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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의 코믹월드 - 취향이 세계를 만드는 순간

서로 다른 취향과 콘텐츠가 모이고, 새로운 이미지와 관계가 만들어지는 코믹월드는 팬덤이 창작과 커뮤니티로 이어지는 장소가 된다.

2026-08-26 김시원

광복절의 코믹월드 - 취향이 세계를 만드는 순간 

08. 15 코믹월드 서울에서 만난 팬덤과 창작의 세계




광복절에 만난 코믹, 미쿠와 각시탈이 함께 걷는 풍경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중심으로 한 서브컬처가 강한 영향력을 갖는 코믹 행사 ‘코믹월드 335 일산’이 올해 8월 15일-16일에 열렸다. 

행사 팸플릿에는 태극기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고 행사장 곳곳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일본 문화와 가까운 행사라는 특성상 광복절과 서브컬처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상황을 주최 측 역시 의식한 듯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더 흥미로웠던 것은 공식적인 장치보다 참가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하츠네 미쿠를 비롯한 보컬로이드와 일본 애니메이션·게임 캐릭터 사이로 한복 차림의 참가자들이 오갔다. 한복을 그대로 갖춰 입은 참가자도 있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색이나 소품을 한복에 결합한 사람도 눈에 띄었다. 특히 15일 3층에서는 광복 81주년을 기념한 ‘한복 뽐내기 한마당’과 아리랑 공연이 열렸고, 코스프레 현장에는 김구 선생과 각시탈, 이순신 장군 코스프레도 등장했다. 


[그림1] 각시탈 코스어 (사진: 김시원, 2026.08.15.)


이순신 장군이나 각시탈을 둘러싼 관람객들은 반갑게 웃으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마치 코믹월드에 새로운 인기 캐릭터 하나가 새로 나타난 것 같은 반응에 가까웠다. 광복절의 역사적 의미를 무겁게 환기하는 대신 행사 참여자와 관람객들은 이 행사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는 놀이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광복절이라고 해서 일본 서브컬처를 밀어내거나 역사의 의미를 엄숙하게 강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각시탈과 이순신 장군까지 코믹월드 특유의 코스프레 문법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스파이더맨과 보컬로이드, 이순신 장군과 각시탈, 한복과 웹툰 캐릭터가 함께 거니는 풍경은 국적과 시대를 각각 나누어 바라본다면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장의 참가자들에게 한복은 전통을 재현하는 데 그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창작 소재였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의 이미지가 뒤섞이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와 취향을 한복에 더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코스프레의 세계에서 한복은 고정된 전통 의상이 아니라, 각자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하고 재창작할 수 있는 소재가 되어 있었다. 이는 그 자체로 유쾌한 풍경이었다. 


[그림2] 제1회 한복 뽐내기 한마당 (사진: 김시원, 2026.08.15.)



K-웹툰을 넘어 K-웹소설까지 


코스어와 관람객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인 청년 부스를 걷다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 IP 사이에서도 한국 웹툰과 웹소설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같은 인기 웹소설부터 <나 혼자만 레벨업>,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처럼 웹소설에서 웹툰과 애니메이션으로 확장된 작품까지 소재도 다양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웹소설 팬덤이었다. 웹툰에는 캐릭터의 얼굴과 체격, 의상이 이미 시각적으로 제시되지만, 웹소설은 문장으로 인물을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가 상상으로 채워 넣을 여지가 크다. 같은 인물을 읽고도 누군가는 날카로운 인상으로, 다른 사람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그린다. 텍스트 속에 있던 캐릭터가 독자의 머릿속에서 한 차례 형성된 뒤 다시 그림으로 태어나는 셈이다. 

이 점은 웹소설의 2차 창작을 조금 독특하게 만든다. 이미 완성된 캐릭터 이미지를 자신의 그림체로 옮기는 것과 달리, 문장 사이의 빈 공간을 먼저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차가운 인상’이라고 묘사된 한 문장을 두고도 팬마다 떠올리는 얼굴은 다를 수 있다. 작품 안에서는 동일한 인물이지만 팬들의 그림을 한자리에 모아놓으면 여러 버전의 캐릭터가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그림3] 케이팝 데몬 헌터스 2차 창작 굿즈, '창백' 부스(CE09-10) (사진: 김시원, 2026.08.15.)


코스프레도 마찬가지다. 외형이 명확한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달리, 웹소설 속 인물을 구현하려면 몇 줄의 묘사와 팬덤 안에서 공유되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의상과 헤어스타일까지 직접 구체화해야 한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캐릭터가 실제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결정하는 과정에도 참여한다. 

물론 인기 웹소설의 경우 공식 일러스트가 존재하거나 웹툰화 과정에서 캐릭터의 외형이 구체화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전후의 변화다. 독자가 각자 머릿속에 그리던 인물이 공식 이미지로 제시되고, 다시 그 이미지가 팬 아트와 굿즈로 변형된다. 텍스트와 이미지, 공식 창작과 팬 창작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캐릭터 이미지를 계속 만들어가는 셈이다. 최근 한국 콘텐츠가 확장되는 방식과도 연결되는 풍경이다. 웹소설이 웹툰이 되고, 웹툰이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로 제작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코믹월드에서는 이런 공식적인 미디어 확장과 별개로 팬들에 의한 또 다른 확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캐릭터가 팬 아트가 되고, 아크릴 스탠드와 엽서가 되고, 동인지가 되고, 코스프레를 통해 현실의 몸을 얻는다. 


[그림4] 데뷔못하면 죽는 병에 걸림 2차 창작 굿즈, '문어구이' 부스(CD41-42)(사진:김시원,2026.08.15.)


특히 <케이팝 데몬 헌터스>처럼 비교적 최근 큰 팬덤을 형성한 콘텐츠 역시 게임 <원신>이나 보컬로이드 같은 익숙한 서브컬처 IP 사이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국내 동인문화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성장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흥미로운 점은 그 안에서 만들어진 팬 활동의 방식이 이제 한국 콘텐츠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코믹월드에서 확인한 K-콘텐츠의 존재감은 그래서 단순히 “한국 작품이 많아졌다”는 데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팬들의 손에서 다시 해석되고 다른 형태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 중요했다. 플랫폼 안에서 연재되던 작품이 팬의 손을 거쳐 종이와 아크릴, 의상과 사진으로 옮겨간다. 작품의 영역이 공식 연재처 바깥으로 넓어지는 과정이다. 



팬덤에서 예비 작가로 — 굿즈 한 점이 만든 커뮤니티



대부분의 만화가에게 "어떻게 만화를 시작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이 열렬히 좋아했던 작품을 적어도 하나쯤은 이야기할 것이다. 좋아하는 작품을 따라 그리고, 그 안의 인물을 다시 해석하고, 자신이라면 이 장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상상하는 과정은 많은 창작자에게 익숙한 출발점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세계를 만드는 존재라기보다, 좋아해 온 작품들의 영향을 받으며 조금씩 자기 언어를 만들어가는 사람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코믹월드의 부스 사이를 걷다 보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단순히 '팬'이나 '소비자'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기존 캐릭터를 자신의 그림체로 다시 그려낸 사람, 수십 페이지의 동인지 한 권을 완성한 사람, 일러스트를 엽서와 스티커, 아크릴 키링으로 제작한 사람까지 창작의 방식은 다양하다. 2차 창작물 사이에서 자신이 만든 오리지널 캐릭터, 이른바 '자캐'를 선보이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현장을 돌아보다 보면 '취미로 만든 것'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완성도 높은 작업도 자주 눈에 띈다. 그 출발점은 의외로 사소하다. "이 캐릭터를 더 그리고 싶다", "이 장면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같은 개인적인 욕망이다. 원작자가 닫은 이야기의 문 뒤로 팬들은 다시 작은 문을 만들어낸다. 원작에서 만나지 않았던 두 인물을 만나게 하거나, 몇 줄에 불과했던 설정을 한 편의 이야기로 늘리기도 한다. 

그래서 2차 창작은 단순히 원작을 복사하는 일과는 다르다. 같은 캐릭터라도 누가 그리느냐에 따라 표정과 분위기,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원작에서 짧게 지나간 관계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의상과 상황을 부여한다. 하나의 작품이 팬을 거치면서 여러 갈래의 해석으로 번져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의 상당 부분은 평소 온라인에서 이루어진다. 화면 속에서는 수천 명과 연결되어 있어도 상대를 알기 어렵고, 반응은 '좋아요'와 조회수 같은 숫자로 먼저 보인다. 코믹월드에서는 그 관계가 잠시 현실로 옮겨온다. SNS에서만 보던 그림이 실제 종이에 인쇄되어 있고, 닉네임으로만 알던 창작자가 부스 뒤에 직접 앉아 있다. "저도 이 캐릭터 좋아해요"라는 짧은 말만으로도 대화가 시작된다. 팬덤이라는 말이 추상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만나고 이야기하는 커뮤니티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팬과 작가의 경계 역시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다. 오늘은 부스를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동인지를 구입한 사람이 다음 행사에서는 자신의 책을 만들어 테이블 뒤에 앉을 수도 있다. 기존 캐릭터를 따라 그리면서 그림을 시작한 사람이 언젠가는 자신의 오리지널 캐릭터와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코믹월드의 모든 참가자를 미래의 프로 작가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데뷔를 목표로 하지 않는 창작 역시 충분히 존재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소비와 창작이 일방향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을 좋아했던 독자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본 다른 사람이 새로운 팬이 된다. 팬과 작가 사이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림5] 2차 창작 캐릭터 쿠션이 진열된 부스 (사진: 김시원, 2026.08.15.)


취향의 축제, 코믹월드가 남긴 문화와 커뮤니티 


2년 전 미국 뉴욕 코믹콘을 방문했을 때 인상 깊었던 것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슈퍼히어로 코믹스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와 게임, 피규어와 오래된 코믹북까지 서로 다른 취향이 한 공간에 섞여 있었고, 작가와 제작자뿐 아니라 수집가와 코스어, 팬과 독립 창작자가 함께 있었다. 당시 한국 웹툰이 하나의 콘텐츠 장르로 소개되고 있던 모습도 기억에 남았다.

서울 코믹월드와 뉴욕 코믹콘은 규모와 성격이 다르지만, 개인의 취향이 사람을 만나 하나의 문화로 확장된다는 점은 닮아 있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리고 굿즈를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사기 위해 행사장을 찾는다. 코믹월드는 그렇게 창작과 소비가 만나 작은 시장과 커뮤니티를 이루는 공간이다.

그래서 코믹월드를 단순히 ‘오타쿠들의 행사’라고만 설명하면 현장의 절반을 놓치게 된다. 이곳은 어떤 캐릭터가 사랑받고 있는지, 팬들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하나의 콘텐츠가 사람들의 손에서 어떤 모습으로 확장되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장소다. 


특히 한국에는 웹툰과 웹소설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 생태계가 자생적으로 이미 형성돼 있다. 코믹월드에서 한국 작품의 굿즈와 2차 창작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해당 작품들이 공식 플랫폼의 독자층을 넘어 팬덤의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팬이 작품을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직접 그리거나 물건을 만든다는 것은 캐릭터와 IP가 작품 밖에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뉴욕 코믹콘처럼 거대한 문화산업으로 성장해야만 이런 행사의 가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코믹월드가 이미 창작자와 팬, 상업 콘텐츠와 독립 창작물이 직접 만나는 현장이라는 점이다. 팬으로 참가한 사람이 언젠가 자신의 굿즈를 만들고, 다시 창작자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림6] 스파이더맨 코스어, B컷 (사진: 김시원, 2026.08.15.)


광복절의 코믹월드에서 이순신 장군과 하츠네 미쿠가 함께 걸었듯, 이곳에서는 원작과 팬 아트, 일본 애니메이션과 한국 웹소설, 소비자와 창작자의 경계도 쉽게 뒤섞인다. 서로 다른 취향과 콘텐츠가 한자리에 모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이미지와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코믹월드는 단순한 소비 행사를 넘어 팬덤이 창작과 커뮤니티로 이어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다. 동시에 웹툰과 웹소설을 비롯한 한국 콘텐츠가 팬들의 활동 속에서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림7] 이순신 코스어, B컷 (사진: 김시원,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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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만화평론가·웹툰 창작자.
2025년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25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신인상을 수상하며 만화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웹툰과 소설을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고 있으며, 현재 와이랩 아카데미 웹툰작가 데뷔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