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여기저기에서 놀림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연애를 만화로 배웠어요.”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나는 함부로 무시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애라는 인간 감정의 가장 섬세하고 중요한 사안을 소설, 영화, 만화 같은 간접 체험에만 기대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단언한다. 그러한 연애의 시물레이션에 있어서 만화의 경험치는 다른 어떤 예술 매체도 따라올 수 없다. 또한 모든 직업군 중에서 만화가만큼 연애라는 문제에 깊게 매달린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모름지기 연애의 심리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만화라는 금광을 파헤쳐 보기를 강력히 권한다. 지금 연애 세포의 소멸로 괴로워하는 초식남, 건어물녀, 모태 솔로들도 마찬가지다.
만화 속의 연애 심리를 구체적으로 파헤치기 이전에 우리는 약간의 지도를 그려보아야 한다. 만화 산업 내에서 로맨스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양식은 여타의 매체와는 양과 질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만화는 여성과 남성 독자를 향한 작품들이 크게 양분화되어 있고, 그 안에서 성적인 특이성이 강화되어 왔다. 연령대별로 분화되어 있는 만화 산업의 특성 역시 고려해야 한다. 최근 웹툰 중심의 만화 환경이 이러한 구도를 많이 흔들고 있지만 여전히 만화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서브 장르의 축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십대 여성들은 로맨스 장르의 주 소비자층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을 뜨게 되지만 현실적 제약으로 진짜 연애보다는 가상의 연애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학원 로맨스는 중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연애 만화다. 쇼지 요코의 <생도제군!>, 이상무의 <노미호와 주리혜> 등 1970년대 러브 코미디의 형태로 등장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체적인 구도는 이은혜의 <점프 트리 A+>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평범한 여고생’이 여러 매력적인 남자들에 둘러싸이게 되고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삶과 사랑을 배워나간다. 과연 그 남자들 중에 진짜 짝은 누가 될 것인가? 카미오 요코의 <꽃보다 남자>는 여기에 등장하는 남학생 군단의 개성을 확장해 크게 사랑을 받았다. 특히 초반에는 주인공을 괴롭히던 불량한 남자까지 여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그 남자! 그 여자!>는 조금은 현실적인 상황으로 내???온다. 특히 여주인공이 편안한 복장으로 시험 공부를 하는 모습 같은 걸 즐겨 보여주는데, 진정한 남자 친구라면 그런 면모까지 이해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너희 둘 사귀는 것 아니었어?” “여자로 본 적 없어?” 이연우의 <우리사이느은>처럼 어릴 때부터 서스럼 없이 지내온 남사친 여사친이 언젠가부터 이성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패턴도 많다. 짝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고백, 데이트 신청을 앞둔 고민, 엇갈린 큐피드의 화살로 인한 고뇌, 갑작스런 이사로 인한 이별 같은 것들이 심리적 고민의 테마가 된다.
△ 점프트리A+(이은혜 작), 꽃보다 남자(카미오 요코 작), 그 남자! 그 여자!(쓰다 마사미 작)
학원 로맨스의 독자층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성인 버전의 로맨스 만화들도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연애 게임을 풀어가기 쉬운 장르적 장치들이 도입된다. 특히 대학교 기숙사, 하숙집, 셰어 하우스 등에 여러 남녀가 거주하면서 사랑의 짝짓기를 벌여가는 패턴이 많다.
한승원의 <무지개집 이야기>은 가지각색의 남녀가 함께 사는 다세대 주택에서 벌어지는 삶과 사랑의 이야기다. 다카하시 루미코의 <도레미 하우스>는 남편과 사별한 뒤 하숙집을 꾸려가는 여자 관리인과 그 집에 사는 재수생의 느린 연애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허니와 클로버>는 대학교를 배경으로 한 캠퍼스 러브 스토리인데 남자 주인공들이 함께 사는 자취방과 미술 대학교 작업실 등의 공간이 상큼한 연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소 독특한 동거의 설정도 있다. 오가와 야요이의 <너는 펫>에서는 여주인공이 어린 미남자를 집에 들여와 마치 반려동물처럼 키운다. 류채린의 <우리 헤어졌어요>는 5년의 동거 끝에 이별을 결심한 남녀가 어쩔 수 없이 같은 집에 계속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같은 성별끼리 동거하는 설정에서는 여러 캐릭터의 다양한 스타일이 드러난다. 김인정의 <꽃 같은 인생>에서는 끊임없이 연애하는 여주, 현실만을 바라보는 미소, 단 하나의 사랑을 지키려는 호연, 완벽한 한 사람을 기다리는 선이 서로 다른 연애관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그들의 선택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며 함께 연애의 게임에 참여한다. 모태 솔로 탈출을 위해 친구들이 도움을 준다든지 하는 면에서 직접적인 연애 심리의 테크닉도 전수해준다.
△ <꽃 같은 인생> 중에서(김인정 작)
여기에서 말하는 ‘판타지 로맨스’는 판타지 장르와 연애물이 결합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난 설정에서의 연애를 그린 만화들을 말한다. 황미나, 강경옥, 김진 등 여성 만화가들은 대하 역사물, SF, 판타지, 미스터리, 오컬트 등의 다양한 상상의 장르들을 선보였다. 그런데 이런 만화들 속에도 로맨스는 항상 중요한 줄기로 자리잡고 있었다.
미즈키 쿄코/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캔디>는 미국의 고아원과 영국의 기숙사 학교를 배경으로 장대한 삶과 사랑의 파노라마를 그려낸다.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프랑스 혁명의 한가운데서 사랑의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김진의 <바람의 나라> 윤미경의 <하백의 신부>에서는 신화와 역사를 소재로 거대한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박소희의 <궁>은 대체 역사의 상황을 이용한다. 연애의 대상은 유럽의 기사, 카리브 해의 해적, 세계적인 재벌일 수도 있고, 원수연의 <풀하우스>처럼 인기 절정의 배우나 아이돌 가수일 수도 있다.
스케일이 커지는 만큼 연애의 곡절도 굵직굵직하다. 그리고 세속의 하찮은 관계를 넘어서 사랑의 절대성과 같은 근본적인 고민으로 이끌기도 한다. 시간의 단위가 커서 남녀 주인공이 운명의 풍랑 속에서 흩어졌다 만났다를 거듭한다. 때론 연인의 죽음과 같은 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그것을 치유해가는 오랜 기간의 회복의 과정을 담기도 한다.
△ 바람의 나라(김진 작), 하백의 신부(윤미경 작), 궁(박소희 작), 풀하우스(원수연 작)
전 세계 4천만 부를 돌파했던 금단의 소설, V.C. 앤드루스의 <다락방의 꽃들>은 국내에서도 컬트적인 사랑을 받았다. 다락방에 유폐된 남매들의 근친상간과 같은 막장 극이 소녀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 역시 만화 속의 연애 심리를 파헤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로맨스 만화에서는 연애야말로 주인공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불가능한 연애는 주인공들을 더욱 극적인 상황으로 이끈다. 전쟁과 혁명, 신분의 차이, 미리 정해진 짝…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그런데 그 이상의 극단은 없을까? 하기오 모토의 <토마의 심장>, 다케미야 게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는 미소년 동성애, 사도마조히즘,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의 소재를 로맨스 만화에 도입하면서 사랑의 비극성을 더욱 극으로 몰고나갔다.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도전들은 있었다. 사촌 간의 아슬아슬한 연애 감정을 다룬 한승원의 <만나면 안녕>, 동성애를 다룬 몇몇 실험적 작품들이 있었고, 소위 BL물은 매우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사회의 법률, 도덕, 관습… 무엇도 사랑의 절대성을 막을 수 없다는 강력한 신념이 그 안에 있다.
남성 독자들을 위한 만화에서도 연애 관계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미유키> <터치>를 비롯한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들은 삼각관계를 기초로 한 연애 드라마가 중요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아다치는 로맨스의 감성을 적당히 절제하면서 적재 적소의 순간에 끄집어내 남녀 모두가 공감하는 연애 만화를 만들어냈다.
허나 남자 만화의 일반적 로맨스는 그와 다르다. <골든 보이> <동경대 이야기>의 에가와 타츠야, <비디오 걸> <아이즈>의 카츠라 마사카즈는 철저하게 남성적인 시각에서 로맨스를 다루는 작가들이다. 남자들에게도 섬세한 연애 감성은 있다. 남자 주인공은 짝사랑하는 여자 아이에게 고백하기까지 긴 고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또한 성욕의 문제가 이들의 연애담에 항상 중요한 요소가 된다. 여자 주인공들의 모습도 지극히 상투적이다.
2천년대 한국 남성 작가의 웹툰 중에도 소위 ‘순정 만화’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 있다. 강도하는 여러 연령대의 연애 관계, 특히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어가는 커플들의 이야기를 특유의 최루성 멜로로 그려왔다. 강도하의 <위대한 캐츠비>는 남성적인 시선에서 상당히 현실적인 어른의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마초 순정 만화다.
여성 만화의 세대적 성숙은 레이디스 코믹스라는 성인 여성들을 위한 만화 세계를 만든다. 소녀적 감수성에 머물러 있던 환상적인 연애를 현실화시키고, 어른으로서 겪게 되는 다양한 곡절들을 섬세하게 그린다. 특히 섹스에 관련된 정서적 육체적 표현이 훨씬 과감해졌다.
오카자키 교코의 단편집 <제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은 가슴이 작아 고민하는 여자 아이, 얼떨결에 섹스를 하고난 후에 당혹해하는 남녀 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안노 모요코의 <해피 마니아>는 사랑에 목말라 좌충우돌 연애 전선에 뛰어든 주인공 시게타를 통해 현대 여성의 솔직발랄한 연애관을 보여준다. 쿠스모토 마키의 <치사량 도리스>, 야자와 아이의 <하현의 달> 등 연애가 가져오는 어두운 심리적 고뇌를 다루는 ‘시리어스 물’ 들도 상당한 진영을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 잡지 <나인> <믹스> <오후> 등을 통해 성인 여성의 연애를 그린 작품들이 다수 등장했다. 그러나 성인 여성 만화 시장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해 단편 위주의 작품 활동이 이루어졌고 그 파괴력은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2천년대 들어 독립만화 진영에서 앙꼬의 <삼십살> <나쁜 친구> 등의 자전적 만화들이 현실적인 연애의 씁쓸한 후일담을 많이 그리고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1인칭 웹툰에서도 남녀 작가들의 솔직한 연애담이 공개되고 있다. 조석의 <마음의 소리> 정철연의 <마린 블루스> 서나래의 <낢이 사는 이야기> 등은 연애의 초기부터 결혼 이후의 생활까지 깨알같이 그리고 있다. 마인드 C의 <윌 유 매리 미>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장거리 연애를 알콩달콩하게 그려낸다.
웹툰과 독립만화의 정서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연애 관계의 묘사에는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현실적 연애의 양면성인 달콤한 데이트와 쓰라린 감정 싸움, 알콩달콩한 재미와 질척질척한 관계를 서로 나누어 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좌 : <마음의 소리> 중에서 (조석 작), <낢이 ??는 이야기> 중에서 (서나래 작)
연애는 무수한 감정의 곡절을 만들어낸다. 사랑이 아니라면 절대 인생에서 만나지 못할 마음의 경험들이다. 그 중에서도 처음 사랑을 느낄 때의 아찔함에 비할 순간은 없을 것이다.
소녀와 소녀는 다양한 방식으로 만난다. 새로 온 전학생이 은근 신경 쓰인다든지. 꼴 보기 싫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이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든지. 모두가 선망하는 그 사람이 보잘 것 없는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든지. 한눈에 보자마자 찌릿 전기가 통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시이나 카루호의 <너에게 닿기를>의 여주인공은 음침한 인상으로 모두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자신을 그저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인다. “정말 좋은 애다. 처음이야.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이런 기분도 태어나 처음이야.” 그러나 반대의 상황도 많다. 처음에는 너무나 싫었던 상대가 어느 순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방식이다.
여러모로 뛰어난 남자 주인공이 평범한 소녀에게 먼저 대시하는 경우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순끼의 <치즈 인 더 트랩>에서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 높은 선배 유정이 눈에 뜨이지 않는 홍설에게 접근한다. 그 상황에서 바로 연애에 뛰어들면 재미없다. 홍설은 의심한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유정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까지 더해져 계속 장벽을 치게 된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 가족이나 다름없던 사이가 연인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정애의 <루이스 씨에게 봄이 왔는가>에서 루이스는 어느 봄을 맞아 자신이 사랑을 할 때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사촌 여동생 아니엘라에게 고백한다. 당황한 소녀는 거절하고 자기 방으로 숨는다. 과연 루이스 씨는 봄을 맞게 될 것인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큰 모험이다. 온 마음을 다 주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연애라는 감정의 상태로 넘어가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만화들은 연애냐 아니냐의 밀고 당기기를 이어간다. 그것이 연애 만화에서 주연이 맡은 몫이기도 하다. 보통 조연급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애를 잘하는 커플이 많이 등장한다.

△ <루이스 씨에게 봄이 왔는가> 중에서(이정애 작)
어떤 만화들은 초반부터 명료한 커플 관계를 보여주고 거기에 집중한다. <공포의 외인 구단>의 오혜성은 엄지를 향해 말한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박소희의 <궁>에서는 평??한 여고생이 싸가지 없는 황태자와 정략 결혼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둘은 티격태격 하며 언제 깨어질지 모르지만, 어쨌든 둘 사이가 제대로 맺어지는 것이 결론일 것이라고 추정하게 된다. 허나 많은 만화들은 ‘누가 누구와 맺어질까’라는 짝짓기 놀이를 극의 중심으로 삼는다. 가능한 끝까지 그 결과를 숨긴다.
<캔디캔디>에서는 고아 소녀의 주변에 화려한 남성 캐릭터들이 둘러싼다. 요절하였기에 더욱 기억에 사무치는 첫사랑 안소니, 밝은 성격에 발명을 좋아하는 스테아, 약간은 새침해 보이지만 깔끔한 매력남 아치, 반항기가 넘치지만 모성애를 느끼게도 하는 긴 머리의 테리우스, 그리고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주는 알버트 아저씨... 이런 패턴은 <꽃보자 남자>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이시영의 <한눈에 반하다>에서 열일곱 소녀 ‘반하다’는 “인연인 남자가 도합 셋”이라는 무속인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제목과는 다르게 한눈에 반하기보다는 다양한 성격의 남자들과 사귀어본 뒤에 자신에게 맞는 짝을 정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어떻게 보면 이런 형태가 더 합리적이다. 첫눈에 반한 사랑과 평생의 가약을 맺는다는 것은 판타지다. 가능하면 여러 연애를 경험하고,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연애의 상대로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유는 독자들의 취향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 딱 하나만 고르기엔 나머지가 아까울 수도 있다. 이런 짝짓기의 아슬아슬함을 특히 잘 활용하는 것은 아다치 미츠루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삼각, 사각의 연애 관계로 독자들과의 심리 게임을 이어왔다. 이런 패턴은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노골적으로 재활용하고 있다. 다카하시 신의 <좋은 사람>에서는 직장 때문에 세를 들어 살게 된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여자 친구와 집주인 모녀가 연정을 느끼는 사각 관계가 아주 밀도 있게 그려진다.
어쨌든 사랑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간혹 폴리 아모리(비독점의 다자 간 연애)를 주장하거나 돈 후안과 같은 편력형의 연애를 즐기는 캐릭터가 나올 수도 있지만, 이런 태도는 연애 만화의 본질과는 너무 어긋난다. 단 하나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야 한다. 누군가와 맺어져 있다면 뺏어야 한다. 한 여자를 두고 목숨을 건 경쟁을 벌이는 이야기는 남자 만화의 전형이다. 여성 만화에서는 누군가에 대한 질투 때문에 그 남자 친구를 뺏는 장면도 나온다.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구애의 게임은 연애의 심리를 더욱 복잡하고 치열하게 만든다.

△ <한눈에 반하다> 중에서(이시영 작)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내 모든 게 달라졌어요.” 윤종신의 노래 <환생>처럼 사랑에 빠진 이는 완전히 새로 태어난다. 지금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세상 자체가 모두 달콤해 보인다. 안노 모요코의 <러브 마스터 X>에서 한 여학생은 추운 날씨에 학원 바깥에서 짝사랑하는 선배를 기다리며 생각한다.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도 좋아. 선배만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런 소녀틱한 내 모습도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그와 그녀가 나누는 닭살 돋는 속삭임, 심장이 쿵쿵대는 놀이동산의 데이트, 마음을 흔드는 감동적인 선물, 작은 토라짐과 그것을 달래는 따스한 키스… 만화는 죽은 연애 세포를 되살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약이다. “날계란 반 개는 나 줄거야?”라고 묻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소한 장면도 지상에서 가장 짜릿한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때론 제3자가 보기엔 손발이 오그라드는 행각도 자연스럽게 한다. <위대한 캐츠비>에서는 말한다. “누구든 비아냥거릴테면 비아냥거려봐. 연애짓이든 연애질이든… 철저히 경험하고 싶어. 남들처럼, 남들만큼, 남들보다.”그리고 남들의 시선 따위는 콧방귀로 날리고 서스럼없이 키스한다.
이강주의 <캥거루를 위하여>에서 진홍은 열 여덟살이 되던 생일날 마녀의 저주에 걸려 캥거루 얼굴이 되어버린다.“진정한 사랑이 널 구원해줄거야”라는 말을 듣고 세상 속으로 나아간 그는 과연 개구리 왕자처럼 사랑의 키스로 저주를 풀어낼 수 있을까? 그걸 기대한다면, 당신은 역시 사랑의 마법을 믿는 사람이다.
연애 상대의 감정 곡선이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한쪽이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다른 쪽도 마음에 들지만 간을 보기 위해 새침하게 구는 경우도 있다. 진화 심리학에서는 남녀의 육체적 심리적 차이 때문에 심리 게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용맹한 남자는 사냥에서 더 좋은 고기를 얻고 이를 이성에게 선사해서 마음을 얻고자 한다. 여성은 쉽게 선택하지 않고, 자신에게 구애하는 남자들을 신중하게 가늠한다. 남성 우위의 세계에서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여성이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짝사랑은 독자들의 마음을 특히 흔드는 테마다. <피너츠>에서 슈뢰더를 향한 루시의 끈질긴 짝사랑은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지만 시적일 정도로 아름답기도 하다. <도레미 하우스>에서 재수생 유사쿠의 짝사랑은 뻔히 드러난다. 그러나 하숙집 관리인 교코는 자신의 마음을 섯불리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 마음을 표시하지 못한다.
상대가 쉽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까? 상대를 공략하는 갖가지 방법들이 만화 속에 등장한다. 보통 남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여자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만 반대의 경??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는 노다메가 능글맞게 치아키의 세계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치아키는 그걸 귀찮아하는 척 받아준다.
항상 대놓고 마음을 표시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사랑이다. 자존심 문제도 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래서 생일 선물을 주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오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 주웠어.” “내가 딱 바라던 분홍색 운동화인데? 그리고 이 편지는 뭐야?” “그것도 누가 써서 벤치에 놔둔 걸 주웠어.”
연애에 임하는 남녀의 성격 차이도 흥미롭다. <윌 유 매리 미>에서 겉보기엔 근육질이지만 섬세한 순정파인 남자와 작고 귀여운 외모이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가 연애의 문에 들어선다. 남자는 이런저런 핑계로 시간을 끌다가 여자를 집에 데려다 준다. 그러고서도 현관문 밖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해 멍하니 서 있는데, 여자가 안에서 인터폰의 모니터로 그 모습을 내다보며 상대의 마음을 알아챈다.

3. 연애 안 해도 괜찮아. 하려면 행복하게 해. 주류 만화 속의 연애 문법은 수십년 동안 큰 변함이 없다.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난 괜찮은 외모의 여성이 그늘진 상처를 가진 남자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주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에 대한 일념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간다. 그러나 주류 바깥의 만화에서는 이런 공식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같은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그 제목부터 동시대 솔로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연애를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또 그런 자신을 긍정하고 싶다. 어릴 때부터 만화 속에서 세뇌당해온 연애 만능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연애는 좋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행복을 결정짓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만화는 무성애로 살아가는 방법도 알려주고 있다.
△ 마스다 미리 수짱 시리즈
모든 시대는 그에 걸맞는 감정 교육의 교과서가 필요하다. 성과 사랑에 대한 의식도 크게 바뀌고 있어, 그를 표현하는 만화 속의 연애 심리 묘사도 달라지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성과 연애에 있어 개방적으로 바뀐 듯한데, 또 본질적으로 사랑을 신비화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도 남아 있다. 다행히도 우리의 선택은 단 한 편의 만화에 제한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연애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주는 만화에 공감하면서도 가끔은 달달하고 애절한 사랑의 기분에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다채로운 빛깔의 만화 속의 연애를 체험하고, 그 중에서 나에게 맞는 답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