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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피스의 제주 여행 가이드

<포피스2> 윤재안 작가, 제주 여행 속에서 창작과 휴식, 여행의 의미를 풀어내다

2025-07-31 윤재안

포피스의 제주 여행 가이드

여행의 의미

어떤 방송에서였던가, 여행은 행복보다는 쾌락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괜한 반발심이 생겨, ‘흥, 무슨 소리. 여행이 주는 행복감보다 더 큰 게 있단 말인가?’ 같은 생각을 했지만, 최근 도파민 중독이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떠올리면서, ‘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불행과 연관 지어 여기는 내 자신을 보며 그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쾌락이라면 뭐, 어떤가. 귀국하는 공항에서 언제 갈지도 모르는 다음 여행지를 계획하며, 그날만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게 해주는 동기부여만큼 강력한 것도 없지 않나.

23~4살부터 지금까지 쉼없이 달려온 나를 지탱해 준 여러 동력 중 하나는 항상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다. 현실에 묶인 일과 인간관계를 잠시 멈추고, 한적한 곳에서 일 년에 한두 달씩 살고 싶다는 마음. 물론 실제로 실행하기는 어려운 현실이지만, 마음만큼은 늘 그랬다. 매번 눈앞의 바쁜 일이 끝날 때마다 정말 최고로 잘 쉬어야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막상 마음이 편하지 않아 답답해지곤 한다. "잘 쉬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라는…. 약간 주객전도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포피스2>는 이러한 나의 작은 욕망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앞만 보고 달려온 밴드 멤버들에게라도 휴식을 주고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여기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표현이 나에게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미련 없이 일을 끝내야만 잘 쉴 수 있을 것 같다는, 늘 바라지만 결코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을 포피스 멤버들이 경험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포피스 친구들의 휴가지로 제주도를 정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들이 여행을 떠날 때의 설렘을 느끼면서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다 제주도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공간은 시각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기온, 냄새 등 여러 감각으로 기억되기 때문에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 단순 모사 이상으로 중요하다. 독자들은 이 공간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므로 창작자가 그 공간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 않으면 독자들을 몰입시키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창작자부터 그 공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지난 십수년간 제주를 오가며 조금씩 경험하고 관찰한 덕분에 내 스스로도 몰입하여 제주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었다.

작품 초반은 공연이 끝난 직후, 막히는 길을 뚫고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이륙 직전에 간신히 탑승하는 포피스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종종 없는 시간을 쪼개서 여행을 떠나곤 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늘 여행 출발 직전에 계획을 짜고, 여행 전날까지 밤샘 작업을 하다 허겁지겁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게 부랴부랴 짐을 챙겨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거치고 아슬아슬하게 게이트를 통과할 때 느껴지는 엄청난 안도감이 있다. 이 느낌이 포피스의 이륙 과정에서도 잘 전달되었으면 했고, 공연장 퇴장부터 탑승까지의 긴박한 흐름이 끊기지 않는 느낌으로 독자들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점점 고조되다가 게이트 통과 직후 숨통이 탁 트이는, 여행 전 긴장과 설렘을 극대화하는 연출을 통해 독자들도 함께 여행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를 희망했다.

제주에서의 자전거 일주

2020년 말, 나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참가해 번 돈으로 일본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자는 계획이었다. 숙박 앱을 통해 한 달 렌트가 가능한 숙소를 알아보며, 예산을 어떻게 할지, 도쿄에는 얼마나 머무를지, 여행과 일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 등등… 무료한 내 삶에 새로운 이벤트들이 생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코로나 19가 창궐하면서 그 계획은 그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우리는 대안으로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계획하게 됐다. 그렇게 2021년 2월, 우리는 약 일 주일 간 자전거와 배낭 하나를 메고 제주도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일과는 매일 이랬다. 해안도로를 따라 쭉 달리다 저녁쯤 숙소에 도착하면 다음 날 묵을 숙소를 그 자리에서 예약하고, 그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 달리기. 하루에 50~60km를 달리는 과정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처음엔 해안도로를 쭉 달린다고 해서 단순히 넓은 해변을 예상했는데, 끝없이 반복되는 언덕길에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르막길에서 페달질을 하며 힘겨운 여정을 이어가고, 내리막길에서는 짜릿한 활강으로 보상받으며 겨우겨우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자전거로 이동하다 저녁에 숙소에 도착하면 온몸이 아프고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내일은 더 힘든 경로를 달려야겠지만, 일단 출발만 하면 된다는 단순하고 명확한 과제가 가져다준 안정감. 아마도 작업자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찰나의 여유가 포피스 멤버들에게도 선사되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억 속 장소들

작중 지원이 사라진 날 아침, 남은 멤버 셋이 대화하는 장소인 세화해수욕장은 내가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현재는 꽤나 유명해졌지만, 처음 방문했던 19년 초만 해도 지금처럼 가게들이 많이 들어서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현무암과 백사장이 적당히 섞여 있어 눈도 즐겁고, 해수욕을 즐기기에도 알맞아 물놀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넓게 펼쳐진 현무암 지대 틈새로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작은 못들이 여기저기 고여 있는데, 해가 비쳤을 때 햇빛이 그 작은 못 안에 가두어지는 느낌이 아주 예쁘다. 그래서 이 장소를 꼭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멤버들에게 아침 산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 순간을 그 장면으로 정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멤버들의 여행 가이드가 된 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포피스 멤버들이 묵는 숙소는 실제로 내가 두어 번 숙박한 적 있는 장소를 모티브로 그렸다. 황토 벽, 은색 탁상 등 어릴 적 시골집을 떠올리게 하는 인테리어가 왠지 모를 편안함을 주어 애정하는 장소가 되었다. 큰 창이 있는 거실 앞에는 돌담을 둘러싸고 마당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애인과 테이블에 앉아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쏟아진다’는 말이 실감날 만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포피스 엔딩에서 현재도 비슷한 장관을 봤을지 궁금해 방금 책을 펼쳐봤는데, 지금 보니 구름을 잔뜩 끼워놓았다. 현재야, 미안!

필자가 포피스의 다음 제주 여행을 그리는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새로운 여행지로 비자림을 추천할 것이다. 재작년쯤 다녀온 비자나무 숲에서 갑자기 쏟아진 비에 나무 밑으로 피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웬걸,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염소들도 함께 비를 피하러 오는 장면을 봤다. 비가 금방 그쳐버린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진정한 여행지

여행의 또 다른 특징(장점이라고 적었다가 다시 정정했다) 중 하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나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은 없고, 온전히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모습으로 머무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현장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이방인과 자연스럽게(이론상으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친구(이론상으로)가 될 수도 있다!

작중 라이브 공연 바는 유일하게 상상으로 만들어낸 공간이다. 여러 라이브 공연 바 자료를 참고하긴 했지만, 제주에서 경험한 장소는 아니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라이브 공연 바에서 공연을 즐기고, 바 사람들과 시끌벅적 떠들며 모두가 친구가 되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일종의 로망이었다. 나에게 분신이 있다면(하지만 떨어졌다가 결국 다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 현장에 다녀오라고 시키고 싶은 느낌일까? 모르는 아티스트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등의 것을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나는 혼자가 편하다는 핑계로 그런 자리들을 일부러 회피해왔지만, 대신 포피스 멤버들을 그 자리로 보내게 되었다.

보컬인 원영이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면모라면 어디에 내놔도 걱정 없다고 생각한다. 이 포피스 아버지의 마음이랄까.

반쯤 농담으로 이야기했지만, 이 라이브 공연 바는 온전히 이 작품 속 인물들만의 공간이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실제 장소를 바탕으로 했을 때 약간의 반가움은 있을 수 있지만, 오히려 몰입하기에는 좋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특히 후반부 두 베이스로 연주하는 장면은 숨죽여 들을 법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상상이다. 그래서 더욱 고요하고 그들만의 공간처럼 느껴지기를 바랐다. 뭐랄까, 이전까지는 '제주도'라는 현실 공간에서 내 통제 하에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이 공간만큼은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경험을 인물들이 하길 바랐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내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이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포피스로 떠나는 여행

분량이 더 많았다면 포피스 멤버들을 한두 달 정도 제주도에 가두어두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랬다. 또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막상 너무 깔끔하게 일을 잘 처리하고 개운하게 털어내고 편하게 쉬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만들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결국 <포피스2>는 나에게 ‘이야기로 떠나는 여행’이자, 한 번쯤은 마음껏 쉬어보라는 조용한 위로였다.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한 한 달 살이의 욕망, 놓고 싶었지만 끝내 놓지 못한 일들, 그 사이에서 흔들리던 마음들을 이 이야기 속에 옮겨 담았다. 멤버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때로는 멀어졌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그 장면들을 통해 나 역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아마 그게 내가 이 이야기를 끝까지 그려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또 어디론가 떠나게 될 포피스, 그들을 통해 나 또한 또다른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다음 여행이 무엇일지 기다려진다.

필진이미지

윤재안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 <장르만화스터디 SIS> 멤버로 활동하면서 , <식인개구리>, <간증> 등을 집필했고,  단편만화와 웹툰 시리즈를 연재, <이 별에 필요한>의 캐릭터 디자인, 총 작화감독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