혜린 작) 등 명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현재 50대가 넘은 우리 만화가 중에 대본소 만화와 무관한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김수정 선생님이 대본소 체제에 저항한 몇 분 안 되는 아이콘이다.
11) 초기 대본소의 아동만화들을 업주들이 분철하여 1권을 2권으로 보여 주기도 했다. 신간이 공급되는 날에는 여러 명이 달려 와 책을 찾으니 나누면 더 빨리 돌려 볼 수 있다는 이유였으니 이후에 고착된 얇은 대본소 만화 낱권은 예상된 결과이기도 했다.
12) 일일만화 작가는 그 세계의 속성 상 다작을 해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다. 그 때문에 화실을 운영해야 하고 화실 운영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선금이라는 업계의 족쇄가 작용한다. 프로 선수를 영입하듯 출판사는 선금을 주고 작가를 영입하여 화실을 운영할 자금을 지원한다. 이러한 스카웃 비용을 철저히 활용하여 전속 작가를 직원처럼 부린 출판사가 ‘합동’이었다.
13) 공장을 해체하라, 독점 유통을 자유 경쟁 유통으로 전환하라는 등의 외침은 선금 지급된 화실 운영자금과 독점 유통권을 따내기 위해 지불한 막대한 권리금의 벽에서 벽돌 한 장도 빼지 못하는 공허한 소리였다.
14) ‘국민’학교 학생이던 필자도 운동장 뒷줄에 서서 무슨 구호를 외치던 기억이 있다.
15) 2000년대 초반, 일본 동경에서 일본의 만화연구자들과 포럼이 있었다. 필자의 한국 만화 소비구조 발표 중에 일일만화 출간이 “이틀에 두 권”이라는 내용을 통역자가 상식적(?)인 의심을 품고 “2년에 두 권”이라고 오역했다.
16) 대표적 대본작가 6인 정도의 만화는 전국 대본소가 거르지 않고 구매했다. 권당 3,000원을 18,000여 대본소에 판매하고 연간 400여 권을 발표했다면 그 수입을 어림잡아 짐작해 볼 수 있다. 외상도 없고 전액 현금 결제인 일판업계가 돈을 자루에 담던 시절이다. 몇 천 권 내외가 손익분기점이었으니 이런 고부가가치 산업(?)이 또 있을까 싶다.
17) 초기 화실 구성 비용이 막대하고, 일판 시장에 이름을 걸 유명세가 있어야 진입이 가능했다. 독점 출판사의 끼워 팔기로 초기 진입을 보장하기도 했지만 독점력이 약화되면서 시장의 선택 기능이 작동했기 때문에 인기 없는 작가의 경우 판매 부수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고 이는 빚잔치로 끝났기 때문이다.
18) 1980년대 5대 작가는 이현세, 박봉성, 고행석, 하승남, 오일룡, 황제로 구분하기도 한다.
19) 초기 일판의 경우 3부작으로 출간(1987~1990년)됐다. 1부 <집행인>, 2부 <말소인>, 3부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이후 성인판형으로 1995년부터 대본소에 출시됐는데 작가의 사후에도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20) 고 박봉성 작가는 만화가들이 모인 남산 만화가협회에서 지금 중년이 된 당시 젊은 작가들과 함께 있을 때 보스형 리더쉽 성격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인이 된 이후에 공장만화가라는 후배 작가들의 비난을 털어 버리지 못했다는 인터뷰를 들었다. 이처럼 과거 일판 작가라는 프로필을 지닌 대표 만화가들과 한국 근대만화사에 있어 ‘공장만화’라는 단어는 언급하기가 계륵(鷄肋)과 같다.
21) 데뷔 후 첫 인기작인 <각시탈>과 <무당거미>, <쇠퉁소> 등의 고정 캐릭터가 <오! 한강>, <미스터 손>, <비트>, <사랑해>, <식객>,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등 매번 새로운 캐릭터 창작으로 발표되고 있다.
22) 물론 야설록, 사마달, 고 용태성 작가 등은 스토리 작가 출신으로 반대의 사례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그림 작가가 화실을 운영하고 다양한 스토리를 ‘구매’하여 작품을 발표했다. 문제는 스토리 작가가 운영할 때 그림 작가들, 그림 작가가 운영할 땐 스토리 작가들이 작품으로 계약되거나 고용되어 출판된 책에 이름을 병기하지 못하던 관행을 말한다.
23) 저작권에서 ‘매절’이란 용어를 사용하진 않지만 업계에서는 저작권을 양도한 것을 말한다. 저작권의 재산권은 양도가 전부 또는 일부 가능하지만 일판의 매절은 스토리 구매, 그림 작가의 고용 방식으로 매절이 이루어졌다. 일판 몰락 후에 온라인 스캔만화 서비스 시장에서 새로운 수익이 발생하자 과거의 매절이 불공정 계약이었다는 집단 소송이 있었고 법적 판단 이전에 합의로 무마되기도 했다.
24) 매절 고료라면 원고료 외에 추가적으로 저작재산권을 양도(영구적)하는 저작권료를 받아야 했다. 요즘에는 저작권 양도 또는 위임 계약서로 명확하게 권리관계를 계약하지만 당시 상황은 관행적으로 적당한 고료를 받고 저작재산권을 상실했다. 법에서는 명확한 양도 계약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는지, 혹은 원고료를 훨씬 상회하는 저작권료를 지불하여 재산권 양도가 포함된 것을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가를 따져 과거의 매절이 용인되는지 불공정한지를 판단한다.
25) 그렇다고 일판을 미학에서 말하는 Kitsch 문화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26) 현지인 미대 출신을 고용해서 그린 만화여서, 중사가 병장에게 존대를 하고 태극기를 거꾸로 그리는 등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잘못 표현되기도 했다. 당시 독자들 사이에선 이런 그림 찾기도 시니컬한 오락이었다.
27) 중화인민공화국 정책에 따라 일판의 표현 중 심의에 걸리는 현대물 극화는 제외하고 무협극화 위주로 진출을 타진했다. 현대물과 달리 무협극화의 칼과 결투 장면은 심의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편법으로 폐지로 수출입하여 중국 현지에서 보따리로 유통되는 사례도 있었다.
28) 참고로 도서대여권 법제화와 일판은 반대의 입장이었다. 일판은 대본소 유통을 전제로 출간된 만화이므로 대여를 고려하여 정가가 높이 책정된 도서이다. 그런데 정부 법제화 방향은 모든 만화의 정가에 대여권료를 붙이자는 것이고 일판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점용 단행본이 대여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 핵심 취지였는데 일판이나 무협소설, 대본소 성인만화 등은 포함되는 것이 업계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 반대하게 되었다. 결국 법제화는 만화계 반대로 결정이 났는데 이 과정을 알지 못하는 쪽에서는 정당한 도서의 권리를 막는 악의 괴수무리로 반대론자들을 비난했다. 반대의 대안으로 작가의 시장 선택(대여와 판매)에 따른 유통 구분 법제화였다.-http://jumosee.egloos.com/196311
29) 여러 작가의 공동 화실이다 보니 주인공 캐릭터만 겨우 구분이 가능할 뿐 조연들의 경우에는 다 비슷비슷하다. 심지어 만화를 날림으로 그리는 방법(전문용어로 대갈치기라 한다)도 심해져서 이목구비 없는 조연들이 난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