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폭염으로 물렁물렁해진 사람들의 뇌 속으로 살아 있는 시체들이 기어들어가고 있다. 고속열차를 무대로 한 연상호 감독의 좀비 영화 <부산행>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프리퀄 애니메이션 <서울역>에도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로버트 커크만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TV 드라마 <워킹데드> 시리즈가 최상위권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하나자와 켄고의 좀비 만화 히트작 <아이 앰 어 히어로>의 실사 영화판이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9월에 개봉하게 되었다. 좀비를 소재로 한 국내의 여러 만화들에 새롭게 관심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이미 세계적으로는 2천년대 초반부터 좀비 영화의 해일이 몰려왔다. 오랫동안 B급 호러의 싸구려 소재에 불과했던 시체 인간들이 레드 카펫을 주름잡게 된 것이다. 좀비는 전쟁, 테러, 감염이 일상이 된 21세기 재난의 세계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또한 ‘병맛’에 찌든 골방 외톨이들의 대체할 수 없는 악취미다. 그리고 월가의 횡포를 뒤집으려 일어선 ‘좀비 워크’의 정치적 가면 역할까지 하고 있다. 2011년 미국 주간지 <더 위크>는 그 전 10년 동안 좀비 장르의 산업이 만들어낸 경제 가치가 57억 4천만 달러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국내의 좀비물 창작은 세계적 해일 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금 늦게 몰려오고 있는 느낌이다. 만화로만 한정하자면 이경석의 <좀비의 시간>, 강풀의 <당신의 모든 시간> 등 좀비 감염을 테마로 하고 있지만 감염자도 인간적인 감정을 완전히 잃지 않고 있다는 온정주의적인 시각의 작품이 먼저 등장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주동근의 <지금 우리 학교는>, DEY의 <데드 데이즈>, 이은재의 <1호선> 등 본격적인 좀비 장르의 웹툰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고, 곤마의 <조선 좀비 실록> 등 여타의 장르와 결합하는 변형들도 다수 나타나고 있다. 서구와 일본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무시 못할 경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좀비 만화는 무엇을 그리고 있고, 어떻게 대중의 어두운 상상력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일까?
△ 왼쪽부터 주동근 <지금 우리 학교는>, DEY <데드 데이즈>, 이은재 <1호선>, 곤마 <조선좀비실록>
좀비의 기원은 카리브해의 부두교 의식이다. 아이티의 무당들은 주술을 행하여 죽은 시체를 되살려내는 척하는 의식을 행했다. 약물을 사용해 가사 상태로 만들어놓은 사람이 뒤늦게 깨어나 멍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영혼을 잃은 시체가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이들을 두고 좀비, 부두, 오바아 등으로 불렀다. 그러다 1929년 월리엄 시브룩이 소설 <매직 아일랜드>를 통해 아이티의 부두교 의식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대중문화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여기에 유럽에서 넘어온 뱀파이어 설화가 결합된다. 흡혈귀에 의해 물린 족속들이 의식 없이 조종을 받는다는 식의 설정이다. 초기에는 좀비가 흡혈귀라는 큰 부류로 통칭되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뱀파이어와 좀비로 양분된다. 좀비는 생물학적으로는 죽은 상태에서 무의식적인 본능으로 다른 인간을 물어 또 다른 좀비로 만든다. 성향은 비슷하지만 뱀파이어의 지위는 정반대다. 그들은 또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고, 인간 이상의 지각과 판단력을 지닌 엘리트 혈족이다. 뱀파이어는 초능력 귀족이고 좀비는 미친 노예다.
좀비는 대중 소설과 만화를 통해 서서히 호러의 아이콘이 되어 간다. 1953년에는 마블의 핵심 작가 스탠 리가 만든 좀비 만화가 잡지 <메너스(Menace)>의 표지를 장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리처드 매드슨은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통해 좀비 장르를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진화시킨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네빌은 집 밖에 있는 괴물들을 ‘흡혈귀(vampires)’라고 불렀지만,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명백히 좀비다. 매드슨은 두 가지 개념을 통해 좀비 장르의 창조적 도약을 이루어냈다. 첫 번째는 좀비의 등장을 주술이 아니라 과학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어떤 바이러스 혹은 박테리아로 인류가 변이를 일으켜 새로운 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좀비들에 둘러싸여 고립된 주인공을 통해 ‘고독’이라는 철학적 테마를 형상화해냈다는 데 있다.
△ 스탠 리의 , 1953년 3월.
이후 좀비 장르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번식해왔다. 과학 저술가 애널리 뉴위츠는 1910년 이후 미국과 유럽의 좀비 영화의 제작 편수를 정리해 흥미로운 통계를 보여주었다. 요지는 전쟁이나 사회적 격변 이후 좀비 영화가 급증한다는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에이즈의 창궐, 이라크 전쟁 등이 기폭제다. 특히 좀비 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년)은 베트남전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
21세기 들어 좀비 영화는 한 해 20편 이상씩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새벽의 저주> <28일 후> 등을 통해 메이저 장르로 성장했고 2005년 이후에는 매년 30편 내외의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밑바닥에서 상상력을 이어온 좀비 만화들도 새롭게 발굴하게 되고, 반대로 웰메이드 좀비 영화에 자극을 받은 수준 높은 만화들도 나오게 된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시리즈 <워킹데드>는 미국 케이블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고 있다.
△ 좌측부터 <워킹 데드> 만화 표지, 드라마 포스터
좀비 장르의 양과 질이 번성하면서, 그 안에서도 여러 경향들이 줄기를 뻗고 있다. 특히 만화는, 항상 그러했듯이, 장르 내에서도 가장 미세한 분화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만화가들은 좀비라는 공통의 세계관과 장치를 제각각의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좀비 만화 속에 들어 있는 핵심 장치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이들이 끄집어내는 우리 시대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자.
첫 번째는 ‘재난’이다. <워킹데드>는 워커(Walker)로 불리는 좀비가 지구를 뒤덮은 상태에서 가족을 찾거나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미 대륙을 유랑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세계는 무정부 상태에 도덕적 마지노선까지 무너진 상태라, 좀비만이 아니라 위악적인 인간 부족들과의 다툼도 큰 문제가 된다. <아이 앰 어 히어로>는 일본을 배경으로 상당히 현실적인 좀비 재난을 다루고 있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허둥대는 정부와 언론, 제 몸 지키기도 버거운 군대와 경찰의 무능력이 겹쳐져 국가의 기능은 소멸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그룹의 인간들이 좀비가 만들어낸 새로운 상황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다. <데드데이즈>는 어머니가 좀비가 되어 아파트를 나갈 수 없게 된 16세 소년 진국이 주인공이다. 처음에는 건너편 아파트에 있는 휠체어 신세의 전직 양궁 선수 화연과 교류하며 좁은 세계의 이야기를 그리는 듯하다가, 점차 바깥 세계의 참상으로 옮겨가 이 파국을 만들어낸 음모론의 실체에 다가간다. 우리는 이러한 재난극의 처참한 양상을 통해, 콘트롤 타워의 부재로 속절없이 당해버린 삼풍과 세월호 사건을 되새기게 된다.
△ 좌측부터 하나자와 켄고의 <아이 앰 어 히어로> 표지 이미지, DEY <데드 데이즈>의 한 장면
두 번째는 ‘감염’이다. 세계화를 통해 촘촘히 연결된 지구에서 신종 플루, 사스, 구제역, 메르스, 지카 바이러스 등은 놀라운 전염 속도로 현대 방역 체계를 허물고 있다. 공항에서 마스크를 쓴 승객들이 열감지기로 체온 조사를 받는 뉴스 장면은 좀비 만화에서 감염자를 색출하는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학교를 중심으로 좀비가 전염되는 과정을 꼼꼼히 그리고 있다. 자신의 몸이 좀비로 바뀌고 있는 사람을 1인칭 시점으로 그리며, 의식이 무너진 뒤 무자비한 감염체로 바뀌는 인간의 모습을 섬세히 표현한다. 미스터리적인 성격도 강해 과연 이 질병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궁리하게 만든다.
<워킹데드>의 주인공은 말한다. “무기화된 천연두, 에볼라 바이러스… 그런 게 퍼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좀비를 만들어내는 병원체는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국가나 군대가 개발한 분노 바이러스, 미치광이 가스, 혹은 식품회사의 생체 실험의 결과일 수도 있다. 소설가 스티븐 킹은 좀비들 두고 ‘절대 포기를 모르는, 빠르게 움직이는 테러리스트’라고 말한다. 좀비 만화 속에도 최근 극심해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열광에 기반한 자살·폭탄 테러’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세 번째는 ‘공포와 폭력’이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재난 만화 중에서도 최고로 잔혹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내장이 흘러내리는 상황에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좀비들의 ‘밥맛 떨어지는’ 장면은 기본이다. 좀비들이 게걸스럽게 사람의 살점을 뜯어먹는 식인의 상황도 당연하고, 좀비가 된 아이가 어머니의 뼈를 씹어 먹는 것과 같은 반도덕적 상황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좀비 만화는 몸도 마음도 추악하게 변형된 인간들의 모습을 정교하고도 다양하게 그리며 생리적 공포의 극단을 보여준다.
허나 불쾌감에 호소하는 마이너 취향만으로 다수의 대중을 사로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만화가 진행될수록 살육의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생존을 위해 무장을 한 인간들이 좀비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살육을 저지른다. 식칼, 야구 방망이, 도끼, 전기톱 등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무기로 쓴다. 평소에는 꿈도 꾸기 어려웠던 총기도 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사용한다. 마치 주인공이 합법적인 연쇄 살인범이 된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렇게 호러의 주체와 객체가 바뀌면 코미디가 된다. 외계인에 맞서 싸운다는 핑계로 참혹한 살해극을 벌이는 피터 잭슨의 영화 <배드 테이스트>나 야구 경기를 핑계로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망가타로의 만화 <지옥 갑자원>의 상황이 좀비 만화에서는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네 번째는 ‘도덕’이다. 좀비 만화의 폭력성은 한편으로는 도덕적 해방구가 되기도 한다. <아이 앰 어 히어로>에서 만화가 어시스턴트 미타니는 좀비의 창궐로 뒤엎어진 세상에 흥분한다. 자신을 혹사하면서 난잡한 성생활을 해온 만화가가 좀비가 되자 그를 잔혹하게 응징하며 그동안의 불만을 해소한다. 하지만 그 역시 머지않아 다른 좀비에게 습격당하는데,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긴다.“솔직히 이제껏 사는 게 힘들었어. 난생처음…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는데.”
허나 조금만 이성을 되찾으면, 좀비 만화는 어떤 재난극보다도 도덕적 갈등을 많이 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방금 전까지 가족이었던 사람이 좀비가 되어 나를 공격한다. <데드 데이즈>의 진국은 좀비 어머니를 처리하지 못해 오랫동안 집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또한 감염 후의 잠복기라는 요소가 계속 고민을 만들어낸다. 공동체의 일원이 좀비에게 물린 것 같다면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재빨리 제거해야 할까? 격리 후에 반응을 살펴보아야 할까?
좀비가 된 인간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괴물일까? 아니면 약간이나마 감정이 남아 있는 존재일까? 한국의 좀비 만화에서는 온정주의적인 시각이 강하다. <좀비의 시간>에서는 좀비가 된 가족을 어떻게든 대피시키려 하거나, 자신은 좀비가 되어도 사랑하는 이들을 감염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이어진다.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는 좀비가 된 사람들이 서서히 감정을 잃어가지만, 마지막 순간에 가졌던 마음은 오랫동안 지키고 있다며 강풀 특유의 ‘순정 만화’적인 테마로 이어진다.

△ 이경석 <좀비의 시간> 중 한 장면
△ 강풀 <당신의 모든 순간> 중 한 장면
다섯번째는 ‘거울’이다. 좀비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들은 카드빚에 몰려 거리로 쫓겨나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는 노숙자들일 수 있다. 의식 없이 회사, 학교, 학원을 오가며 반복적 동작을 해대는 보통의 사람일 수도 있다. 단지 혐오감 때문에 자신과 다른 존재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악플러일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을 잃어버린 우리는 둘 중의 하나다. 좀비, 혹은 좀비를 무차별적으로 죽여 대는 학살자.
“이상한 꿈을 꿨어. 사람들은 무섭게 변하고, 너한테 연락도 안 되고…” <1호선>의 주인공 지원은 여자 친구 혜정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꿈을 꾸며 말한다. “진수야 미안하다. 이 전부가 꿈이었으면 좋을 텐데.” <지금 우리 학교는>의 과학 교사는 말한다. 그래, 진짜 꿈이었을 수도 있다. 좀비 만화라는 것은 결국 독자들에게는 일종의 꿈이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난 이들의 반응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일상이 주는 작은 행복에 감사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미래가 닥치지 않게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언젠가 찾아올 수도 있는 파국을 대비해 생존 키트를 장만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그래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기초적인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나 의식을 잃은 시체들 덕분에, 스스로의 의식을 다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