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만화축제, 스물다섯 고개 넘어 어디로?
△ 앙굴렘국제만화축제 포스터(출처_https://www.bdangouleme.com)
‘만화축제’하면 프랑스 남서부의 중세도시 앙굴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월 말~2월 초 앙굴렘의 하늘은 찌뿌듯하거나, 비를 뿌리거나, 눈을 휘날리든, 셋 중 하나다. 강추위로 인해 입에서 김이 나고, 긴 줄을 선 채 발을 동동거리면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환한 웃음을 짓는다. 중세의 성곽(城郭) 안에서 맞이하는 만화축제의 시간은 너무나 특별하고, 그 신비한 시간에 내가 참여하고 만들어 간다는 의식 때문이리라.
올해로 25번째 생일을 맞은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역시 ‘아시아의 앙굴렘’을 표방하며 성장해 왔다. 8월 둘째 주의 따가운 여름 태양을 기다리게 만드는 마법의 축제. 축제장의 소란스러움에 가슴 두근두근하는 열정이 피어오르는 공간. 그 어떤 축제보다도 뜨거웠던 부천국제만화축제 역시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인해 축제 시간, 방식, 운영 등 정체성에서 불가피하게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단지 코로나19 때문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팬들의 요구, 만화 제작, 소비, 시장 등의 변화로 인해 BICOF는 매년 업그레이드를 위한 숙제와 도전을 받아 왔다. 여기에 부응하지 못하면 축제는 힘 빠진 태풍과 다를 바 없다. 한 고개, 한 고개 넘기가 쉽지 않다. 스물다섯 고개를 맞이한 BICOF는 과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일까.
SICAF, 사라지나?
1년마다 돌아오는 축제의 시간은 사계절처럼 자연발생적으로 왔다가 지나가지 않는다. 며칠 간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선 그 나머지 시간에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우선 부천국제만화축제처럼 1년에 한 번씩 행사를 열었던 콘텐츠 관련 축제, 컨벤션 행사들이 어떤 상태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캐릭터라이선싱페어 포스터(출처_https://www.characterfair.kr)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하는 ‘캐릭터라이선싱페어’도 요즘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매년 7월 중순을 지배해 온 이 행사는 코로나19 전까지만 해도 나흘 간 12~13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코로나19가 습격한 2020년 행사는 쉬어 갔고, 그 다음해에는 우여곡절 끝에 연말에 규모를 대폭 축소해 열렸다. 관객은 1만 명대. 2년 연속 행사가 중단되는 것을 막았을 뿐이다. 올해는 3년 만에 7월로 복귀했으나, 관객은 3만 명을 넘지 못했다. 장소도 코엑스 1층 A홀로 줄였고(예년에는 A, B홀을 통째로 사용), 업계 유명 기업들의 부스 참가도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캐릭터 업체들이 코로나19 기간 동안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도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중구 한국콘텐츠진흥원 팀장은 “아쉬운 점이 많다. 내년에는 더 잘 준비해서 알찬 행사를 꾸미겠다”고 밝혔다.
부천국제만화축제보다 한 살 더 많은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축제(SICAF)'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이 행사는 올해 명맥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서울시 지원금(예산)이 줄어 왔고(2015년 7억 원, 2018~2021년 5억 7000만 원), 올해는 아예 편성되지도 않았다. 이 행사는 만화,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의 7월을 즐겁게 해 주곤 했다. 특히 7월 여름밤의 무더위를 달래는 데는 SICAF 영화제만한 것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마음속에서 늦은 여름 밤 SICAF에서 본 애니메이션 <빨강 머리 앤>의 초록 지붕을 찾고 있다!
△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축제 포스터(출처_http://sicaf.org)
2010년대 들어 SICAF에 본격적 위기가 찾아왔다. 삼성동 코엑스, 대치동 SETEC, 남산 애니메이션센터&명동 거리, 동대문 DDP,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등으로 장소가 오락가락했으며, 개최 월도 거의 매년 바뀌다시피 했다. 이는 SICAF의 정체성 위기를 불러왔고, 다음 행사에 대한 기대감을 갖지 못하게 했다. 많은 만화가, 애니메이터가 십수 년간 쌓아 올린 SICAF의 공든 탑은 전시 분야부터 무너졌다. 이어 영화제도 그 파고를 이겨 내지 못했다.
△ 서울 팝콘 포스터(출처_https://seoulpopcon.org)
서브컬처 행사인 ‘서울팝콘’은 3년 만에 돌아와 그 명맥을 이어 갔다. 2020년, 2021년 쉬어간 데다 저작권 문제로 ‘서울코믹콘’이라는 간판마저 뗐지만, 코로나19 기간 중 이러한 행사를 기다리던 마니아들을 결집하는 효과를 보았다.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비중이 줄어든 대신 NFT, 플랫폼 등이 메워주었고, 코믹콘의 강점이었던 코스튬 플레이 참여자가 행사장에서 눈에 띄게 늘었다.
축제는 역시 “지지고 볶는 맛”
BICOF는 역시 코로나19로 인해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행사 중단 대신 오프라인 축제에서 온라인 축제로 급격하게 전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BICOF의 정체성에도 균열을 가했다.
그럼에도 BICOF가 위기 수습이 난망한 SICAF 등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BICOF는 부천 시민이 터를 닦고, 일군 만화생태계라는 점이다. 부천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려는 축제 측의 노력은 지속적이고 일관됐고, 나름 효과를 보았다. BICOF는 이제 ‘경기도 10대 축제’의 단골손님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축제는 역시 “지지고 볶는 맛”이라고 생각한다. 축제가 꼭 세련되어야 재미있는가? 덜 세련되어도 축제에 모인 이들의 열기에 감염되는 편이 훨씬 재미있다. BICOF는 초창기부터 그런 축제였다. 부천종합운동장 1층에 사무실을 둔 부천정보센터 시절에는 복사골의 향취에 취할 수 있었고, 부천시청과 부천 소풍터미널 등을 중심으로 부천 시가지를 폭넓게 활용할 때의 축제는 ‘만화도시 부천’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일깨워 주었다. 부천시청 몇 층인가의 어느 복도 구석에서 사인회를 펼치고 있던 만화가들을 찾아다니며 만나던 때의 즐거움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추억이 됐다.
2009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한국만화박물관이 건립된 후에는 두 건물이 축제의 트윈타워가 되다시피 했다. 인근의 상동영상문화단지, 상동호수공원까지 축제장으로 끌어들이며 상동까지 축제를 연계시키려는 전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축제와 상동의 상권까지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너무 떨어진 공간성 때문에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았지만......
△ 2015 부천국제만화축제 포스터(출처_https://www.bicof.com)
2015년, 2016년에는 축제 업그레이드를 시도했다. ‘글로벌화’와 ‘유료화’가 키워드였다. 해외 유명 만화가들을 대거 초청하고, 무료 축제에서 탈피해 사상 처음으로 유료화에 도전했다. 그러려면 축제 콘텐츠의 질적 향상이 불가피했다. 관람객이 표를 사고도 만족할 수 있는 축제가 되어야만 했다(수입 : 2015년 약 9424만 원, 2016년 8118만 원). 2015년의 경우 글로벌 전시관을 조성하고 국제 전시만 4개(핀란드 ‘무민70, 시계태엽을 감다’전, 일본 ‘마스다 미리, 수짱의 공감일기’전, 체코 ‘몬스터카바레 같은 세상’, 프랑스 ‘샤를리 엡도의 입을 막아라!’전 등)를 선보였다. 2016년에도 글로벌 전시관을 포함해 총 12개의 전시를 열었다. 축제사무국은 확실한 볼거리를 보여 주려고 작정한 듯했다.
국내 작가들도 축제 활성화를 위해 두 팔을 걷어붙였다. 2015년 특별전 ‘짐승의 시간’전을 직접 준비한 박건웅 작가는 문화동산 입구의 폐건물을 골라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방을 재연했다. BICOF가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는 환상의 매치업이었다. 어두운 터널 같은 폐건물이 고문실로 거듭났는데, 들어가는 순간부터 오싹했다. 박 작가는 축제 기간 내내 전시장 입구에 테이블을 놓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의 만화책 <짐승의 시간>을 판매했다. 나는 책값을 할인해 달라는 구매자의 요구에도 “깎아 줄 수 없다”며 제값을 받고 판 박 작가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며 미소를 지었다. 축제장에서 작가가 책값을 할인해 주기 보다는 구매자가 정가에 구입한 책에 정성스럽게 사인을 해 주는 것이 수준 높은 축제의 정석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축제의 “지지고 볶는 맛”의 일면이다.
축제에서 뭘 해야 할까?
만화축제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도 같다. 현시점에 맞는 대중의 관심을 파악해 축제 콘텐츠로 녹여내야 한다. 예를 들어 2017년 제20회 BICOF 때는 VR웹툰이 만화계의 핫이슈였다. VR웹툰이 곧 다가올 웹툰의 미래 같은 기세였다. 그래서 ‘VR웹툰전-가상현실에서 만화를 만나다’전시가 편성됐다.
△ 2016 부천국제만화축제 ‘스콧 맥클라우드’ 초청 토크쇼(출처_https://www.komacon.kr)
2016년 축제의 주제는 ‘만화의 미래’였다. 이 주제를 살리려면 <만화의 미래>를 집필한 미국 만화가 스콧 맥클라우드가 꼭 필요했다. 스콧 맥클라우드는 초청해 응했고, 그와의 대담은 BOCIF 컨퍼런스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몰렸다.
△ 2022 부천국제만화축제 포스터(출처_https://www.bicof.com)
올해 제25회 BICOF 주제는 ‘당신은 이(異/e/二) : 세계로부터 초청되었습니다’이다. 또한 ‘축제는 길었던 펜데믹 상황 속에서의 단절과 변화, 그 가운데...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 생각거리, 할 거리를 제안합니다’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지난해 제24회 BICOF가 ‘뉴 노멀, 새로운 연결’이란 주제의 온라인 행사로 치러졌음을 감안하면, 올해 역시 코로나19 이전의 오프라인 축제로 완전히 복귀하지 않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종식된다 하더라도, 온라인 없는 축제는 이제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온라인 관련 장비의 비용은 치솟는 물가와 비례해 해마다 상승한다. 축제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골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다.
만화 시장이 변한 것도 BICOF 축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키운다. 콘텐츠 업체는 제작에만 집중하고(스튜디오화), 유통은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거대 플랫폼이 담당하다시피 하는 시장이다. 콘텐츠 업체가 굳이 개별적으로 만화마켓에 들어와 세일즈나 홍보를 할 필요성도 없다. 과연 만화마켓이 축제에 어울리는가? 그렇다면 SPP나 잡페어 같은 행사들을 적극적으로 키워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더 큰 담론으로 연결된다. BICOF는 향후 문화축제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산업축제로 가야 하는가라는 담론이다. 나는 둘 중 택일하라면 BICOF가 문화축제로 가기를 희망한다. 참가자들의 땀과 열정이 8월의 무더위를 이기는 행사가 되기를(SICAF가 무너졌으므로 더욱).
“축제에서 뭘 해야 할까?”라는 고민은 매년 반복되는 축제의 시발점이다. 과거의 축제에 비해 축제의 내외적 상황은 복잡하다. 그러한 가운데서 큰 방향성을 잘 잡길 기대한다. 펜데믹 고개를 넘어 BICOF의 “지지고 볶는 맛”을 경험한 이들과 그러한 맛을 목말라하는 새로운 만화, 웹툰 팬들을 불러 모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