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머무는 곳]
여든의 생일상은 젊은 색과 유려한 선으로 채워졌다
조관제 화백 산수(傘壽) 기념전 '만보 漫步 : 80년, 붓 끝으로 세상을 거닐다'

“조관제가 난생 처음 맞이하는 80 생일을 맞이하야 명색이 카투니스트인지라, 잔치국수 대신 소박한 낙서 몇 점으로 생일상 대신 걸고 낡지 않음을 자축하려고 합니다.”
지난 달 한 통의 문자 초대장을 받았다. 가을, 축제의 계절이다보니 이런저런 초대장이 적지 않게 쌓이던 때였다. 무심코 열어보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실긋 웃음이 지어지는 이런 초대장을 받고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여러 사정으로 평일의 한가로운 시간을 골라 전시장인 인천 루츠앤루트뮤지엄을 찾았다.
그런데 가는 길이 심상치 않다. 좁은 도로가 산길로 접어든다. 한참 이어진 오르막에서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노년 작가들의 활동이다. 한국은 놀라운 속도로 초고령사회로 진입했지만, 또 여전히 청춘을 이야기하는 노년의 활동 공간은 극도로 낮은 것처럼 보인다. 만화계 역시 별다르지 않아 예전 작품을 모아놓은 기념전 같은 전시 정도가 그나마 존재의 증명일 때가 많다.
또 하나는 만화가 지난 시간 받던 대우와는 다르게, 웹툰은 서사가 있는, 디지털환경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각예술인만큼 전시를 비롯한 2차적 활용에 있어 상당히 많은 장점을 가진 콘텐츠라는 점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60여 년간 독자들과 함께했던 그 놀랍고도 많은 작품들과 웹툰시대 매월, 매일 올라오는 엄청난 양과 질의 작품을 다시 만나기나 새롭게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일부 실험적인 전시와 굿즈 등의 상업적인 도전과 일부의 성공을 제외하고는 아직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활동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은 듯했다.
만화와 웹툰 전시를 찾아가는 길은 항상 이런 아쉬움과 기대가 함께했다. 해학이 넘치는 한 원로 카투니스트의 문자에 끌려왔지만, 쉽지 않은 가는 길만큼 머릿속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산의 머리, 길이 끝나는 곳에 도착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곳은 한때 화려했던 시절의 인천을 기억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산마루에서 급격히 내려가는 좁은 골목길 주변으로 한우전문점 등 고급 음식점들이 이어진다. 그 입구 즈음에 낮고, 독특한 지붕의 열린 공간이 보인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루츠앤루트 뮤지엄’이다.
낡디 낡은 지붕은 화려한 색으로 치장되어 있고, 낮은 담과 정원에는 온갖 조각상들이 보인다. 넓게 퍼지는 햇살을 품고 있는 정원 입구에는 ‘만보’라 적힌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만보漫步’, 한가롭게 거닐다는 뜻이다. 그 마음을 담고 낮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미로와 같은 카페가 이어진다. 낡음이 세련됨과 친근함을 품고 길을 만드는 듯한데, 그 사이 숨겨진 좌석과 사람들 사이에 조관제 화백이 활짝 웃고 있다.
안내를 받으며 별채처럼 꾸며진 전시공간으로 들어가 본다. 밖에서 보기에는 작아 보이는데, 안에는 이런저런 공간이 제법 넉넉하게 숨겨져 있다. 전시공간은 복층의 구조였다. 아래층은 전시작품들의 슬라이드가 돌아가고 있고, 위쪽에는 촘촘하게 작품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 사이 공간들은 화백의 일생과 함께 한 만화의 여정이 다큐멘터리로 상영되고 있었고, 계단 옆 벽에는 찾아온 지인들의 마음과 감상이 담긴 낙서와 엽서가 가득하다. 조관제 화백은 “마치 권력이 있는 것처럼 사기를 잘 치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는다”며 웃는다.
원래 전시장이 아니라 쇼룸으로 사용하던 곳인데, 이번 전시를 마친 후 인천과 하와이의 교류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꾸며질 거라 한다. 그래서인지 용머리를 하고 있는 검은색의 의자도, 낡은 느낌의 피아노도, 마치 손님을 기다리는 바의 의자들도 어디서 보기 힘든 화려함과 독특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같이 어우러지는, 일상의 풍경과 같이 조관제 화백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만히 그림을 따라가 본다.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색을 배경으로 활기차고 재미있는 인물들이 상징적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을 되돌아보는, 흑백사진 느낌의 기념전도 아니고, 옛 시절의 감성을 기록하는 색과 풍경도 아니었으며, 또 화려한 디지털 감성으로 치장한 체험전도 아니었다.
다만, 젊고 화려한 색과 단단한 감성을 담은 그림이 촘촘하게 벽을 채우고 있다. 그 세련됨이 한 점 한 점의 그림을 유심히 보게 만들고, 그 공간을 ‘만보’하게 만들어준다.
문득 중간에는 유리가 없는 그림들이 보인다. 아크릴의 질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26년 7월, 8월이라는 시간이 선명하게 보인다. 바로 전시를 앞두고 작업한 작품들이다. 당연히 이렇게 최근에 작업을 하게 된 이유와 힘들지 않았는지를 조심스럽게 묻게 된다.

조관제 화백은 전시를 하려면 예전 것만 아니라 최근 것도 걸어야 한다는 전시기획자이자 가족의 성화로 그릴 수밖에 없었음을 심드렁하게 말해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기’칠까 고민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그림은 마음먹고 그리면 4~5이면 한 점 그리지. 이미 그리는 거야 다 알고 있으니까.” 오랜 세월 그림과 함께해온 작가의 여유와 카투니스트로서의 싱싱한 재치와 해학이 느껴지는 대답들이 돌아온다. 나이는 숫자라고 하던가? 그 재치와 해학이 낡지 않음을 증명했고, 깐깐하고 허물없는 동반은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벗인걸 또한 느끼게 된다.

계속 그럼들이 이어진다. 푸른 산속을 날아가는 종이학과 낚싯대를 드리운 인물이 등장하는 '행운 낚기', 황토빛 대지 위에 누운 인물을 그린 '쉼', 짙푸른 밤 노란 초승달을 불빛 삼아 걸어가는 두 사람을 표현한 '밤길'까지, 삶의 여정과 사색 그리고 사람들과의 소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작품들이 그 재치 있게 그려져 있다.
듬성듬성 떨어져 나 여기 있음을 주장하는 갤러리의 세련된 오만함은 없지만, 그 속에 담긴 생생함과 자연스러움은 만화, 카툰의 전시에 너무 잘 어울려 보였다.
낡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화백의 초대장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조관제 화백은 1973년 월간 《학원》을 통해 데뷔했다. 이후 《소년조선일보》, 《보물섬》, 《주간만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카툰과 만화 일러스트를 선보였다. 한국카툰협회 회장과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여전히 일선에서 젊은이들과 새로운 작가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한 늙은 예술가의 힘을 느끼게 된다.

슬라이드가 전시되는 아래층 탁자에는 조관제 화백의 지난 여정이 담긴 작품집과 기념품이 있다. 또한 조 화백 특유의 한자 서체와 계절의 흐름과 작가의 인생철학을 담은 일러스트 서화 작품 12점을 한지에 담아 일상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2027년 아트 캘린더'도 만날 수 있다. 소소한 재미가 적지 않은, 만화 전시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