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여름, 여행,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만화

나윤희 작가의 리우데자네이루 여행과 사람 이야기

2025-07-31 나윤희

7월이다.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여름이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계절이 절반 남짓밖에 남지 않은 채였다. 그럼에도 왜 올해는 이 계절을 떠나보내는 것이 이렇게 아쉽지 않은 것일까? 생각해 보니 내게는 이것이 올해 맞는 두 번째 여름이었다.

지난 3월, 나는 브라질과 코스타리카를 찾았다. 우리 대한민국의 땅을 지하로 뚫고 그대로 직선으로 통과시키면 닿는다는 그 먼 땅은 그때부터 한여름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경유차 들러야 하는 뉴욕까지, 15시간가량의 비행 동안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질리면 잠을 잤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 동안은 밀려드는 여러 가지 생각에 찌뿌둥한 몸을 맡겼다. 핸드폰이나 패드에 만화책을 넣어 왔으면 좋았을 뻔했다. 그렇다면 야마시타 카즈미 작가의 <불가사의한 소년>은 분명 무엇보다 훌륭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불가사의한 소년>은 말 그대로 불가사의한 능력을 갖춘 '어떤 존재'가 인간 세상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이다. 그 존재는 소년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청년이나 소녀로, 여성으로, 아주 어린 아이로,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소년'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무수히 많은 인간을 만난다. 그리고 기억을 조작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는 둥, 신비로운 권능을 발휘하며 인간들의 삶에 녹아든다.

한 번은 20세기 초의 유럽에서 어느 귀족 소녀의 몸종으로 변신해, 그녀가 부모를 여읜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참전 용사가 된 후 늙어가는 노년기까지 지켜본다. 혹은 현대의 일본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가장의 기억을 조작해, 그의 사춘기 아들이 되어 그 삶을 구경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소년이 만난 인간들의 삶을 보여주는 옴니버스식 단편 모음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면피하고자 하는 뉴욕의 유명 배우, 신에 대한 신앙만큼이나 인간의 존엄을 추종하던 인류 최초의 예술가, 파멸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뿌리를 알고자 하는 젊은 여성, 오랜 기간 이어오던 기다림으로 끝내 사랑을 쟁취하는 못난이 소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뺏어간 유년기 친구를 용서하게 되는 19세기의 어느 여류 작가.…

소년은 무수히 많은 인간을 만난다. 그의 감상을 빌자면 “인간은 추하고 잔혹”하지만, 소년은 자신의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마치 놀이를 하듯이, 그러나 가끔은 꼭 의무처럼.

<불가사의한 소년>은 작가인 야마시타 카즈미의 인문학적 소양과 따뜻한 감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수작이다. 소년의 시선에서 본 인간들의 삶은 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강한 여운을 안겨준다.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소년과 마찬가지로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든다. 물론 소년과 같이 시대를 넘나들며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할지언정(그것이 가능했다면, 나는 지금쯤 90년대 대만으로 타임워프를 해서 전성기 시절 금성무의 기억을 조작해 그의 아내가 되었을 것이다), 나라를 넘나드는 여행은 가능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다양한 문화권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몹시 즐거운 경험이다. 작년에는 멕시코의 가정집에 초대되어 신년이 밝자마자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향해 장총을 쏘는 것을 봤다. 튀르키예 페티예의 해산물 식당에서 만난 두 친구가 이끄는 대로 마을 전망대를 향했다가 어느 때보다도 근사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페루에서 만났던 한국인 여행자를 몇 주 후 콜롬비아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치는 믿지 못할 경험도 있었다. 이렇듯 여행을 통한 새로운 만남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제아무리 전지전능한 '소년'에게도 어느 정도는 공감대를 형성할 구석이 있는가 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잠을 자고, 남의 잘 만든 작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생각도 하고 나면 머잖아 비행기에서 내릴 시간이 가까워진다.




"이곳은 열기가 아주 뜨거워요!"

여행을 계획하고, 몇 주 전부터 예약해 뒀던 숙소의 집주인 아주머니가 체크인 전 보내주신 메시지의 말미였다. 숙박하는 동안 주의해야 할 것들을 보내주신 것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저것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더운 날씨인 것일까? 뉴욕을 경유하느라 아직 패딩을 입고 있던 나는 공항에 도착하기도 전에 절로 긴장이 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카니발 축제가 열린다고 정평이 나 있는 3월의 리우데자네이루 아닌가. 이곳 사람들의 열정의 한 자락은 분명 뜨겁게 내리쬐는 날씨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좁은 구석 바닥에서 짐짝을 열어젖히고 입고 있던 패딩과 겉옷을 욱여넣은 후, 내의로 받쳐입은 민소매 티로 환복(?)했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가는 도중에도 창문 밖으로 작열하는 태양 빛이 비로소 내가 이역만리 타지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것 같은 기사님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지레 "코레아나!" 라고 외치자, 곧바로 호탕한 웃음과 함께 포르투갈어가 난사되듯 쏟아져 나왔다. 손짓발짓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가 잠시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코파카바나 해변이 그림같이 이어져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면한 작은 아파트였다.

집주인인 미리암 아주머니와 작은 장모 치와와 루나는 아주 친절하게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여성 전용 게스트룸으로, 미리암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안의 작은 방을 빌려 쓰는 형태였다.

미리암의 배려에 힘입어 먼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살 것 같았다. 뉴욕을 거쳐, 이틀 가까이 씻지 못해 행색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씻고 나와서 짐을 풀고 있자니, 도착했냐는 안부 문자가 와 있었다. 지난 만남으로부터 벌써 반년. 리우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던 친구, 세드릭이었다.




"저는 사회 경험도 별로 해보지 않았고 겪어본 일도 많지 않아요. 경험이 없으면 좋은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재능이 없는 겁니다."

<메종일각>, <시끌별 녀석들>, <란마 1/2>, <이누야샤> 등등 내로라하는 작품들을 집필해 오신 일본의 전설적인 만화가, 다카하시 루미코 선생님의 발언이다. 선생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어쩌면 진짜로 그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재능이 없는 편인 것이다.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몰랐던 것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을 만남으로써 나의 작품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내 나이 20대 초에 그렸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혼자 있다가도 비명을 지르게 되곤 한다. 다카하시 선생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보면 필시 이해하지 못하거나 범인 정도로 여기실 것이 자명하지만, 그것이 사실인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반짝이는 상상력이 모자란 만큼, 경험으로 나를 채워야 하는 종류의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여행을 다녔고 그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세드릭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작년 2월의 칠레,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마을의 한 카페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던 나에게 세드릭이 말을 걸면서 우리는 번호를 교환했다. "오늘 저녁에 혹시 시간 되면 같이 밥이나 먹자." 능청스럽게 말하곤 사라지던 세드릭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가량 후였다. 아타카마 지역의 명물인 달의 계곡 일일여행을 위해 올라탔던 여행사 버스의 한 좌석에 그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만나 연락처를 교환했던 낯선 프랑스 남자를 하필 거기서 또 만나다니. 나는 놀라서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리면서 맨눈으로 세드릭을 빤히 쳐다봤다. 세드릭도 그런 나를 알아보고 무척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그날 우리는 달의 계곡을 함께 둘러보고, 당연히 저녁에는 밥도 같이 먹었으며 그걸로도 모자라 그 후 나흘간 함께 아타카마 곳곳을 여행했다. 세드릭이 다음 여행지로 떠나기 전까지. 세드릭은 변호사였고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현재 다자 연애(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명과 연애 관계를 맺는 형태의 연애 방식) 중이었는데, 무려 2명의 남자친구가 있는 상태라고 했다.

그런 세드릭에게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계절별로 보이는 별자리가 다른 이유는 지구의 자전 때문이라는 것(별 보기 투어 도중, 이것을 가지고 나와 한참을 논쟁했는데 결국 세드릭 말이 맞았다. "오케이, 갈릴레오"라고 볼멘소리를 하며 내가 백기를 들자 세드릭은 웃었다). 프랑스에서는 메시지 ‘읽씹(읽고 씹기)’이 예의인지 아닌지를 자주 논쟁한다는 것. 올리브유를 쓴 요리와 버터를 쓴 요리의 차이가 뭔지, 파가니즘이 뭔지, 낯선 나라의 낯선 음식의 맛을 알고 싶다면 빼지 말고 일단 입에 집어넣어 봐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콜롬비아산 말린 왕개미의 맛이 어떻다는 것…. 세드릭은 언제나 내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와의 대화는 항상 즐겁다. 그래서인지, 아타카마에서 헤어진 이후에도 몇 번이나 더 우리는 지구를 가로지르는 길에 서로를 만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타카마에서 헤어진 지 몇 주 안 되어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그리고 그 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그다음에는 서울과 속초, 또 이번에는 브라질의 리우에서.

더욱 기쁘게도, 세드릭의 남자친구인 로맹도 리우에 함께였다. 로맹과는 메데인에서 처음 만나, 파리와 한국에서도 본 적이 있다. 세드릭과 로맹은 나보다 이틀 앞서 리우에 도착해 머물고 있었다. 세드릭은 내가 리우 숙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바로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지난가을 한국 여행을 온 세드릭을 배웅하고 난 후, 거의 5개월 만의 재회였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연재되었던 일본의 청춘 음악 만화, <언덕길의 아폴론>이라는 작품이 있다. 60년대 중반의 일본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재즈 협연을 통해 서로 가까워지는 두 소년과 한 소녀의 성장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어쩐지 여름 이맘때면 항상 어김없이, 이 잘 만들어진 청춘 만화가 떠오르곤 한다.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작품 특유의 청량한 여름을 잘 표현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막 피어나는 세 청춘이 꼭 이 계절과 닮아 있어서이다. (덧붙이자면, 그 유명한 "뭘 기대했어? 사랑한다는 말?"이라는 대사가 바로 이 작품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주인공 '카오루'는 도시에서 나가사키현으로 전학을 온다. 그는 예민하고 성마른 기질의 소유자인데, 수준급의 클래식 피아노 실력을 갖추고 있다. 반면 카오루와 동급생인 '센타로'는 드럼 연주가로, 재즈에 푹 빠져 있는 소년이다. 거칠고 불량해 보이는 센타로와 모범생인 카오루는 서로의 음악 취향을 멸시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함께 세션을 이루어 협연을 시작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물과 기름과도 같던 두 소년이 음악을 통해 가까워지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겉으로는 음악 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는 그보다 많은 함의가 담겨 있다. 자칫 완벽해 보이는 모범생 카오루는 사실 복잡한 가정사와 내면의 불안을 가진 뭇 10대 청소년들의 자화상과도 같은 존재이다. 센타로는 전후 당시, 주일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인종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사실 그가 재즈라는 미국의 음악 장르에 빠지게 된 것 역시 혼혈아로서의 정체감 분열을 나타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센타로가 동경하는 동네 형 쥰이치는 60년대 일본의 학생운동에 투신하지만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폐인이 되기도 한다. 쥰이치를 짝사랑하는 유리카는 자주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성장 서사를 써나가고, 오래도록 센타로를 좋아했던 리츠코는 어린 시절의 연심을 떠나보내며 어른이 된다. 이렇듯 <언덕길의 아폴론>은 당시의 사회상을 투영해 보여주는 동시에, 다양한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며 서로의 삶을 바꾸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애니메이션으로 재차 제작된 <언덕길의 아폴론> 오프닝 수록곡 중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어떡하지? 너를 만나기 전의 나 자신이 기억나지 않아." 그것은 어쩌면 센타로를 만나 영영 변해버린 카오루가, 혹은 카오루를 알게 돼 예전과는 달라진 센타로가 하는 말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들과 같은 경험이 있을 테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아니더라도, 은근한 파도에 조금씩 찬찬히 깎이는 바위 같은. 그런 작은 파도와 같은 만남은 우리 모두의 일상 그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꼭 대단히 사랑하거나 증오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모르던 것을 알게 해주는 사람, 오래도록 가는 기억을 한 자락이라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예외 없이 그 파도의 한 획을 맡고 있는 것이리라.

세드릭과 로맹도 나에게는 그 파도인 셈이다.




오후 5시부터 시작하는 블로코(Bloco, 브라질 카니발의 거리 행진 행사)를 보기 위해 우리는 이파나마 해변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버 택시 대신에 오토바이를 불러 타니 15분 만에 약속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드릭을 기다리는 동안, 슬슬 노란빛을 띠기 시작하는 햇볕을 맞으며 해변가를 따라 걷다 보니 튀튀를 입거나 천사 날개를 단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다. 그 밖에 동물 귀를 달거나 가면을 쓴 사람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옷을 입은 사람들(서브스턴스의 수(Sue)복장을 한 사람도 있었다).… 블로코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모두 뺨과 콧잔등, 어깨부터 가슴, 팔뚝까지 글리터를 바르고 있었다. 숙소의 집주인 미리암이 숙박 시 주의 사항을 보내준 내용 중에, 침구가 더러워질 수 있으니 글리터를 바르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막연히 펄이 들어간 색조 화장을 하지 말라는 뜻인 줄로만 알고, 특이한 요청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블로코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미리암이 말한 뜻을 알게 된 것이었다. 특히 피부색이 어두운 여자들은 햇빛 아래에서 움직일 때마다 얼굴과 목이 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더욱 잘 보였다. 마치 요정 같았다. 아름다웠지만 분명 미리암도, 미리암의 침구들도 질색할 터였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사람들을 구경하며 갓길에서 세드릭과 로맹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거의 다 왔다는 메시지와 함께 먼 발치에서 세드릭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세드릭도 나를 발견하고는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그 길 한복판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세드릭, 로맹은 길거리에 있는 분장 무리처럼 얼굴에 글리터를 붙이고 딱 달라붙는 브라질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블로코에 온 사람들이었다. 반면 나는 하늘색 크롭 티에 검은 슬랙스를 입고 있었는데, 무슨 사무실에 출근했냐며 세드릭이 놀려댔다. 내 딴엔 나름대로 요란하게 차려입은 것이었는데, 카니발에서는 너무 얌전한 복장이었나 보다.

간단하게 그간의 근황을 묻고 우리는 행사가 시작하는 곳을 찾아 이동하기로 했다.

음악 소리를 쫓아가자, 엄청난 인파가 보였다. 거기서부터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퍼레이드 행렬에 맞춰서 이동하는 사람들이 거리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덥고 습하고 붐비는 데다가 시끄럽기까지 하다니, 평소의 나라면 혼자서는 절대 참여하지 않을 것 같은 행사였다(필자 주변의 많은 관계자들이 절대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필자는 평소 몹시 내향적인 성격이다). 행렬하는 동안에는 여러 사람들과 잠시 스쳐 지나가듯 대화하거나 눈빛으로 인사를 교환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행렬 중에 동양인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참고로 블로코에는 총 사흘 동안 참여했는데, 이날을 통틀어 동양인을 나 빼고 딱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것도 이 때문인 듯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사람들에 치이다시피 하며 연필꽂이에 꽂힌 연필처럼 옴짝달싹 못 하는 채로 조금씩 이동해야 했는데, 그 와중에도 음료수 가판대를 모는 상인들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종횡무진했다. 누가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이 정도면 브라질인들의 근성이 한 수 위였다.

그 덥고 찜찜한 환경에서도 사랑은 싹텄다. 그 와중에도 음악과 행렬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거나 키스하는 등, 키싱구라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특히 분홍색 튀튀를 입은 남자가 길 한복판을 떡 가로막은 채 어느 여자와 열정적으로 키스를 하고 있길래, 세드릭에게 슬쩍 눈치를 보냈다. 세드릭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자기 눈에는 그가 이성애자로 보인다고 했다. 튀튀를 입었는데? 내가 반문하자, 세드릭은 긴말 없이 자기는 안다고 피상적인 말로 맞받아칠 뿐이었다. 이건 우리의 초능력 같은 거야, 세드릭이 씩 웃었다.

카니발 시즌의 길거리에서는 눈이 마주치고 서로 뜻만 맞으면 아무리 처음 보는 사이여도 흔쾌히 입을 맞추곤 했다. 튀튀 입은 남자를 포함해 몇몇 키스하는 커플을 볼 때마다 자연히 커플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완전히 초면인 사이일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의 문화 같은 것이었다.

나에게도 몇 명인가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왔다. 어디서 왔냐고 가볍게 말을 거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름을 물어보기도 했다. 몇몇은 끈질길 정도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려 하곤 했다. 수상할 정도로 친절하다 싶을 뿐 설마 그런 의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세드릭은 그 사람들이 나와 키스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교의 나라에서 온지라 속절없이 화들짝 놀란 나에게 세드릭은 태연히 덧붙였다. 자신과 로맹은 리우에 도착한 첫날부터 퀴어 블로코에 가서 모르는 사람이랑 키스했고, 심지어는 그 횟수를 세며 내기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까지는 2대 1로 로맹이 세드릭을 앞서고 있다고 했다. 나에게도 내기에 참여하겠냐고 묻는 것은 덤이었다. 그렇다면 오케이, 평등한 조건에서 겨루기 위해서 퀴어 블로코에 갔을 때부터 겨루자고 호기롭게 맞받아쳤다. 세드릭과 로맹은 남자들과, 나는 여자들과 하는 키스로만 셈을 하는 게 더 공평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세드릭과 나의 우정이 한층 더 깊어졌다는 사실만 밝히겠다. 


세드릭과 로맹은 항상 내가 모르던 것을 알려주곤 한다. 혼자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 가지 않았을 장소, 먹지 않았을 음식, 알지 못했을 것들을 접하는 것은 간혹 고되고 피곤하지만 즐거운 일이다. 그게 즐겁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올해 리우에서의 기억은 내 안에 아주 오래도록 남을 것이 분명하다. 올해 리우와 코스타리카를 여행하는 내내 발랐던 핸드크림의 냄새를 맡을 때면 한동안 다시 리우로 돌아간 것 같은 향수를 느낄 것이다. 리우에서 본 쾌청한 하늘과 햇볕을 떠올리면 자연히 길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던 사람들의 표정이 생각날 것이고, 숙소에서 해변으로 향하던 길목까지도 고스란히 기억날 것이다. 소박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그 행복감이 나를 또다시 여행길로 이끌 것만 같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아주 느리지만 분명하게, 나는 또다시 예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갈 터였다.

필진이미지

나윤희

만화가. 2014년 데뷔하여 <눈먼 정원>, <지금 이순간 마법처럼>, <고래별>, <손 안의 안단테>, <궤도의 아이들>(스토리 및 콘티) 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