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보다는 다양한 문화를 한데 아우르는 역할에 가깝다고들 한다. 그런데 종종 선도하는 경우도 있다.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나타난 이후 좀비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되었고, 수많은 장르를 통해 수많은 모방과 변주가 이루어졌으며,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민호 작가의 re.D도 좀비물에서 가지를 뻗어 나온 작품이다. 이 작품이 해외 특정시장을 염두에 둔 공모전 선정작이라는 걸 감안하면, 좀비야말로 어느 문화권에서나 먹힐 공통소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re.D의 성격은 보편적인 좀비물은 아니다. 그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SF에 가깝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게임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 그 소스가 세련되고 복잡한 21세기의 하이 퀄리티 게임이 아니라는 게 흥미롭다. 고전적인 1인칭 슈팅게임, 콕 집어서 말하자면 90년대 도스 게임으로 이름을 휘날렸던 <둠(Doom)>을 그대로 빼닮았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좀비가 되고,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 외에는 좀비물의 장르 규칙은 그다지 구체적으로 반영되지 않았다.
좀비 역시 사지가 썩어문드러지고 휘청휘청 돌아다니는 형상과는 딴판이고, 대체로 빠르고 강한 인간형 몬스터다. 독특한 점은 좀비가 외형적 특징과 위험도에 따라 4등급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1등급인 버던트(VERDANT)의 통나무 같은 다리, 딱 벌어진 근육질의 거구는 판타지에서 흔히 묘사되는 ‘오우거’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그리고 인간들은 좀비를 피해 ‘생존’하는 게 아니라 ‘사냥’해서 현상금을 받는데, 현찰이 아니라 포인트가 적립된다. 이 포인트로 나중에는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설정들은 이야기의 흐름이 아닌 자막으로 설명된다. 기본적인 시나리오가 있고, 단계별 스테이지에서 적을 척살하며 경험치를 쌓고, 레벨 업을 해나가는 액션게임과 다름 아니다. 그래서인지(수위 조절을 위한 자체 검열도 있었겠지만) 잔인성과 공포지수는 낮은 편이다.
re.D는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다. 추측하건데 훨씬 방대한 이야기의 인트로 격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신분이 높은 여자주인공이 출생의 비밀을 가진 ‘론 울프(Lone wolf)’ 남자주인공과 맞닥뜨리고, 여기에 각자의 캐릭터를 가진 조연들이 더해지는 전형적인 전개다. 마지막 장면이 네 명의 일행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Abbey Road패러디인 것도 후속편이 이어진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러니 스토리에 관한 언급은 향후의 이야기가 그려질 때까지는 보류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