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맥클라우드는 『만화의 이해』에서 창작의 6단계를 제시합니다. ‘발상/목적(충동, 사상, 감정, 철학, 작품의 목적 등 작품의 내용)’, ‘형식(작품이 취하는 양식), 작풍(예술의 유파, 스타일의 어휘와 표현방식, 소재, 작품이 속하는 장르)’, ‘구조(모든 것을 합치고 빼면서 어떻게 배열하고 구성할지에 대한 기술)’, ‘기술(만화를 만드는데 필요한 여러 기술과 실제적인 지식, 문제해결 방법)’, ‘겉모습(상품 가치, 겉모양)’의 여섯 가지는 창작을 하려는 모든 이들이 고민하게 되는 과정들입니다. 만화가를 꿈꾸는 이들은 대부분 완성된 작품의 겉모습에 현혹되어 만화를 만들려고 하죠. 그에 비해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만들고 싶은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화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겉모습에 매혹된 이들의 만화를 만드는 접근법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만화를 표현수단으로 선택한 이들은 만화 창작의 접근 방식에 있어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발상/목적에서부터 시작했거나 겉모습에 매료되었든 간에 만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결국 여섯 가지의 창작의 단계를 모두 거쳐 가기 때문이죠.
모든 작가는 창작의 동기를 고민한다
만화 만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스콧 맥클라우드가 말하는 창작할 때 겪는 6가지 고민을 하게 될 겁니다. 이 고민 속에서 “내가 이것을 왜 하고 있지?”, “왜 하려고 했지?”와 같은 물음이 제기됩니다. 왜 만화를 그리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 즉 창작의 동기를 고민하게 되죠. 개인마다 이 질문의 답이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만화를 만드는 게 즐거워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잘하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독자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등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어요. 이렇게 각자의 답을 듣다 보면 서로가 말하는 창작의 동기가 다른 것 같지만 보다 넓고 근원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공통으로 묶을 수 있는 요인이 발견됩니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만족만이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만족감을 주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어 하죠. 기왕이면 내 작품이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바랍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작품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하고요. 이러한 목적들을 모두 실현할 수 있으려면 작품이 재미있어야 합니다.
창작자들이라면 누구나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재미있는 만화란 무엇일까요? 주관적으로 느끼는 재미는 모두 파편화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재미있다고 인정받는 작품들도 더러 있습니다. 누군가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반전이 있는 작품을 재미있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웃음을 줘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진실에 다가가게 만들어 눈물이 핑 돌 정도의 감동과 깨달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웹툰 연재 형식의 반전을 꾀한 《며느라기》의 시도
일반적인 만화 창작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가들은 우리에게 형식 면에서의 반전을 선사합니다. 올 컬러로 채색하고 세로스크롤 연출로 만들어 연재되는 방식이 일반적인 웹툰의 형식이라면 수신지 작가님의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플랫폼을 통해 연재되지 않고 자신이 설립한 독립출판사(귤프레스)에서 단행본으로 발간하고 있지요. 귤프레스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샵에서 책과 굿즈를 판매하거나 언리미티드에디션처럼 독립출판 부스를 통해 독자와 만나기도 합니다. 수신지 작가님의 이러한 행보는 《며느라기》에서 돋보였습니다. 지금은 카카오웹툰과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며느라기》를 볼 수 있지만 2017년에 처음 등장한 《며느라기》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재되었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수신지 작가가 아니라 《며느라기》의 주인공 민사린이 주인인 것처럼 개설하여 작품의 현실성을 배가시켰습니다. 웹에서 만화를 연재하려면 플랫폼을 통하는 것이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이죠. 개인 SNS를 통해 만화를 공개하는 것은 손쉽게 보이지만 작품을 홍보하는 것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팬덤을 관리하는 것, 일단 생긴 팬덤을 유지시키기 위한 굿즈 등을 지속적으로 제작하고 홍보하는 것, 작품을 끊임없이 만드는 것 등이 모두 작가의 몫이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플랫폼 연재보다도 육체적, 정신적 품이 많이 드는 일이죠. 그래서 이러한 시도는 더 의미가 있습니다. 작가 혼자 작품을 만들어 독자와 만나고 싶지만 좀처럼 용기를 갖기 힘든 다른 작가들에게 길을 열어 준 셈이니까요.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며 저절로 생긴 넓은 길, 완만하게 경사를 만들고 오르내리기 편하게 마련된 길을 마다하고 구태여 나무가 무성히 우거져 스스로 가지를 쳐내지 않으면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곳에서 좁지만 길을 만들어 냈습니다. 웹에서 만화를 연재하고 만화가로서 생업을 유지하는 일을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동시대인의 이상한 감정을 공명하게 만든 《며느라기》
수신지 작가는 여자들이 결혼 후 겪는 일상적인 사건과 복잡한 감정을 《며느라기》의 민사린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며느라기》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연재된 덕분에 만화를 읽기 위해 플랫폼에 방문하지 않는 독자들까지도 일상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고 《며느라기》는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수많은 며느리들이 겪은 복잡한 감정은 푸념처럼 여겨져서 해결하려 노력할만한 의제로 여겨지지 않았죠. 그러나 《며느라기》는 오랜 기간동안 공공연하게 외면되어 온 결혼한 여자들의 이상한 일상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바라 보게 했습니다. 수많은 여자들을 대변하는 민사린의 경험으로 변화해야 할 필요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만들었죠.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상황이 아니면 미처 지각하지 못하고 놓치게 되어버리는 것들을 깨닫게 했습니다.
동시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웃음을 준 《마음의 소리》
웃음을 주는 웹툰의 대표 주자인 조석 작가의 《마음의 소리》는 2006년부터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래로 2020년까지 장기간 연재하며 네이버웹툰의 간판 역할을 해왔습니다. 《마음의 소리》처럼 일상을 기반으로 한 개그 장르는 2000년대 우리나라 웹툰계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마추어들의 놀이의 장(場)이 된 웹에서 자신의 일상을 소재로 한 짧은 만화들이 개인 홈페이지와 게시판에 자율적으로 연재되었지요. 허구의 세계관을 만들어 상상의 이야기,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겪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더욱 친근하고 공감이 가는 내용으로 독자들과 소통했습니다.
《마음의 소리》도 조석 작가가 본인의 경험들을 위주로 만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더욱이 2000년대에는 작품을 읽은 뒤 댓글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또 다른 재미 요인 중 하나였기에 작가와 작품에 대해 독자가 갖는 친밀도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었죠. 웹에 만화를 그려 올리거나 읽는 사람들 모두 비슷한 처지를 공유하고 스스로를 ‘잉여’로 지칭하며 자조(自嘲)했습니다. 스스로 웃음거리가 될 것을 자처하고 그것을 본 독자들이 비난하거나 혀를 차지 않고 낄낄거릴 수 있던 것은 우리가 모두 이 시대에 함께 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떄문입니다. 《마음의 소리》는 그런 분위기에 기꺼이 작가 자신을 헌신하여 공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죠.
일상을 소재로 한 개그 장르는 작가가 경험한 일상과 상상을 덧댄 작품을 통해 독자들도 새롭게 일상을 감각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것 없는 삶을 즐겁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을 선사하는 것만으로 독자들은 잠시나마 삶의 힘듬을 견뎌 나갑니다. 공감을 통해 삶의 작은 희망을 갖게 만든다는 것,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독자의 삶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분명합니다.
본래의 코믹, 개그 장르는 웃음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비하할 수 있는 위험이 있어서 그 가치가 폄하되어 왔습니다. 웃기려는 목적이 강할수록 나타나는 상대방을 향한 비하의 손가락질은 누군가에게 웃음이 아니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힐 수 있죠. 만 14년을 연재하는 동안 조석 작가가 《마음의 소리》를 통해 보인 감흥은 웃음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남을 웃기려고 그렸고 그래서 웃으면 모두 행복하지만 웃기지 못하면 누군가를 화나게 할 수도 있단 걸요”. 그가 《마음의 소리》 마지막화를 통해 밝혔듯 더 이상 공감의 웃음을 줄 수 없는 만화는 완결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받아들입니다. 한 시대, 그 시대를 산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해 그만 그리기로 결정한 조석 작가는 최근 《너는 그냥 개그만화나 그려라》(1)라는 제목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즌 1이 젊은 조석 작가와 젊은 독자들의 전유이자 대표하는 개그의 감각을 전해주었다면, 최근작은 나이가 든 조석 작가의 여유로운 일상을 통해 우리의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20여 년 전과는 변했지만 여전히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고 언제든 웃음으로 공명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줬습니다.
《도토리 문화센터》의 동시대를 사는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
《도토리 문화센터》의 주인공 고두리 부장은 성공을 위해 앞만 보며 달려왔습니다. 밤낮없이 일에만 매달리던 고두리 부장은 도토리 문화센터를 폐쇄하라는 회사의 명령을 받아 난생처음 취미활동을 하게 됩니다. 도토리문화센터에는 문맹, 경제적 부자유, 차별 속에 시달리며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으로 살지 못한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만화의 트렌드를 따르다 보면 독자의 타깃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젊지 않은 연령대의 여성의 삶은 좀처럼 조명되지 못합니다. 특히 일상을 다루는 작품에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제각각 다른 성격의 캐릭터들이 왜 도토리 문화센터를 소중하게 여기는지, 한 사람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해하고 공감하고 공명하게 합니다. 자칫하면 할머니, 유부녀, 커리어우먼 등의 이름에 갇혀 보이지 않을 개인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전달하여 동시대를 살면서도 잘 알지 못해 타자화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입니다. 《도토리 문화센터》를 본 독자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겠죠? 나를 혼내기만 했던 엄마, 고집쟁이 할머니, 자신을 계속 낮추던 옆집 아주머니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고 사연이 있다고요.
짙은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더 복서》
《더 복서》의 주인공 유는 절망 속에 갇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다른 삶이 무엇인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유의 세상은 쟂빛이었죠. 그때 스스로 빛을 발하는 희망과도 같은 J가 나타납니다. J는 유에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너를 위해 빛나고 있는 것”이고 “언젠가 강해져서 만나자”고 말하고는 사라집니다. 언제 삶을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유는 잠깐 스친 J의 말을 믿고 그를 만나기 위해 살아갑니다. 언젠가 강해져서 만나자는 J의 말은 유의 삶의 목적이었고 다행히도 유는 너무 강했습니다. 유는 복싱의 전 체급의 타이틀 매치에 임하면서 여러 상대와 대적합니다. 《더 복서》의 긴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인데 매번 달라지는 상대들의 인생 이야기가 옴니버스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유와 상대 복서들 모두 사각의 링에 오르기까지 어두운 터널 속에서 보장할 수 없는 빛은 믿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천재 복서 유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죠.
거듭되는 챔피언 타이틀 매치를 이어가며 유는 본래의 목적을 잃은 듯해 보입니다. 원래는 어둠 속에서 스친 빛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강해지려고 복싱을 해왔다면, 타이틀 매치가 이어지자 ‘강함’과 ‘승리’에 도취 되죠. 반복되며 잃은 것은 빛에 대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강해지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고, 미움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유의 인생은 여전히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드디어 유는 마지막 타이틀 매치에서 J를 만납니다. 유가 삶의 희망을 잃은 채 휘두르는 주먹에 속수무책으로 맞으면서도 J는 유를 향해 따뜻하게 미소지을 뿐입니다. 어차피 희망이란 없는 인생이었는데 왜 희망을 줘서 살게 했느냐며 원망을 쏟아내던 유는 J의 한 마디에 원망과 미움을 걷어냅니다.
유의 원망과 미움의 대상은 J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의 삶을 절망으로 만든 사회와 가족일 겁니다. 아니면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 모른채 그런 운명으로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괴로웠던 것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시련과 고통을 나에게 주었는지 미움을 쏟아낼 대상이 없기에 유는 희망을 보여주려 했던 J를 탓했습니다. J와의 타이틀 매치 후 유는 평범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과거의 고통이 사라질 리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갖고 삽니다. 살다 보면 기쁘고 행복한 일도, 힘든 일도 동전의 양면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도 살아야 이런 감각을 느끼고 선택할 수 있으니 유는 살아갑니다. 《더 복서》를 읽으면 상상 못 할 고통 속에서도 J를 만나 약속되지 않은 희망의 빛을 믿고 살아낸 유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낍니다. 유와 같은 경험을 한 적 없어도 그의 최종 선택을 보고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지요.
창작의 동기를 하나로 모으는 ‘동시대성’을 갖춘 작품들
《며느라기》, 《마음의 소리》, 《도토리 문화센터》, 《더 복서》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작품 별로 우리에게 주는 감흥이 다르고 작가의 창작의 동기는 각각 다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스콧 맥클라우드가 말하는 만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게 되는 창작의 여섯 단계를 고루 고민한 결과, 탄생한 만화입니다.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작가 특유의 작풍을 각자가 추구하는 형식으로 열매의 씨앗과도 같은 발상/목적을 보기 좋은 겉모습을 갖추어 전달합니다. 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잘 파악할 수 있던 것은 만화를 만드는데 필요한 기술과 구조에 대한 기능까지 꿰뚫고 만들었기 때문이겠죠. 또 공통적으로 이 만화들은 ‘동시대성’을 갖고 있습니다.
국어 사전에 의하면 동시대성은 “주로 예술 작품을 평가할 때 현재의 사회가 나타내는 특유한 성격이나 성질을 반영하는 특성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끼리 동시대의 트렌드, 현상, 문제점 등을 공유할 수 있겠죠. 국어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눈에 띄는 현상과 문제, 트렌드를 반영했다면 동시대적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며느라기》, 《마음의 소리》, 《도토리 문화센터》, 《더 복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만화 스스로를 지탱하게 만드는 동시대성의 힘
현상이나 문제, 트렌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 어떤 해결책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선행되어야만 동시대성을 견지한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저서 『장치란 무엇인가』에서 “동시대성이란 거리를 두면서도 들러붙음으로써 자신의 시대와 맺는 독특한 관계(2)”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대인에 대해서는 “현재의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도달하여 애쓰지만 그럴 수 없는 이 빛을 지각하는 것. (...)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시대의 어둠에 시선을 고정할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하지만 우리에게서 무한히 멀어지는 빛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펑크낼 수밖에 없는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더 복서》의 유, 《도토리 문화센터》의 여러 여성 주인공들, 《며느라기》의 민사린, 《마음의 소리》의 조석은 우리에게 저마다의 감성으로 “펑크낼 수밖에 없는 약속 시간”이란 희망을 전했습니다. 소외되어 주목받지 못한 이들에게 당신들도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고 일깨워 줍니다. 작가는 이를 의도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재미있는 만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먹고 살아야 하니 만화를 그린 것일 수 있습니다. 목적이 어쨌든 이들의 만화는 아감벤이 말하는 ‘동시대성’을 갖고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예술이 해 온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인간의 다양성을 피하지 않고 즐겁고 유쾌하고 안타깝고 기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리(3)”라는 마사 누스바움의 말처럼, 동시대성을 갖춘 만화는 동시대인들의 삶을 지탱하게 만들고 이렇게 생긴 힘으로 인해 만화 스스로 지속될 수 있고 지탱할 힘을 얻는 것이죠.
이렇게 논의를 이어가다 보면 파편화된 각자의 창작의 동기가 하나로 통일됩니다. 시대를 조망하며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시도하는 작가의 용기는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도 삶의 용기를 심어준다는 것. 이로 인해 만화는 오랫동안 진실된 삶의 의미를 전달하고 긴 생명력을 지속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1) 2023.11.14.《마음의 소리 2》로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2) 조르조 아감벤·양창렬(2010), 『장치란 무엇인가』, 난장.
(3) 마사 누스바움, 임현경 옮김(2020), 『타인에 대한 연민』, R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