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1일. 언제나처럼 성대한 샌디에이고 코믹콘이 열렸고, 또 언제나처럼 아이즈너 수상작의 발표가 있었다. 하비상과 함께 미국 만화의 현황을 보여주는 이 시상식에서 몇 가지 반가운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연상호, 최규석 콤비의 <지옥>이며 또 하나는 네이버 웹툰을 통해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레이첼 스마이스의 <로어 올림푸스>다. 각각 지난 1년간 미국에 발매된 아시아권 만화를 꼽는 Best U.S. Edition of International Material - Asia 부문과 인터넷 상에서 연재하는 만화를 꼽는 Best Webcomic 부문에 노미네이션 되었으며, <로어 올림푸스>는 작년에 이어 연속으로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물론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뒤늦게라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두 부문에 어떤 작품이 있는지 훑어보는 것은 어떨까. 올해의 경향은 어떠했는지, 우리와 어떻게 관심사가 다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Best U.S. Edition of International Material - Asia
이 부문은 지난 1년간 미국에 발매된 아시아권의 만화를 대상으로 한다. 본래 현지화 발매 작품을 다루던 Best U.S. Edition of International Material이었으나, 일본 작품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2007년에 Japan 부문을 따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 Asia로 이름을 바꾸며 아시아권 만화 전체를 대상으로 삼도록 변경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 만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나 지난 2년간은 작품 대다수가 동시대 일본 만화로 채워져 있었을 정도다. 올해도 <지옥>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 만화로 구성되었지만, 단 한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뒤늦게 미국에 발매된 작품들이라는 특이점이 있다. 그만큼 전 시대의 쟁쟁한 작품들이 선정된, 특별할 정도로 치열한 경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더해 일본의 연재 작품들이 없다는 점 또한 지난 년도와 비교해 특이한 지점이다.
수상작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1983년 작 <슈나의 여행>이다.
연상호, 최규석 <지옥>
특정인의 죽음에 대한 초자연적 고지와 심판이 연이어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중심으로, 공포에 대한 집단적 반응을 그리는 이 작품은 <사이비>나 <부산행> 등에서 보인 연상호식 지옥도의 연장선을 보인다. 최규석의 건조하고 관조적인 작화는 이런 비현실적인 세계에 객관적인 터치를 부여한다.
2023년 본 부문에 선정된 유일한 일본 외 국가의 만화이며, 2021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방영되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끌어냈다. 이 결과가 아마도 작년 미국에서의 발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후지모토 타츠키 <룩 백>
<파이어 펀치>, <체인소 맨>으로 유명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약 150페이지에 달하는 중편이다. 2021년 일본에서 가장 화제를 불러 모은 작품이며 동년 12월에 ‘2022 이 만화가 대단해! 남성 편’에서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짧은 만큼 후지모토 타츠키의 특징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으로 서사에 의한 직관적 전달보다는 개별의 칸들이 가진 내적 배치와 칸들의 복합적 배치를 더 우선시하여 연출되었다. 특히 영화적 미장센의 차용과 더불어 칸과 칸의 연쇄라는 만화적 작법이 유려하게 작동한다. 표층적으로는 만화가를 꿈꾸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다루는 청춘 드라마지만, 내적으로는 죽음이라는 사건과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며 나아야 하는가에 대해 덤덤한 톤으로 전달하는 작품이다. 2019년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에 대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마음을 담은 헌정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토 준지 <블랙 패러독스>
이토 준지는 2021, 2022년 연속으로 본 부문을 수상한 강자로 올해도 어김없이 노미네이트 되었다. 본작은 일본에서는 2009년에 발간된 작품으로 근래 이토 준지 작품을 유통하고 있는 Viz Media를 통해 2022년에 미국에 발간되었다. 자살 사이트를 통해 동반 자살을 목표로 모인 네 사람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이야기는 결국 죽음의 세계와의 연결과 과도한 욕망의 발산이라는 이야기로 이어져 언제나처럼 묵시록적 결말을 맞이한다. 이토 준지의 전작들인 <소용돌이>, <공포의 물고기>와 같은 커다란 줄기를 통해 이어지는 연작 구성 작품이며 총 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애석하게도 올해는 수상이 불발되며 3년 연속의 영예를 거머쥐지는 못했다.
야마다 무라사키 <신키라리>
일본 초기 여성 만화를 대표하는 야마다 무라사키의 초기 대표작. 주부인 야마카와 치하루를 주인공으로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작가인 야마다 무라사키는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 만화’의 성립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작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에세이스트와 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국내에는 <성질 나쁜 고양이> 한 작품만이 정식 출간되어 있다. 2009년 타계했다.
두 딸을 기르는 젊은 주부의 이야기를 통해 가정과 여성이라는 테마에 집중하고 있는 작품으로, 아이들의 관찰을 통한 깨달음이나 남편이라는 존재에 대한 양가적 감정 등을 담백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시구처럼 쓰인 언어들과 여백이 넓은 이미지가 결합해 특별한 감각을 형성해 내는 등 에세이스트이자 시인인 작가의 언어적 감각이 탁월하게 드러난다.
제목인 <신키라리(しんきらり)>는 일본의 시인 카와노 유코(河野裕子)의 단가 ‘유채꽃(菜の花)’의 한 구절(しんきらりと鬼は見たりし菜の花の間に蒼きにんげんの耳 しかし鬼は少女を探していた)에서 따왔다. 의미상으로는 ‘반짝하며’를 뜻하는 시구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기에 북미에서는 <Talk to my back>이라는 제목을 새로 붙이기도 했다. 2022년에 미국에 발간된 뒤 2023년 초 일본에서도 문고판으로 다시 복각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슈나의 여행>
1983년 발간되었으나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야자키의 또 다른 대표작. 말풍선의 사용을 극히 줄이고 박스없는 내레이션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그림책 풍미의 작품이다. 티베트의 설화인 ‘아추 왕자와 보리씨앗’(또는 ‘개가 된 왕자’)을 기반으로 삼는 이야기이지만 큰 틀만 가져왔을 뿐 전체적으로는 미야자키의 창작물이다.
미야자키의 또 다른 만화<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거의 동 시기에 제작되었지만, 훨씬 더 짧고 집약적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흑백 만화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는 달리 미려한 수채화로 채색되어 있어 미야자키의 화력(畵力)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여러 가지로 이후 미야자키 작품의 원형적 요소들을 품고 있으며 특히 <모노노케히메>와는 접점이 깊다. 미야자키의 문명과 자연이라는 테마 역시 충분히 살리되 지나치게 양극적인 방식으로 설정한 애니메이션 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는 달리 훨씬 더 복합적인 시선으로 그려져 있기에 마찬가지로 <모노노케히메>를 연상시킨다. 특히 살아있는 인간을 농사짓는 거인으로 뒤바꿔 자연을 유지하는 신인(神人)이 보여주는 가혹함은 <모노노케히메>의 사슴 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올해 Best U.S. Edition of International Material - Asia 부문의 수상작이다.
* 2023 아이즈너상의 아시아 만화와 웹 코믹들 - Best U.S. Edition of International Material - Asia
* 2023 아이즈너상의 아시아 만화와 웹 코믹들 - Best Webcom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