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특집이 인용한 제목은 아시는대로 MBC 버라이어티 쇼 ‘나는 가수다’가 원전이다.
탈락, 재도전, PD교체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2기로 임재범, BMK, 김연우가 참여하며 새로운 화제를 만들어가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김연우가 탈락했던 그 방송을 보면, 김연우가 부른 <나와 같다면>이나 임재범이 부른 <여러분>은 노래가 어떻게 감동을 주는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 감동을 더욱 크게 해 준 것은 쇼의 편집이다. 탈락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무대이면의 가수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편집했기 때문이 감동이 배가 되었다고 한다. (텐아시아 기사 링크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newsid=20110524170819132&cid=1234)
가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히 캐릭터가 된 것이라는 분석이고, 나도 동의한다. 바뀐 쇼는 가수를 사람으로 대한다. 그리고 사람인 가수가 노래에 인생을 담는다. 당연히 감동이다.
성애만화≠성인만화 / 성애만화⊂성인만화
앞서 ‘김양’이 나오는 만화의 예를 들어 성인만화의 가능성의 하나로 성애만화를 들었다. 성인들의 욕망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보자는 말이다. 일본산 야동이나 서양의 거대 포르노 판타지에 더 이상 성인들의 욕망을 저당 잡히지 말고, 한국산 성애만화를 통해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성애만화=성인만화’가 아니다. ‘성애만화⊂성인만화’가 맞는 수식이다. 성인만화는 더 광범위하고, 그 안에는 성인들을 위한 다양한 만화가 있다. 어떤 것이 성인만화일까?
앞서 링크에 소개한 텐아시아 김명현 기자의 제목을 빌어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좀 더 어른스러운 만화가 바로 성인만화다. 사람을 어른스럽게 대할 때, 거기서 감동이 나온다. 겉모습만 보고, 바르르! 무슨 부나방도 아니면서 불빛만 보면 달려들지 말고, 좀 더 어른스럽게 이야기를 하자는 말이다. 세상이 정말 솜털처럼 가벼워졌다. 남의 사생활에 참견하고, 달려들어 공격한다. 하루아침에 공격대상이 바뀌기도 한다. 가학의 세상을 빗대 헐리우드 영화는 좀비를 만들었고, 일본만화 <아이 엠 어 히어로>는 좀비물을 재해석해 가장 찌질한, 내면의 상처를 지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좀비물 망가를 보여준다. 아무튼, 어른스럽게 사람을 대하자는 말이다.
우리 만화에도 그런 전통이 있다. 많은 이들이 만화가 어린이를 위한 장르로 개발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만화는 오히려 어른들을 위한 작품이 먼저였다. 1955년 창간된 대중잡지 <아리랑>을 봐도, 만화가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사랑>, <야담과 실화> 같은 유사 매체에도 늘 만화가 있었다. 하지만 어른들을 위한 만화가 성인만화라는 자기 정체성을 명확하게 한 시기는 70년대다.
[그림1. 1955년 창간된 대중잡지 <아리랑>]
"70년대라 하면, 박정희 정권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며 도시화, 산업화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통해 1인 집권의 강압적 통치를 시작했고 도시로 내몰린 대중들은 영화, 음악, 출판물 등의 대중문화를 통해 삶을 위로받곤 했다. 이 당시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출판물은 주간지였다. <선데이서울>, <주간중앙>, <주간경향> 등 주요 일간지에서는 모두 엔터테인먼트 주간지를 출간했다. 이 엔터테인먼트 주간지는 우리의 선입견처럼 <플레이보이>나 <팬트하우스>같은 잡지가 아니라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해 주는 말 그대로 ‘잡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주간지에는 수영복을 입은 핀업걸 화보나 해외 여배우들의 육감적인 사진 등이 들어가며 에로티시즘을 자극하곤 했다.
이들 주간지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가 바로 만화였다. 아직 만화전문 잡지가 나오기 이전인지라 주로 2쪽 정도의 짧고 유쾌한 만화와 수 십 페이지에 이르는 이야기 만화가 주간지에 한 두 편 씩 연재되었다. 짧고 유쾌한 만화는 주로 성적 농담을 발랄하게 묘사했다. 두말할 것 없이 대표작은 1974년 <선데이서울>에 연재를 시작한 박수동의 <고인돌>이다."
출처 : 박인하 ‘에로틱 걸작 리뷰’ (, 거북이북스, 2007)
박수동은 <신판 오성과 한음>의 육성회비편이 그러하듯, <번데기 야구단>의 유격수 물꽁에피소드가 그러하듯 웃음을 현실에서 찾아냈다. <고인돌>의 웃음은 어린이 만화의 웃음과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른들의 욕망과 갈등을 짧은 페이지에 자연스레 풍자하고, 때론 눙치고, 얼르고 달래며 풀어간다. 즉, 요즘 스포츠 신문에 실리는 조폭활극류의 성인만화와 달리 페이소스라는 것이 있었다는 말이다. 계보를 따지자면, 찰리 채플린의 희극처럼 박수동의 만화에는 짙은 페이소스가, 연민이, 삶의 고통이 웃음과 욕망의 한 켠에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 바통을 김수정이 이어받았다. 김수정 하면 둘리아빠라는 브랜드가 연상되지만 사실 그는 <신인부부>와 <날자! 고도리>라는 걸작 성인만화를 그린 작가다. 각각 여성지 <신부>와 남성지 <직장인>에 연재된 성인만화는 역시 각각 신혼부부와 샐러리맨을 어른스럽게 바라보고, 그 삶에서 웃음을 찾아냈다. 직장인 소재 만화 중 최고의 걸작이라 불러도 무방할 <날자! 고도리>는 한국에서 가장 서글프게 웃기는 만화일 것이다.
[그림2. 박수동 작가의 <고인돌(1985년 판)>과 김수정 작가의 <고도리(1994년 판)>
슬픔의 원인은 고도리가 만년 평사원이라는 데 있다. 여성 속옷을 만드는 (주)여성해방에 (어떤 부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부장, 차장, 과장, 대리와 말단 고도리가 있다. 사원근무평가에서는 늘 꼴찌다. 고도리는 능력도 없고, 눈치도 없고, 거기에 허세만 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만우절을 맞이해 부원들이 단체로 고도리를 띄운다. 신입사원 후배는 고도리에게 넌지시 “참, 소식 들으셨어요? 바람에 의하면 금명간 인사이동이 있을 모양입니다.”라고 운을 뗀다. 동기인데 과장으로 진급한 나수재는 “지금껏 자네의 지대한 업적이 재평가되어 과장 선까지 진급이 확실시”된다고 바람을 넣는다. 그러자 갑자기 고도리의 태도가 바뀐다. “어허, 업무시간이네. 잡담 말고 일하게 일!” 저녁에는 술자리에도 초대한다. 다음날, 나수재는 고도리를 회사 옥상으로 불러 “만우절이 일요일이라 소급해서 장난한거야. 진짜 별 뜻 없었다구. 미안해”라며 사과한다. 고도리는 큰 소리로 웃고 말한다. “났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출세 따위에 신경 쓰는거 봤어? 자네도 알잖아?” 그리고 나서 만화의 맨 마지막 칸. 고도리는 혼자 화장실에서 눈물을 떨군다.
고도리는 허세가 가득하지만, 그것을 표현 못하고 그 허세 때문에 남 좋은 일만 해 주는 사람이다. 예컨대 연말연시 접대에 술상무로 따라나선 만년 말단. 접대 끝에 고도리는 병원에 입원하고, 주점불 부장와 나수재 과장은 시무식에 공로사원 표창을 받는다. 고달픈 샐러리맨의 자화상이다.
어른스러운 시선과 어른스러운 지갑
일본으로 눈을 돌리면 사람을 대하는 어른스러운 시선이 돋보이는 만화를 여럿 볼 수 있다. 일본작가 중 가장 문예적인 만화를 그리는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가 그렇다.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시선을 추억과 함께 그려내는 <아버지>, 열네살 시절로 돌아가 다시 자신을 돌아본 <열네살> 같은 회고적 시선의 만화도 빼어나지만, <동토의 여행자>나 <느티나무의 선물> 같은 단편집에 실린 작품을 보면 어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이 오롯하다.
40대에 데뷔한 아베 야로같은 작가도 있다. 그는 19년간 광고회사를 다녔다. 광고회사를 다니면서 만화를 꿈꾸었고, 2003년 공모전에 응모해 일반부문대상을 수상하고, 해가 바뀌어 2004년 3월 수상작이 잡지에 실려 데뷔를 하게 된다. 그의 첫 연재작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는 귀를 파주는 동양(그들의 시각에서 일본)의 독특한 행위에 모호한 섹슈얼리티를 담아낸다. 이후 그는 옴니버스 만화 <심야식당>을 통해 열두시가 넘어 신주쿠의 작은 식당에 들어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림3.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살>, 아베야로의 <심야식당>]
어른들에게는 사람을 대하는 어른스러운 방식이 필요하다. 연민과 관용과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을 지켜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어른들을 위한 만화에는 한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들을 부속품쯤으로 대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래야만 감동이 있다. 내가 한국의 성인만화를 보고 싶은 이유다. 우리나라는 어느 순간 거대한 기업처럼 변해갔다. 사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효율만이 남았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끊어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고개를 돌린다. 이 연민 없는 세상에 사람을 대하는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그려진 만화를 보고 싶다. 정말로. 나가수에서 느끼는 눈물의 감동을 만화에서도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사람을 그린 만화가 탄생하기 위해, 어른스러운 지갑이 필요하다. 좋은 만화가 먼저냐, 아니면 좋은 독자가 먼저냐. 물론 만화가 먼저이기는 하지만, 독자가 없으면 좋은 만화도 없다. 그러니 우리 지갑을 열자.
볼만한 성인만화 함께 읽기
*에로틱 걸작 리뷰, 70년대의 에로틱 만화들(박수동 <고인돌>, 정운경 <가불도사>, 강철수 <사랑의 낙서>
http://comixpark.pe.kr/130012753697
*박수동의 어린이 만화 가난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http://comixpark.pe.kr/130077179162
*만화를 통해 본 샐러리맨의 세계
http://comixpark.pe.kr/130041571140
*다니구치 지로 <동토의 여행자>
http://comixpark.pe.kr/130067970835
*다니구치 지로 <느티나무의 선물>
http://comixpark.pe.kr/120016137006
http://comixpark.pe.kr/120016305838
*다니구치 지로 <아버지>
http://comixpark.pe.kr/120008855818
*다니구치 지로 <개를 기르다>
http://comixpark.pe.kr/130103617870
*다니구치 지로 <고독한 미식가>
http://comixpark.pe.kr/130087662503
*아베 야로 <야마모토 귀파주는 가게>
http://comixpark.pe.kr/130106227581
*성인만화 봄 바람 살랑(한겨레 21 기고. 2002년 4월 24일자)
http://comixpark.pe.kr/120004072785
* 본 기사는 디지털 만화규장각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