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서 공간은 배경이 되는 도시일수도 있고, 거리일 수도 있고, 건축일수도 있고, 방 하나일 수도 있다. 그리고 방 안에 놓은 작은 소품 하나일 수도 있다. 등장인물은 이 공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간은 만화의 리얼리티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다. 이 공간의 리얼리티가 없을 때 만화는 비현실적이 된다. 때론 공간 자체가 만화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또 다른 캐릭터가 될 수도 있다. 공간이란, 만화에서 공기와도 같은 것이며 만화가로선 반드시 맞닥뜨려 해결해야 할 리얼리티의 핵심인 것이다.
# 오즈 야스지로, 그가 위대한 이유
만화와 영화처럼 이미지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장르는 이런 공간의 리얼리티가 실로 중요하다. 영화에서 카메라의 각도는 우리가 어떤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를 보여주고, 영화 내용에 잘 맞아떨어지는 촬영 현장은 우리를 그 공간으로 데려가준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같은 시간과 공간을 체험한다. 연출과 전개 기법이 영화와 흡사한 만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지역, 특정 공간을 실감하게 하려면 그 공간만의 느낌을 감독(또는 만화가)이 포착해내 관객(또는 독자)들에게 전달해주어야 하고 그 승부에 성공할 때 보는 이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 일본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감독 오즈 야스지로(1903~1963)는 그런 점에서 진정 위대한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들은 결코 과장하거나 현란하게 꾸미는 법이 없다. 있는 그대로, 남의 집 안방을 엿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화면을 잡아낸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어딘가 다른 일본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일본 특유의 공간에 맞게 화면을 찍는 촬영법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가장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공간은 다다미방이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일본에만 있는 방이다. 작고 좁고, 빛이 풍부하지 않은 이 방은 대다수 일본인들이 살아가는 가장 일본적인 공간이다. 의자나 침대를 쓰지 않고 우리처럼 앉아서 사는 ‘좌식생활’ 공간이면서 한국의 한옥 온돌방과는 또 다르다.
[그림3. 오즈 야스지로, 영화 <안녕하세요>] 그래서 이 다다미방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 오즈 야스지로가 생각해낸 촬영법이 ‘다다미숏’이란 것이다. 그는 서서 찍는 일반적인 촬영과 달리 다다미방 내부에서는 앉아있는 사람들의 높이에 맞춰 카메라를 고정했다. 좁은 다다미방에서 늘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는 일본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가장 잘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그저 카메라의 높이를 조절한 것뿐일 수도 있는 이 사소한 차이는 컸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다다미방 안에 영화속 등장인물들과 함께 앉아서 지켜보는 것처럼 화면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카메라의 높이를 조절한 것뿐일 수도 있는 이 사소한 차이는 컸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다다미방 안에 영화속 등장인물들과 함께 앉아서 지켜보는 것처럼 화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런 숏을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찍은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좁은 공간이 주는 느낌과 넓은 공간이 주는 느낌은 다르다. 화면에서 그 공간만의 느낌이 살아날 때 우리는 그게 실제 공간이라고 믿게 된다. 그게 바로 공간의 리얼리티다.
오즈 야스지로는 일본 만의 공간을 관객들에게 실제 보여주며, 기존 서양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일본 영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그림4. 오즈 야스지로, 영화 <꽁치의 맛>, <가을햇살>]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한국 영화나 만화는 어떻게 한국적인 공간을 담아내야 할 것인가?
사극이라면 한옥에 맞는, 실제 한옥의 공간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숏이 필요할 것이고, 지금 우리 시대의 화면을 잡아낸다면 한국인들이 사는 아파트의 느낌을 잘 포착해 살려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영화의 영상이, 만화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이제 ‘한옥숏’이나 ‘아파트숏’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순히 건축만이 이런 공간 리얼리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건축보다 더 큰 공간인 거리나 도시의 리얼리티는 더욱 중요하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리얼하게 만드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림 5. 윌리엄 프리드킨 영화 <프렌치 커넥션>, 우디 앨런 영화 <애니 헬>] 우리는 영화 <프렌치 커넥션>을 보면 그 속에서 프랑스 마르세유 특유의 골목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면 뉴욕의 느낌을 절로 받는다. 그건 영화에서 그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같은 건물 하나를 보여준다고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도시만의 어떤 느낌, 그것을 공간감으로 잡아내 전달할 때 현실감이 생기는 것이다. 작가인감독이 도쿄면 도쿄, 서울이면 서울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그런 공간감을 진정 이해하고 표현할 때 우리는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을 더 또렷하게 마주치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 영화에게 묻게 된다. 한국에는 한국 도시를, 한국 건축을, 아니 한국적인 공간을 실로 자연스럽게 느끼게 만드는 영화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 한국 만화에게 필요한 것, 공간 리얼리티
그렇기 때문에 한국 만화에게 바라게 되는 것이 공간 리얼리티다.
한국만화의 약점으로 지적되어온 것은 늘 리얼리티의 문제였다. 전문 만화만이 리얼리티가 관건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그 만화에는 개그의 리얼리티가, 순정 만화에는 순정만의 리얼리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리얼리티 중에서도 더욱 아쉬운 부분이 바로 공간의 리얼리티다. 만화 속 이야기 못잖게 배경 공간이 현실감이 있을 때 우리는 만화를 현실적이고 전문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그 현실감이 실제 현실에 기초해 설득력 있게 변형 될 때 우리는 더 그 새로움을 실감하며 만화가가 보여주는 우주의 일부가 된다.
한국 만화보다 일본 만화가 앞서있다는 평가를 받는 데에도 바로 이 공간의 리얼리티가 크게 작용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마스터 키튼>을 보면 우리는 그 무대가 유럽임을 그림만 봐도 자연스럽게 인식한다.
독일이면 독일 거리의 모습이 정확하게 그려지고, 영국이면 영국 특유의 주택들과 정원이 등장한다. 특별한 공간의 특별한 특징을 잘 표현하는 공간 묘사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유럽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을 다시 체험하며 키튼이 유럽에서 실제 활약한다고 믿게 된다. 그의 만화에서 공간과 건축, 건물 내부의 묘사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된다.
중요한 것은 만화에서 공간 리얼리티는 결코 배경 묘사를 세밀하게 해서 사진을 보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중요한 것은 공간의 특성을 짚어내는 표현력이다. 공간의 특징만 잘 잡아내면 그림은 단순해도 얼마든지 현실감은 살아난다.
[그림6. 우라사와 나오키 <마스터 키튼>]
일본의 대표적 만화 <도라에몽>을 보면 배경은 그리 정교하지 않다. 어린이용 4등신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만화이니 간결하게 생략된 그림으로 배경 공간을 묘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라에몽 속 등장인물들이 뛰어노는 골목길 풍경을 보면 일본 중산층 단독주택 거리의 느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캐릭터들은 이런 현실적인 배경에서 완성된다. 일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네 풍경 속, 그 골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 재미있는 거짓 이야기가 현실을 배경으로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70~80년대 한국 성인만화의 걸작인 박수동 화백의 <고인돌>은 어떤가. 이보다 더 간단할 수 없을 것 같은 가장 단순한 묘사로만 그리지만 이 ‘최소한의 만화’에서 공간적 리얼리티는 오히려 더욱 도드라진다. 그저 선 한 번 쉭 긋는 것으로 표현하는 바위, 언덕 같은 공간 구조는 이 만화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차이, 갑자기 바뀌는 새로운 무대 공간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액션은 공간에 맞게 적절하게 일어난다. 박수동은 공간을 최소화했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더 분명하게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그런 공간에선 저런 슬랩스틱 움직임이 일어나는 느낌을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공간 묘사의 달인이다.
[그림7. 후지코 F 후지오 <도라에몽>, 박수동 <고인돌>]
# 이야기는 공간으로 완성되고, 공간 속에서 리얼리티를 얻는다
이런 공간 연출과 묘사의 문제는 한국 영화와 한국 만화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 중의 하나다. 좁은 공간이면 좁은 느낌이, 복잡한 공간이라면 복잡한 느낌이 화면에서 살아나야 보는 이들은 자신이 그런 공간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영화와 만화에서는 피사체가 되는 인물들이 들어가 있는 공간의 느낌을 살려주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특정 도시를 무대로 했다면 그 도시에 가면 느낄 수 있는 그곳만의 특별함이 아니라 그저 그 도시의 인상적인 몇 가지 요소들을 집어넣는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화에서는 더욱 이런 공간과 배경의 리얼리티가 아쉽다. 앞서 말한 대로 공간의 묘사는 단순히 정밀하고 복잡하게 배경을 그리는 차원이 아니다. 만화의 전개가 특정한 공간 속에서 이뤄진다는 느낌을 얻어내게 만드는 기술이다. 이런 공간 묘사가 가장 아쉬운 장르 중의 하나가 순정만화다.
순정만화는 여성 청소년 독자들에게 성장기 중요한 동반자로 사랑받으며 한국 만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성인이 되면 순정만화에 대한 몰입도와 선호도는 크게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어른이 되면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만화와는 거리가 멀어지기 마련인 원인이 크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만화를 즐기는 여성 독자들의 경우 순정이 아닌 다른 장르의 만화들을 더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성인 독자들이 즐길만한’ 순정만화가 없는 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