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트는 한 작품의 탄생 과정을 가장 잘 드려내는 중요한 자료다. 현재 부천 한국영상만화진흥원 입주 작가로서 지원을 받고 있는 형민우는 <프리스트> 시작부터 한 권씩 출간할 때마다 간략하면서도 압축적으로 작가 노트를 기록했다. <프리스트>의 제작 흔적을 추적해본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많은 천사 가운데, 난 유달리 한 천사에 관심이 많다. 그는 그 어떤 천사들보다도 빛나는 존재였으며, 하나님에게 가장 사랑받는 영광된 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타락한다. 그가 받던 모든 영광과 존귀함을 상실한 채, 그토록 아름답던 그의 모습은 흉측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 타락의 이유는 ‘자만’이었다. 그것이 기독교 창조 신화에 나온 첫 번째 타락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담의 타락보다 더 이전의 것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군대를 이끌고, 하나님의 군대를 이끄는 성 미카엘(전투천사 혹은 단죄의 천사)과의 하늘의 전쟁에서 패해 지하로 불과 함께 떨어져, 붉은 용으로 불리며 세상에 속한 모든 더러움과 사악함의 상징이 되어버린다. ‘루시퍼… 히브리어로 ’빛나는 아침의 아들‘이란 뜻으로까지 불리던 그는 결국 지하세계 악의 왕으로 거듭남으로서, 이때부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 그가 인간을 유혹할 때 쓰는 술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스스로 ’자만‘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자신을 위대하고 아름답던 존재에서 추하고 더러운 존재로 떨어뜨린 그 ’자만‘을 인간에게 권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어쩌면 우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수도 없이 악마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1999년 <프리스트> 2권 서문)
만화 <프리스트>는 본질적으로 신의 질서에 반항하는 타락 천사들의 이야기다. 그 타락 천사들의 반란을 이끄는 것이 천사 테모자레이며, 그의 부하들은 테모자레의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 12개의 안식처를 지킨다. 테모자레는 주인공이자 신부인 이반이 가장 아끼는 여자를 죽임으로써 이반을 신에 대항하는 반항아로 만들고자 의도하나, 이반은 그 분노를 테모자레에게 돌린다. 이반은 같은 방식으로 테모자레의 적이 된 베시엘의 도움을 받으며 테모자레의 안식처를 하나씩 파괴해간다.
타락 천사들이 신에 대한 안티테제라면, 이반과 그를 지배하는 베시엘은 타락 천사들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그렇다고 이반과 베시엘이 신의 추종자도 아니다. 그런 역학구도가 작품에 갈등과 역동성을 불어넣는다. 타락 천사도, 이반과 베시엘도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각자가 가진 논리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상대방과 끝없는 전쟁을 벌여나간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과 알료샤의 대립보다 더 복잡하다.
<프리스트> 속에선 신도, 타락 천사도, 이반과 베시엘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모두 불완전하다.
형민우는 신, 타락 천사, 이반과 베시엘 속에서 인간을 발견하고, 반대로 인간을 통해 그들을 투영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신의 세계를 거역하는 이반이 하는 말을 보자. “만약 악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인간이 창조해 냈다고 한다면, 인간은 자기 모습과 비슷하게 그걸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프리스트>는 타락 천사들의 어두운 이야기인 동시에 신과 인간을 밝혀내는 투명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프리스트>를 탄생 가능케 한 몇몇 요소들을 소개하고 싶다. 영화 <헬레이저2> <갓스 아미> <이벤트 호라이즌> <드라큘라> <엑소시스트> <오멘> <장미의 이름> <프랑켄슈타인> 등등. 만화 <헬 쇼크> <베르세르크> <헤비메탈> <헬 보이> 등등. 게임 <블러드> <퀘이크>…. 어떤 요소들이 영감을 줄진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1999년 <프리스트> 3권 서문)
잡식성의 기호가인 형민우는 <프리스트>에 영향을 준 작품들을 열거했다. 그의 DNA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상경해 문하생 생활 없이 작품을 시작한 그의 스승은 다국적 만화였다. 미국에 거주하던 고모들이 선물했던 <헐크> <코난> 등은 어린 그에게 새로운 스펙트럼을 선사했다.
막상 만화가로 데뷔를 하면서는 연재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그는 “일본 만화의 그림체를 흉내내면서도 ‘난 신인이니까 괜찮다’라는 안도감으로 작품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 때 태어난 작품이 <열혈유도왕전>과 <태왕북벌기>다.
<태왕북벌기>를 마친 그는 1997년 무렵 미국의 고모들 집에서 머물며 본격적으로 미국 만화들을 접했다. 마이크 미뇰라의 만화 <헬 보이>도 그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틈이 나면 미국 만화책을 보고 따라 그리기도 했다. 그에게 내재된 미국 만화의 DNA는 결국 <프리스트>를 통해 화려하게 발현됐다. 그는 한국 만화와 미국 만화의 혼혈아인 셈이다.
“힘 있는 자의 횡포를 비난하면서도 힘 있는 자가 되길 원하고, 가난한 자들의 불우한 삶을 배려하며 감싸지만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자신의 창작품을 세상에 내보이고 또 이름을 떨치려하면서도, 정작 자기 스스로는 점점 더 군중과 떨어져 깊은 곳으로 숨으려한다… 가족의 사랑과 평화를 지키려는 이들은 자신의 울타리 밖의 모든 것을 향해 방어적인 자세를 넘어 공격적이고 잔인해진다. 그리고 그리해야만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스스로가 이미 잔인한 야수가 되어서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으리라…)” (2003년 <프리스트> 13권 작가의 말)
<프리스트>는 결국 모순과 분노의 이야기다. 형민우가 <프리스트>를 통해 구현한 세계는 모순덩어리다. 결코 그 누구도, 신조차도 속 시원하게 풀지 못하는 모순이다. 이반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쓴다. “신의 기적을 보고 믿음을 얻은 이는 많지만 너무 많은 기적을 봐서 믿음을 잃는 이도 있다”고. 형민우에겐 이것만한 리얼리즘이 없어 보인다.
이 모순이 촉발하는 것은 분노의 감정이다. <프리스트>의 등장인물들은 분노를 에너지 삼아 끊임없이 움직인다. 분노가 없는 <프리스트>의 이반과 베시엘이란 사막에서 연료가 떨어져 멈추어버린 폐차나 다름없다. <프리스트>의 등장인물들은 분노를 얻기 위해 자해하고, 또 상대방에게 상처를 낸다.
“혹자는 내가 악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거나, 폭력적 성향이 짙은 사람인 줄 아는 이가 있다. (순전히 작품으로만 나를 평가한 것이다.) 작품은 나에게 있어, 가면의 역할을 한다. 어떤 작가들은 작품에 자신을 반영하고 싶어하지만 내 경우는 오히려 나 자신을 숨기고, 나에게 없는 또다른 나를 만들고자 하는 성향이 짙지 않은가 싶다. 가끔 인터뷰를 할 때면 여지없이 듣는 소리가 있다. ‘의외로 평범하시군요.’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주위의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유치하고 덜렁대며 생각이 가벼운가를(또 무책임한가를...) 다 알고 있다. 나를 모르는 이들에게만 난 내 작품으로 가면을 쓰는 것이다.” (1999년 <프리스트> 4권 서문)
형민우는 작품 성향이나 외모에 의해 ‘오해’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해명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모순이다. 그는 작품이 가면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자기 자신의 뼈와 살임을 잘 알고 있다. 테모자레는 신에게 침을 뱉을망정, 행복했던 연인과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수하려 한다. 신에게 버림받은 2인자의 설움으로 인해 폭력을 휘두르는 그는 그 행위 속에서 ‘나를 좀 봐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테모자레가 바로 나같은 성격이다. 관심 가져주는 사람에게 더 포악해지려는 성향이 나다. 관심 있는 여자일수록 고무줄을 끊는 식이다. 어릴 적에 대인관계를 잘 못하는 성향이 심했다”는 형민우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설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를 지켜보던 삼손 카라스코는 돈키호테의 묘비에 ‘미쳐서 살았고, 정신 들어서 죽었다’란 글귀를 새겨 넣었다. 형민우 역시 정신을 차리는 순간, 그의 표현을 빌면 ‘어두운 정서가 메마르는’ 순간, 작가로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