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1일. 언제나처럼 성대한 샌디에이고 코믹콘이 열렸고, 또 언제나처럼 아이즈너 수상작의 발표가 있었다. 하비상과 함께 미국 만화의 현황을 보여주는 이 시상식에서 몇 가지 반가운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연상호, 최규석 콤비의 <지옥>이며 또 하나는 네이버 웹툰을 통해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레이첼 스마이스의 <로어 올림푸스>다. 각각 지난 1년간 미국에 발매된 아시아권 만화를 꼽는 Best U.S. Edition of International Material - Asia 부문과 인터넷 상에서 연재하는 만화를 꼽는 Best Webcomic 부문에 노미네이션 되었으며, <로어 올림푸스>는 작년에 이어 연속으로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물론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뒤늦게라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두 부문에 어떤 작품이 있는지 훑어보는 것은 어떨까. 올해의 경향은 어떠했는지, 우리와 어떻게 관심사가 다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Best Webcomic
Best Digital Comic 부문으로부터 2017년부터 분리된 부문으로, 디지털의 방식으로 유통되는 Best Digital Comic 부문과 달리 웹 환경에서 연재되는 작품군을 중심으로 삼는다. 서비스되는 형태의 차이로 구분하기 때문에 사실상 작품 특성으로는 양자 간을 구분하기 어려운 편이기도 하다. 세로 스크롤 방식이 웹 연재의 기본인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여전히 다수의 페이지 기반 만화들이 홈페이지 환경으로 서비스되고 있으며,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webtoon.com 같은 전용 연재 플랫폼과 더불어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 연재, patreon.com 같은 후원 기반의 연재 방식 등 디지털을 통한 연속된 제공 방식 모두를 포함한다.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Best Digital Comic 카테고리의 경우 스토리텔링이나 길이 면에서 만화책이나 그래픽 노블에 필적하는 롱폼이어야 한다. 일간 신문의 연재물과 유사한 웹코믹은 포함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Best Webcomic은 주류 바깥에서의 창작이 어떠한지 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샘플들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이었으나, 미국에서도 한국식의 세로 스크롤 플랫폼들이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주류의 작품도 어느 정도 거론되는 편이다. 작년과 올해의 수상작인 <로어 올림푸스>는 비록 도전 만화 시스템인 canvas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엄연히 webtoon.com에서 서비스되는 메이저리티로 구분할 수 있다.
올해는 웹툰과 같은 세로 스크롤 방식의 작품이 세 편 선정되었다. 허나 <Mannamong>은 출판물을 기반으로 세로 스크롤로 ‘재편집’한 방식이기에 엄밀히는 <로어 올림푸스>와 <Deeply Dave>의 두 편으로 볼 수도 있다.
올해는 작년에 이어 레이첼 스마이스의 <로어 올림푸스>가 수상했다.
토니 클리프 <Practical Defence against Piracy>
2012년 Best Digital Comic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딜라일라 더크 시리즈가 네 번째 책으로 다시 돌아왔다. 구성적으로는 페이지 구성의 디지털 코믹에 가깝지만 patreon.com에서 후원 연재되는 작품인 덕분에 웹 코믹으로 분류된 듯 하다.
토니 클리프의 본 시리즈는 약 20년에 걸친 유서 깊은 시리즈로 2007년 28페이지 분량의 단편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이미지 코믹스의 앤솔로지 코믹인 <Flight>의 5호(2008년 발간)에 두 번째 에피소드가 실리면서 시리즈의 가능성이 열렸고, 2011년 첫 번째 책인 <Delilah Dirk and the Turkish Lieutenant>가 발간되었다. 이후 2016년에는 영국에서의 모험을 그린 <Delilah Dirk and the King's Shilling>이, 2018년에는 헤라클레스의 보물을 찾아 나서는 <Delilah Dirk and the Pillars of Hercules>가 발간되었다.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본작은 19세기 가상의 여성 모험가 딜라일라 더크의 모험을 그리는 활극 작품으로 토니 클리프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나폴레옹 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펄프픽션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땡땡의 모험> 시리즈나 <코르토 말테제> 같은 모험극을 연상시킨다.
또한 토니 클리프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19세기의 여성 모험가’라는 사실을 상당히 강조하는데, 첫 번째 책인 <Delilah Dirk and the Turkish Lieutenant>의 도입부에서 이미 그러한 설정을 보인다. 딜라일라를 사로잡은 술탄은 딜라일라가 단련된 전사라는 셀림 중사의 보고를 받으며 “WOMAN DO NOT FLY”나 “HA! a woman! a skilled fighter!”라는 대사를 내뱉지만 이내 그의 단련된 검술과 하늘을 나는 배에 의해 농락당한다. 이후에도 딜라일라는 명령보다는 자유, 자비보다는 명성에 더 가치를 두는 피카레스크 캐릭터로 묘사된다. 첫 번째 책에서 딜라일라와 함께 행동하게 된 사이드킥 셀림에게 보수적이면서 윤리적 캐릭터를 부여함으로 양자간의 케미스트리를 끌어내는 것 또한 재미있는 요소다.
하지만 이 네 번째 책인 <Practical Defence against Piracy>는 이전 시리즈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딜라일라 더크의 오리진을 그리는 이 책은 19세기 영국 대사의 딸인 알렉산드라 니콜스가 어떻게 검술의 달인이자 자유를 갈망하는 모험가가 되었는지를 차분히 그린다. 재미를 위해 의도적으로 고증을 신경 쓰지 않는다던 토니 클리프의 이전 인터뷰와 달리, 본작에서는 19세기 영국 여성의 한계지점을 그리기 위해 꽤 세세한 고증을 지켜나가기도 한다.
자유를 가르쳐줬던 그리스인 어머니가 15세 생일을 경계로 ‘레이디’가 되기를 바라자 극도의 실망감을 느끼는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리스의 작은 섬마을에 드리우는 해적 침략의 위협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이전 시리즈와 달리 딜라일라의 내면 묘사에 더 힘을 들이고 액션보다는 드라마적 성질이 상당히 강조되고 있으며, 본 시리즈가 여성주의 텍스트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마이클 애덤 렝옐 <The Mannamong>
webtoon.com의 도전 만화 페이지인 canvas와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연재 중인 작품이다. 웹 연재는 세로 형식으로 연재하고 있지만, 말풍선의 형식과 폰트 사이즈의 변동 등을 통해 페이지 형식을 재편집해 연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작품은 홈페이지를 통해 단행본으로 구매가 가능하다.
고대의 정령 ‘만나몽’에 관한 가상의 신화를 바탕으로하는 이 작품에는 여러 일본 미디어의 코드들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다양한 외견과 능력, 성질을 지닌 만나몽들에서는 <포켓몬스터> 혹은 <디지몬> 시리즈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른 존재와 일체화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이어지는 서사에서는 순화된 <기생수>나 <강식장갑 가이버>(혹은 그들의 모체인 나가이 고의 <데빌맨> 혹은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가면라이더>) 등이 떠오른다. 주인공과 일체화된 만나몽인 ‘톤토러스’의 디자인은 세가의 비디오 게임(이자 다수의 미디어믹스 작품으로도 제작된)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90~00년대의 북미에 들어온 일본 작품들의 교집합으로 탄생한 복합체처럼 보인다. 또한 작화의 밀도나 서사의 구성 등에서 단련되지 못한 느낌을 주고 있는 부분에서 이 작품은 상당한 아마추어리즘의 감각을 전달한다. 앞서 전달한 ‘망가적’ 코드들은 트렌드나 시장을 기반으로 한 세세한 기획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취향이 누적되어 형성된 자기 만족적 엔터테인먼트로 이해할 수 있다. <The Mannamong>은 단련된 작가 혹은 구조화된 스튜디오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 만화를 좋아하던 만화광의 취향 고백 같은 작품인 셈이다.
여기엔 우리가 기대하는 고도화된 기획의 첨예함은 없지만, 취향적 연결 혹은 노스텔직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지금 북미의 작가들이 어떠한 작품들을 지나 현재에 도달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흥미로운 샘플이기도 하다.
그로버 <Deeply Dave>
디지털 환경에서만 작동하는 만화라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시도가 있다. 이를테면 하이퍼 링크를 통한 연결지점의 형성이나, 마우스 반응을 통한 새로운 칸의 등장, 스크롤 반응에 따른 음악의 출력이나 애니메이션의 삽입 등이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만화의 칸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누구나 상상했던 가능성일 것이다.
그로버는 이런 ‘움직이는 만화’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작가다. 그의 신작 <Deeply Dave>는 심해에 잠긴 우주선으로부터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바닷속을 여행하는 데이브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러한 기술적 시도가 언제나 그렇듯 복잡하지 않은 플롯과 알아보기 쉬운 칸 구성을 보인다. 그로버가 보이고 싶은 핵심은 어디까지나 ‘움직이는 이미지의 연쇄’이기 때문이다.
<Deeply Dave>는 움직이는 만화를 만들어 온 작가의 단련된 기술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스크롤에 반응하는 기술 혹은 애니메이션의 반복 출력 등 여러 가지 ‘움직이는 방식’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핵심은 움직인다는 사실보다는 ‘어디까지 얼마나’ 움직여야 그것이 만화적 연쇄를 해치지 않는지 고민한 흔적이 눈에 띈다.
물론 이러한 움직이는 만화는 한계지점이 있다. 말하자면 움직이는 그림과 활동 묘사 등을 통해 ‘움직이는 척’하는 그림 중 어느 것이 더 역동적인가? 만화는 언제나 후자가 더 역동적이라 말하며 또한 그것을 언제나 증명한다. 오히려 움직이는 그림은 만화가 보여주는 환상성을 제거하고 움직임에 대한 기대를 둔화시킨다. <Deeply Dave>가 보여주는 재기발랄한 동적 연출들을 지켜보는 것은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다시금 움직이지 않는 만화를 보고 싶다는 욕망을 떠오르게 한다. 무엇보다 그로버가 주저하는 지점은 칸과 칸의 연쇄가 이루어지는 지점에서의 움직임이다. 움직임을 마무리하면 다음 칸의 효과가 줄어들 것이고, 그렇다고 움직인다는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칸들은 움직임이 ‘도중’에 멈춰서고 만다. 이 불편한 주저를 보는 순간, 만화란 역시 움직이지 않을 때 더욱더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그럼에도 그로버의 이런 실험들은 무의미하지 않다. <Deeply Dave>의 움직임들이 만화를 더 활기차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은 인물에게 연계하기보다는 주변의 효과를 더욱 강조하는 것들, 이를테면 반짝이는 배경, 흩날리는 연기, 떠오르는 물방울 등이 그러하다. 그로버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움직임의 ‘중간지점’을 상상하는 것은 여전히 흥미로운 일이다.
조슈아 바크먼 <Spores>
한국에서 조슈아 바크먼은 그의 만화보다는 잘려 나간 만화의 칸들(소위 ‘짤’들)로 더 유명할 듯 하다. 리얼하게 묘사된 새의 작화와 그에 반하는 신랄한 대사들의 향연을 그린 그의 전작 <False Knees>는 이미 한국에서 수많은 커뮤니티에서 이모티콘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전체를 보진 못했어도 그의 만화를 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의 신작 <Spores> 역시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우주로부터 떨어진 운석으로부터 자라난 의문의 식물, 그것을 먹은 동물들이 갑자기 말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상당히 깊은 서스펜스를 줄 것 같은 설정이지만 바크먼은 당당하게 우리의 기대를 비껴 나간다. 그가 기반으로 삼는 SF적인 상상력은 외계인의 침공 따위로 쉽게 연결되지 않고, 오히려 말하는 동물들의 신랄한 세계 비판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공격권에 대해 말하고,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끝없이 조잘거린다. 서사의 연결성을 보이고 있을 뿐 본질은 전작인 <False Knees>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셈이다. 코믹 스트립을 연상시키는 작풍 또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전작에서 디테일한 컬러 작화를 보인 바크먼은 <Spores>에서는 작화의 힘을 아낀다. 큰 틀에서 흑백으로만 만들어진 이 작품은 외계의 식물만을 붉은색으로 칠해놓는데, 이러한 컬러 배치가 숲속에서 벌어지는 이변을 훨씬 설득력 있게 만들어 낸다.
레이첼 스마이스 <로어 올림푸스>
그리스·로마 신화를 현대식으로 각색한 <로어 올림푸스>는 canvas의 도전 만화로 시작해 금세 webtoon.com의 주요 연재만화로 부상했다. 국내에서도 번역으로 서비스되는 이 작품은 이미 전 세계 누적 조회수 13억이라는 상당한 수치를 보유한 인기작이다.
<로어 올림푸스>의 인기는 아마도 그 원형성에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옥의 왕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의 만남을 중심 줄기로 잡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특징으로는 올림푸스는 뉴욕을 연상시키는 마천루의 현대적 대도시로, 지상은 기원전 그리스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려 서로를 대비시킨다는 점이다. 지상에서 농업의 신이자 어머니인 데메테르와 함께 살던 봄의 신 페르세포네는 대도시 올림푸스로 유학을 와 로열패밀리의 멤버인 하데스와 마주치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다.
정리하자면 <로어 올림푸스>는 지방에서 올라온 소녀와 도시의 상류층 남성이 연애하는 미국식 멜로 드라마의 전형적인 세팅으로 시작하는 셈이다. 스마이스는 이 두 가지 원형=멜로 드라마와 신화를 유려하게 접합시켜 이음새를 보이지 않게 세공해 버린다. 때문에 <로어 올림푸스>는 우리가 다아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처럼 보인다. 또한 스마이스는 도시적 원형과 신화적 원형이 근본적으로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이러한 친숙함에 힘입어 <로어 올림푸스>는 Best Webcomic 부문에서 2년 연속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레이첼 스마이스는 결국 원형적 서사라는 것이 여전히 소구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는 중이다.
* 2023 아이즈너상의 아시아 만화와 웹 코믹들 - Best U.S. Edition of International Material - Asia
* 2023 아이즈너상의 아시아 만화와 웹 코믹들 - Best Webcom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