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그리는 선, 한국 시사만화 100년사
1. 시사만화는 역동적이고 독특한 창작의 공간이자 영역
시사만화의 마감 분위기는 직접 겪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초조한 긴장과 두근거리는 흥분의 연속이다. 마감 직전까지 지금 다루고 있는 사건이나 주제가 혹시나 바뀔지 걱정하면서도 펜을 잡고 선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단 몇 컷 또는 네 칸에 복잡한 사회 현상을 날카롭고 명료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몰린다. 정치인의 특징을 과장할지, 풍자를 더 세게 할지, 혹은 우회적으로 표현할지 마지막 순간까지 선택은 끊임없이 번복된다. 시사만화는 그렇게 치열한 아이디어와 시간의 싸움 속에서 팽팽한 긴장과 쫄깃한 감정이 교차하는, 역동적이고 독특한 창작의 공간이다. 한 마디로 시사만화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사건이나 인물, 현상을 풍자와 해학, 비판적인 시각으로 표현한 만화를 의미한다.
2. 시사만화의 지난 100년사
1909년 6월 2일에 창간된 「대한민보」는 한국의 대표적 민족주의적 신문으로, 독립 정신과 계몽운동을 목적으로 창간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로 인해 결국 약 1년여 만에 폐간되었지만, 한국 근대언론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창간호에 하나의 삽화가 실리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 시사만화의 시작이자 한국만화의 역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대한민보」 이도영 작가의 창간호 삽화는 이 땅에 ‘만화’가 시작되는 역사적이자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전국 시사만화협회는 매년 6월 2일을 ‘시사만화의 날’로 공식 지정하고, 시사만화의 역사적 가치와 사회적인 의미를 널리 기리고자 매년 관련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116년이 지난 지금 한국 시사만화는 어떤 모습인가? 그리고 100년이 넘은 시사만화의 여정은 어떤 길이었는지 고찰해 보기로 한다.

사진 : 이도영 화백 작품
1) 시사만화의 시작
창간호에 실린 이도영(1884~1933)의 작품은 사실 만화라고 하기보다는 삽화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원래 이도영은 전통적 기법을 바탕으로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선보였던 화가였다. 그는 「대한민보」의 사장이었던 오세창(1864~1953)의 눈에 들어 신문 폐간 때까지 함께 약 348편의 작품을 게재했다. 오세창은 이미 「한성순보」 기자와 「한성도」 사장을 역임했고, 일본 망명 시절 익힌 일본 신문 시스템에도 익숙했다. 그는 이도영의 영입과 함께 외국의 만평기법을 도입해 당시 사회, 정시의 문제를 피하지 않고 당당하며 날카롭게 접근한다. 위태로웠던 대한제국 당시의 정치적 현실, 민족적 저항정신, 사회적 모순 등을 그의 작품 속에 날카롭게 표현했다. 더욱이 함축적인 풍자와 상징성을 오롯이 담아냈다는 점에서 후대에서도 높은 가치와 평가를 받는다.
2) 일제강점기의 시사만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한국 내 모든 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의 계기로 일제는 문화 정치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흐름에 1920년대 『동아일보』, 『조선일보』 같은 민족지가 창간된다. 초기에는 해외 만화 등으로 만화가 간간이 실렸지만 점차 신문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며 시사만화를 본격적으로 싣기 시작한다. 당시 시사만화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 정신을 담은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는 당시 민족운동이 활발했던 독자의 요구에 부응한 결과였다.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1931년의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 일제는 국내 신문사에 대해 어떠한 틈도 허용하지 않고 강력한 탄압을 시작한다. 이로 인해 시사만화는 대부분 사라지고, 대신 세태 풍자나 오락성이 강한 만화가 신문에 주로 실리게 된다. 해방 이후 여러 신문이 복간되고 창간하면서 시사만화는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시사만화는 예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정치적·이념적 갈등이 첨예 되면서 한국 시사만화의 위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턱없이 부족한 인쇄 시설이나 용지 수급 등 제작의 문제도 물론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사 만화가가 제대로 된 창작활동을 하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특히 6.25 전쟁 전후로 시사 만화가들의 납북과 월북 그리고 사망하는 등 시사만화는 기나긴 암흑기로 들어갔다.
3) 한국전쟁 이후와 군사정권의 시사만화
한국전쟁과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시사만화는 분단의 아픔과 이념 갈등, 정치적 억압을 날카롭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특히 1950~60년대의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과 안의섭의 『두꺼비』는 점차 시사성을 띠면서 독재정권과 사회의 부조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원래 『고바우 영감』이나 『두꺼비』는 시사만화가 아닌 오락 만화로 시작했으나 여러 정치 파동에 휩쓸리며 점차 시사만화의 성격으로 진화하게 된다.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1960~1980년대 유신체제와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정부의 탄압과 통제는 계속되었지만 시사만화는 억압적 정치 현실을 풍자하고 저항 의식을 표현하는 도구로 한층 성숙해졌다. 1960년대가 되면 거의 모든 신문에서 한 칸 만평과 네 칸 만화가 실렸지만, 모든 만화가 시사적이진 않았다. 신문사와 정권의 관계에 따라 내용이나 시사의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에 외부의 탄압을 포함해 시사 만화가들의 의식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과거에 비해 소재도 제한되고 표현 방식도 소극적인 모습도 보이는데, 탄압의 종류가 직·간접으로 다양해지고 작가들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다층적으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사만화는 신문 지면을 통해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의 한 축으로 기능했다. 이들의 만화는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드러내고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국민적 염원을 담아냈다.
4) 민주화 이후의 시사만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시사만화는 표현의 자유가 확대됨에 따라, 정치적 풍자와 더불어 경제, 사회, 문화적 주제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특히 이 시기 등장한 최민, 박순찬, 김용민 등의 작가는 더욱 자유로운 풍자와 해학적 표현으로 독자와 소통하며 시사만화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사 만화가들도 진보와 보수의 성향으로 나뉘게 되었고, 서로 다른 성향을 반영하는 시사만화 작가 단체가 이 시기 생겨났다. 시사만화가 탄압과 위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한국만화는 ‘웹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화려한 부활을 맞이했다. 그러나 시사만화는 처음 신문에 등장했을 때부터 위기와 침체 속에 있었고, 1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고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시사만화의 위기와 침체가 오히려 그 구성의 한 부분이라는 한 생각이 들 정도이다.
3. 시사만화의 현황
한국 시사만화는 최근 큰 위기를 겪고 있다. 물론 1909년 시사만화가 처음 이 땅에 내려앉은 이후부터 2025년 지금까지, 위기가 없었던 시기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위기는 기존의 위기와 침체의 수준부터 다르다. 어쩌면 ‘시사만화의 멸종’이라는 순간까지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한국시사만화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신문 산업의 쇠퇴와 연결 지어 해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과연 그것이 전부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종이 신문 산업의 쇠퇴
1996년 69.3%에 달했던 신문 가구 정기구독률은 불과 10여 년 만인 2008년에 36.8%에 그쳐 절반 가까이 줄었다. 2021년에는 구독료 지급 여부와 무관하게 종이신문을 정기구독한다는 응답이 8.4%로 급감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2022 언론 수용자 조사’)
1997년에는 중앙지와 지방지를 포함한 주요 일간지 24곳 모두에서 한 칸, 네 칸 시사만화를 연재했다. 하지만 같은 기준으로 봤을 때 2025년 현재 네 칸 만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급격한 종이 신문 산업의 쇠퇴는 시사만화의 위축과 축소에 직격탄이 된 것이다.
2) 다양하고 교묘해진 시사만화의 탄압
기존 시사만화 탄압은 권력자, 기득권 또는 정부부터 신문윤리위원회, 국가보안법, 계엄령 등의 공권력 중심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신문사 내부 또는 광고주, 신문 사주, 정치인 등으로 주체가 다양해졌고, 선거법 위반이나 명예훼손 등의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그 방식은 점점 더 교묘하고 은밀해졌다.
예를 들어 《한겨레》의 장봉군은 편집국이랑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고, 1997년 《세계일보》의 조민성은 신문사 측의 요구를 듣지 않아 영업부로 발령받았고 이를 거부하자 해고 조치를 당한다(박성서, 2023). 지방지의 사례로는 《부산일보》의 손문상이 반여권 기풍으로 편집국과의 마찰이 있었으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재를 그만두어야 했다(미디어오늘, 2007). 또한 《국제신문》의 서상균도 만평을 중단하고 다시 연재하는 등 작가가 느끼는 압박은 다양하고 교묘해졌다.
3) 정치적 양극화 뉴스의 연성화
최근 한국 정치는 이념적으로 좌우로 극렬하게 나누어져 있다. 이에 따라 신문사들도 정파적인 논조를 보이게 되었는데, 문제는 시사만화 작가가 이러한 신문사 논조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시사만화가 불필요하게 정쟁과 갈등의 중심에 놓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09년 용산 참사 당시 《조선일보》의 신경무와 《한겨레》의 장봉군은 같은 사안을 두고 양측의 독자들이 상대 만평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서울대학 신문, 2009). 이러한 소모적인 정쟁이나 갈등은 오히려 시사 만화가에게 많은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한다.
디지털 전환과 포털 중심의 뉴스 소비 환경 속에서 한국 신문은 연성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네이버 등 포털 메인에 노출되는 뉴스 중 상당수는 선정적이거나 흥미 위주의 연성 뉴스(soft news)로 채워지고 있다. 특히 주요 언론사들조차 타블로이드성, 즉 자극적이고 가벼운 뉴스를 대량 생산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한국기자협회, 2022). 또한 SNS의 발달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정치적 효능감과 참여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SNS를 통해 다양한 정치 정보를 쉽게 접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거나 타인과 토론할 수 있게 되면서, 과거 수동적이던 유권자들이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지난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을 계기로 SNS는 기존 전통적인 신문·방송 영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최영재, 2011).
4) 시사만화의 인식
시사만화는 제2의 사설이라 불릴 만큼 사회 비판, 풍자, 권력 감시의 기능을 수행해 온 저널리즘의 한 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시사만화의 입지는 많이 축소되었다. 2025년 현재 시사만화는 중앙지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시사만화의 쇠퇴 원인 중 가장 큰 요인은 신문 산업의 쇠퇴이다. 물론 그 안에는 시민들의 정치적 양극화와 무관심, 뉴스의 연성화와 SNS의 등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여전히 유효한 다양한 형태의 탄압과 신문사가 가진 시사만화의 인식과 비중 하락이 주된 원인이다. 이제 한국 시사만화는 새로운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4. 결론
현재 시사만화는 점차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졌고, 언론사 내부에서도 그 위상이 뚜렷하게 낮아졌다. 그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신문 산업 자체의 쇠퇴이다. 전통적으로 시사만화는 신문 지면에서 주요한 공간을 차지했으나, 디지털 미디어의 급성장과 뉴스 소비 방식의 변화는 신문 매체 전반의 약화를 초래했고, 이는 시사만화의 발행 기회 축소로 이어졌다. 과거처럼 신문이 여론을 형성하는 중심이 아니게 되면서, 시사만화도 그 기능과 파급력을 잃게 된 것이다.
여기에 정치적 양극화와 대중의 무관심이 겹치며 시사만화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한편으로는 특정 정치 성향에 대한 맹목적 지지나 반대로 극단적 비난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균형 있는 비판과 풍자를 시도하는 시사만화는 어느 쪽에서도 비난받기 쉬운 위험이 커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가 퍼지면서 아예 사회 문제에 대한 만화적 접근에 관심을 두지 않는 독자층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시사만화는 과거와 달리 정치적 의미와 사회적 관심을 동시에 잃어가는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뉴스의 연성화와 SNS 중심의 정보 유통 구조는 시사만화의 자리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짧고 자극적인 뉴스, 가볍고 유머 중심의 콘텐츠가 선호되는 시대에, 비판과 풍자의 메시지를 담아낸 시사만화는 그 전달 속도와 소비 방식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SNS에서는 이미지 기반 밈(meme), 짧은 영상, 한 컷 유머 등이 시사만화를 대체하면서, 깊이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만화는 관심을 받기 어려운 구조로 전환되었다.
여기에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교묘하고 간접적인 제약이 시사만화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했다. 과거에는 명백한 검열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법적 위협, 사회적 낙인, 자율 검열, 고소·고발 등 더 정교하고 은밀한 형태로 창작 활동이 제약되고 있다. 이에 따라 시사만화 작가들은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이는 시사만화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언론사 내부에서 시사만화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도 중요한 원인이다. 시사만화를 언론의 핵심 기능이 아닌 부차적인 콘텐츠로 치부하거나, 비판을 두려워해 편집국 차원에서 회피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시사만화는 점차 주요 지면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을 종합해 보면, 한국 시사만화의 쇠퇴는 단일한 문제가 아닌 다층적 위기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시사만화가 다시 그 사회적 기능과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양적 부활을 넘어, 표현의 자유 보장, 언론의 독립성 강화,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 플랫폼 개발, 젊은 창작자 육성,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장려하는 문화 형성 등 구조적 대응이 필요하다. 시사만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사회와 권력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라는 인식이 다시 자리 잡아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