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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웹툰에서의 여성 재현 문제

현재 한국에서 웹툰만큼이나 그 성장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는 문화 산업도 드물다. KT 경제 산업 연구소에서는 웹툰의 성장 가치가 1조원이라는 전망을 내어놓았으며, 유료 웹툰 제공 서비스 업체인 ‘레진 코믹스’와 ‘탑툰’은 지난 한해 각각 3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이 같은 ‘웹툰 흥행’이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것임을 증명했다. 이러한 양적 성장 아

2017-06-23 이연숙(리타)

(성인만화 : 애들은 가라 3)


1. 들어가며
현재 한국에서 웹툰만큼이나 그 성장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는 문화 산업도 드물다. KT 경제 산업 연구소에서는 웹툰의 성장 가치가 1조원이라는 전망을 내어놓았으며,1) 유료 웹툰 제공 서비스 업체인 ‘레진 코믹스’와 ‘탑툰’은 지난 한해 각각 3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2) 이 같은 ‘웹툰 흥행’이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것임을 증명했다. 이러한 양적 성장 아래에서 웹툰 창작자를 육성하고 등용시키기 위한 신생 플랫폼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현재 33개에 달하는 웹툰 플랫폼에서 연재되고 있는 작품 수는 최소한 600여 개에 달한다. 그 상품성을 검증받은 웹툰은 일찌감치 판권이 팔려 영화, 혹은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웹툰 시장의 가시적인 성장 속도만큼이나 이들의 질적 성장이 이뤄지고 있느냐이다. 사실 이 질문은 별 의미가 없는 가짜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성장 크기나 속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 안에 얼마나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하면서 공생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  <탑툰>
본 글은 대형 웹툰 플랫폼의 성인만화에서 재현되는 섹슈얼리티의 전형성을 문제 삼는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품 개별의 문제도 아니며, 독자들이 그런 방식의 재현을 원해서도 아니다. 단지 대형 웹툰 플랫폼에서 관심이 있는 것은 오로지 소위 히트작들과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양산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지만 웹툰 플랫폼은 결국 사익추구를 위한 기업일 뿐이며, 그들의 말에 따르면 성인 만화는 ‘캐시카우’로서 구매력이 있는 성인 독자들을 위한 미끼일 뿐이다.3) 성인만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성인물을 사는데 익숙해진 독자들이 비성인 콘텐츠를 구매”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성인만화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웹툰 플랫폼에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해줄 수 있다. 이것이 대형 웹툰 플랫폼이 끊임없이 성인만화 시장을 확대하는 이유다.4) 독자들은 심심해서, 그냥 구매력이 있어서, 흥분되서 등등의 여러 이유로 클릭 한 번에 성인만화를 본다. 그것이 만화를 보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실제로 구매가 되는 것은 ‘특정한 섹슈얼리티의 이미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구매, 또는 작품 자체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본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대형 웹툰 플랫폼에서 독자들에게 ‘캐시카우’로서 제공되는 ‘잘 팔리는’ 공급의 흐름이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경향이 전형성으로 굳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어떠한 전형성의 예시들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이러한 전형성에 대항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먼저 성인만화의 전성기라 불렸던 1980년대와 현재인 2010년대의 공통점을 비교해보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2. 1980년대와 2010년대 성인만화 비교
1980년대는 한국만화의 부흥기라고들 한다. 일반적으로 1980년대가 한국 만화의 전성기라 말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잡지만화가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1980년대가 한국만화의 전성기로 꼽히는 까닭은 대본소 시장의 활성화이다. 여기서 유통된 만화들은 소위 ‘이현세풍’의 성인극화이다. 대본소 시스템 아래 배출된 ‘스타’ 만화가들을 중심으로, 만화는 새로운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은 대중들로 하여금 즉각적인 쾌감을 갈구하게 만들었다. 성인들이 만화방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의 5월은 우리사회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 대중의 우울증은 더욱 깊어만 갔고 이른바 대중적 욕망은 더욱 부풀어만 갔다. (...) 우울한 대중은 보다 세고 단단한 것을 뜨겁게 바랐다. 바로 그 욕망 앞에 나타난 것이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다. (...) 전쟁의 참화 속에서 피어나는 영웅과 사랑의 드라마가 바로 1980년대 한국사회에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다.”5) 대중들은 까치에 열광했다. 까치는 여태까지의 캐릭터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비평가 위기철은 비판적인 맥락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까치의 현실 대응 방식은 ‘경쟁에서의 승리, 물질적 부의 획득을 통한 여자의 허영심에 대한 보복”6)이라는 것이다. 거의 ‘초인’에 가까운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성공하는 독기에 찬 주인공 “까치”의 모습은, 패배감과 절망감에 차 있던 당시 한국사회의 20대들에게 자기합리화의 한 방식을 제공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1980년대라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뜨겁고 센 남성들이 허영심 강한 여성에 단죄를 가함으로서 스트레스를 푸는 내용’이 성인만화의 대부분을 이룰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데 최근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한 웹툰들을 살펴보면 1980년대와 2010년대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레진코믹스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성인만화인 <속죄캠프>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레진코믹스에서 제공하고 있는 <속죄캠프>의 소개글을 보자. “그녀의 과거를 만나버린 그 남자… 이미 그에게 그녀는 괴물이 되어 있었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증오는 비뚤어진 복수심을 품게 하였다. 이윽고 시작된 복수극, 그 이름은 바로 ‘속죄캠프’였다.” 요약하자면 실패한 남성성이 상상 속의 여성을 처벌함으로써 구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현실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율을 고려해보자면, <속죄캠프>가 꾸준히 상위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속죄캠프>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성인만화 전체를 금지하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다.


△  <속죄캠프>(람작)
이번에는 레진코믹스와 마찬가지로 지난해 300억의 매출을 올린 탑툰의 경우를 보자. 대다수의 상위권 웹툰들이 제목과 소재가 일치함을 드러내고 있다. 요컨대 이런 식이다. <베프의 여친>, 메이트>, <민희>, <동거>, <옆집 소녀>, <천박한 년> 등등이 있다. 내용도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바와 같이 천편일률적이다. 다음은 대표적인 작품소개를 추린 것이다. “남자들만 아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 야릇함~! 그 야릇함의 단어인 친구의 여자와 동거!”(<동거>),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지만 순진하게 살아왔던 그녀에게 어느 날 찾아든 쾌락! 그런데 그 쾌락을 선사한 주인공이 그토록 혐오했던 상대라면?”(<시은>), “남성 독자라면 누구나 꿈꿔 봤을 그 배우! 그 판타지를 충족시켜 줄 만화입니다!”(캠>). 앞서 지적한 레진코믹스의 <속죄캠프>가 포르노그래피라는 이유로 비판이 어려운 것처럼, 탑툰이 소재로 삼는 여성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한정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 또한 어렵다. 이러한 만화만을 즐기는 ‘장르 소비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여성을 고문하고 착취하는 서사(<속죄캠프>)와, 탑툰으로 대표되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장이 여전히 큰 매출 규모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1980년대 페미니즘 운동에서 대표적인 반포르노그래피 진영이었던 안드레아 드워킨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포르노그래피는 남성의 우월성 구현에 불과하다. 그것은 남성 지배의 DNA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 우리 여성들에게는 그런 남성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은 상태이며, 남성에게는 여성이란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게 하며, 또한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려고 하는 상태이며, 남성들이 우리를 사용하는 방식이다.”7) 드워킨은 이러한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포르노 산업의 피해자를 예시로 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과 역사에서 여성이 성적으로 소비 되어온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드워킨에게 여성은 자연스럽게 폭력의 희생자가 되며, 포르노그래피는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직/간접적인 성적 착취의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포르노그래피는 검열되고 규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반포르노그래피 진영의 일반적인 논리다.
알다시피 이는 극단적인 주장이다. 게일 루빈이 <성을 사유하기>에서 설득력 있게 반박했듯, 드워킨의 이러한 견해는 근본주의적이고 성적 보수주의적이며 심지어 ‘퇴행적인’ 주장이다.8) 모든 여성이 모든 남성의 잠재적 피해자이고, 모든 남성의 모든 여성의 잠재적 가해자라는 드워킨의 도식에 따르면, 결국 이성애를 제외한 섹슈얼리티는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섹슈얼리티의 위계의 최하층’에 머물게 된다. <속죄클럽>이나 탑툰의 (일반적으로) 남성을 대상으로 한 웹툰들을 보이콧할 수는 있어도, 그들을 폐기할 수는 없다. 오로지 이성애만이 궁극적으로 위협적이며 최종적인 심급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1980년대의 대본소 만화들의 ‘시대적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대부분의 만화들에서 비슷한 여성성이 반복해서 변주되고 있으며 이는 ‘여성의 허영심’이라는 악덕 아래에서 정당화된다. 물론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를 재전유하고, 재영토화하는 일도 가치 있는 작업이 될 수는 있겠다. 예를 들면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과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에서으로 보인다. 본 글은 대표적인 상업적 웹툰 플랫폼인 ‘레진 코믹스’와 ‘탑툰’의 성인만화 제공 방식에 한계를 표하고, 이 같은 방식이 독자들의 욕망과 쾌락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준다는 가정 하에 상위권 성인 만화의 여성 재현 방식에 대해 분석할 것이다.


3. 전형적/비전형적 성인 만화 내 여성 캐릭터들
그런데 왜 웹툰 플랫폼에서 전형적인 성인만화만을 제공하는 것이 문제적인가? 다양하게 제공했는데도 독자들이 ‘그런 것만’ 찾아보는 게 문제 아닌가? 웹툰 플랫폼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독자들은 처음부터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소비를 했고, 웹툰 플랫폼은 소비 창구로서의 중립적인 역할을 다할 뿐, 그들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을까?
출판만화와는 다르게 웹툰 플랫폼은 누가 어떤 작품을 보고 있는지, 어떤 경로로 독자들이 유입되는지 통계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특정 웹툰이 누구에게 팔리는지를 내부인이라면 누구든지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 작품은 편집자들이 원하는 방식, 즉 가장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는 방식으로 포장되고, 형식화되고, 상품화됨으로써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웹툰은 “소비자를 웹툰 플랫폼으로 집결시켰고, 기업의 광고와 홍보의 기능까지 검증해내면서 차별화된 경제적 가치를 창출”9)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소위 ‘웹툰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관문이 ‘웹툰 플랫폼’으로 한정되면서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웹툰 플랫폼을 통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소비를 할 수 있을까?
대형 웹툰 플랫폼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가는 가운데, 실제로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작품을 선택할지 말지는 오로지 플랫폼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의 개별적인 선택에 달려있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얼마나 ‘지지’하든지 상관없이, 팔리지 않는 작품은 일찌감치 ‘연재중단’되기 일쑤다. 무료로 웹툰을 제공하던 대형 포털 역시 2015년 이후 수익 사업에 뛰어들면서 독자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대형 포털이 신인 작가가 아니라 기존 작가들을 상품화하는데 주력하는 모습을 통해 구체화된다. 결과적으로 독자들은 대형 포털이 작가를 일련의 상품으로 제조하는 과정에 연루된다. 대형 웹툰 플랫폼이 제공하는 이미 상품화된 ‘다양성’ 앞에서 독자 개개인의 취향은 큰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웹툰 플랫폼에 책임을 필요가 생긴다. 따라서 웹툰 플랫폼이 제공하는 성인만화의 전형성에서 벗어나는 재현이 가능한지 질문하려면, 결국 우리는 작가와 독자가 웹툰 플랫폼이라는 구축된 시스템 밖에서 만날 수 있는지를 질문해야만 할 것이다.

△ 좌<우연히>(닭타령&린&얀새), 우<동거>(병수씨)

본격적으로 대형 웹툰 플랫폼의 성인만화의 전형성에 대해 예시를 들어보자. 다음은 탑툰의 인기작인 <우연히>와 <동거>의 여성 캐릭터들이다. 이들 캐릭터는 소위 ‘여성스러운’ 외형으로 분류된다. 몸매는 굴곡져 있으며, 긴 생머리에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갖춘 것으로 묘사된다. 외형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남성적 응시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뿐,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존재로 서사의 중심에 자리 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탑툰의 인기작인 <우연히>는 그러한 서사의 극단 점에 서 있는 경우로, 남성 화자가 우연히 성매매 업소에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인 ‘예은’을 마주치게 된다는 이야기다. 화자는 성매매 업소에서 누구에게나 몸을 허락하며 성병을 옮기는 더러운 여자로 추락한 ‘예은’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고등학교 시절 순결하고 아름답던 ‘예은’의 모습을 기억하며 ‘예은’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시에 성매매 업소 여성들과의 섹스신은 화자인 내가 ‘예은’과 다른 여성들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분리 장치다. 화자인 내 안에서 ‘예은’은 여전히 순결하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엔 아무리 더럽혀졌어도 고결한 ‘성녀’인 것이다. 이 서사 안에서 여성 캐릭터들의 내적 갈등이나 성적 욕망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남성 화자인 내가 어떻게 ‘예은’을 최종적으로 구원하는데 성공하는지다.
또 다른 예시인 탑툰의 인기작인 <동거>는 화자인 내가 친구의 여자친구인 ‘윤희’와 동거를 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웹툰이다. ‘윤희’는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 특히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은 화자가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혜주’로, 이 인물은 전형적인 ‘여대생’으로 재현된다. 화자인 나는 ‘혜주’에게 소위 어장관리를 당하고 있지만, 그녀의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항상 복종하게 된다. ‘윤희’는 ‘혜주’와는 달리 물욕도 없고 탐욕도 없으며 오로지 성적인 본능에 충실한 인물로 재현된다. 남자친구인 ‘봉석’이 오랜 기간 출장을 간 틈을 타 화자인 나와 성적인 긴장감을 즐긴다. ‘윤희’는 자립할 능력이 없는 인물로, 거의 집 안에만 있는 애완동물 같은 존재다. 이 인물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남성 화자인 내가 상대적으로 이 여성들에게 ‘희생양’처럼 그려진다는 점이다. 화자인 나는 ‘혜주’와 ‘윤희’ 모두에게 감정과 물질을 착취당하지만, 이들은 끝까지 자신의 ‘진심’을 주지 않는다. 이들 여성 캐릭터는 오로지 남성 화자의 자기 연민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평면적이며 희생자처럼 묘사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 페미니즘 비평은 그럴 필요가 없을 때조차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상황을 과장하거나 설명을 생략하곤 한다. (물론 페미니즘뿐 만 아니라, 모든 정치적 주장들은 그런 식으로 다른 관점들을 고의적으로 잊어버린다.)
예를 들면 본 글에서는 지금 레진 코믹스에서 연재되고 있는 <속죄캠프>나 <새디스틱 뷰티>에 대한 설명은 생략했다. 두 작품 모두 인기작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그랬을까? 당연히 대형 웹툰 플랫폼에서 연재되는 성인만화의 전형성의 예시로 두 작품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속죄캠프>는 앞서 ‘나쁜 예’로 들긴 했지만, 성인만화로서 충분히 재미있고 좋은 작품이다. 여성 캐릭터인 ‘다애’가 남성 캐릭터들에게 성적으로 고문당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강간 포르노이며, 그러므로 질이 나쁜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속죄캠프>는 비평의 관점에 따라 페미니즘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내러티브를 관통하는 것은 ‘다애’의 서사이며, ‘다애’의 육체가 가진 시각적 강렬함이 작품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 <새디스틱 뷰티>(우연희,이금산)
또한, 전형적이지 않은 케이스로서 <새디스틱 뷰티>는 사도마조히즘적 취향을 가진 여성 캐릭터인 ‘두나’가 남성 캐릭터들을 성적으로 소위 ‘조련’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대적으로 어리버리하고 ‘두나’에게 호감이 있는 캐릭터인 ‘해솔’과, ‘두나’를 표면적으로는 혐오하지만, 피학적인 취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민호’는, 시종일관 ‘두나’에게 모욕당하고 성적으로 착취당한다. ‘두나’는 마치 가부장처럼 두 인물 사이를 오간다. 왜냐하면 연하인 ‘민호’와 동거를 하며 애인 사이처럼 지내면서 상대적으로 소프트한 플레이를 즐기는 반면, 과거의 남자인 ‘민호’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채로 상대적으로 과격한 행동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해솔’은 ‘두나’가 자신을 성적인 파트너로만 여긴다고 생각해 언제나 안절부절못해한다. <새디스틱 뷰티>에서 가장 많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해솔’이기에 독자들은 여성 캐릭터인 ‘두나’의 무심함과 비밀스러움에 두려움을 느끼는 한편 ‘해솔’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두나’가 여성 캐릭터로서 남성 캐릭터들을 성적 대상화하고 그들을 마치 역전된 가부장 서사의 희생물로서 착취하는 것을 볼 때의 쾌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4. 수용의 여러 전략 - 전형성을 넘어서?
이처럼 고의적으로 이 글에서 누락해야만 했던 성인만화의 좋은 예시들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성인 만화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굳이 레진 코믹스와 탑툰의 상위권 성인 만화를 보면서 전형성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성인만화가 전형적인 것이 뭐가 나쁜가? 전형성이 반드시 부정적인 가치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우리가 전형성을 분석해야 하는 이유는, 전형성이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 문화 내에서 승인되고 있는 지배적인 가치 체계에 기반 한 약호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형적인 것들을 통해 무의식적인 문화적 요구들을 점검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전형적인 것 안에서도 전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일탈을 생각할 수 있다. 페미니즘 비평과 퀴어 이론이 여태까지 해온 방식대로 말이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작품인 <우연히>를 전복적으로 독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은’이 반복적으로 주변 남성들에게 ‘구멍’으로서 모욕당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쾌감을 느낀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자학하는 마조히스틱한 성향을 가진 것에 대해서 심리학적 분석을 한다거나, 혹은 성병을 옮기고 다니는 일로서 남성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등의 해석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의미가 있을까? 작가의 의도와 작품 전체의 흐름과 무관한 이러한 ‘해석’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우연히>의 몇몇 장면은 전형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작품 전체가 전형성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연히>와 같은 작품들을 무리해서 ‘퀴어하게’ 읽는 것보다 ‘전형적인’ 작품으로 분류하는 것은 비평적으로 훨씬 유용한 작업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전형성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항상 다양성의 결여에 있다. 페미니즘 비평에 있어 ‘섹슈얼리티 재현의 다양성의 결여’는 너무나 쉽게 제기되는 문제다. 이 글 역시 그러한 문제의식으로 촉발된 것이 사실이다. 섹슈얼리티, 특히 여성의 재현이 왜 부족한 것인가? 왜 이렇게 전형적으로‘만’ 재현되는가? 이를 비판하기 위한 많은 수사가 등장할 수 있고, 또한 공백을 메꿔주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가 동원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평평함의 감각, 생각보다 세상이 ‘말랑하다’는 감각이 확산될수록, 이를 비판하기 위한 정치적인 이미지들은 힘을 잃을 것이다. 비판적인 이미지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화를 보는 까닭이 마지막까지 하나라도 남는다면, 그것은 결국 ‘재미’여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생각이 너무 순진하게 생각 한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만화 독자의 입장에서 재미가 없으면 못 보겠다.
앞서 본 글은 웹툰 플랫폼이 경제성의 논리에 함몰됨으로써 전형적인 성인 만화만을 독자에게 제공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만약 독자가 웹툰 플랫폼이 제공하는 작품만을 수동적으로 감상하게 된다면, 웹툰 플랫폼이 이익을 창출한다고 판단하는 여성의 이미지만을 수용하기 쉬울 것이다. 독자가 주체적으로 전형성을 ‘해체’하고 ‘전복’하는 읽기를 할 수 있다고 막연하고 무책임하게 믿자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전형성을 고정하고, 그러한 전형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를 무지한 위치로 전락시키는 것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읽기의 인식론을 제시하고 독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힘을 재분배하는 것이야말로 ‘비판’을 무효화하지 않을 수 있는 전략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독자들은 어떤 전략을 취할 수 있을까? 웹툰 플랫폼에서 유통되지 않는다면 ‘웹툰’으로 불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웹툰이 전시되고 매개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소수의 웹툰 플랫폼만이 소위 ‘대형 작가들’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여성을 전형화하고 착취하는 재현 자체에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고 그러한 현실에 항의하기 위해 웹툰 자체를 보지 않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창작자로서는, 웹툰이라는 매체에 한계를 느껴 출판 만화나 대안 만화 등의 다른 매체를 고려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매체를 바꾼다고 해도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현재 웹툰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은 전 지구적 자본화의 축소판이나 다름없기에, 어떤 매체에 대응해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 예상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든 여성이 전형적으로 재현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동시에, 페미니즘 비평적 관점에서 여성의 재현이 다양해지는 것 또한 막을 방법이 없다. 독자로서 이러한 재현들을 즐기거나 혹은 비판하거나 혹은 옹호할 것인지를 택하는 것은 순전히 작품에서 자신이 어떤 의미를 발견하느냐에 달려있다. 푸코를 변형해서 말하자면, 독자로서의 정체성 역시 당신이 누구인지보다 무엇을 행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

1) KT경제경영연구소, “웹툰 플랫폼의 진화와 한국 웹툰의 미래”, 2013, (goo.gl/sOz4VQ)
2) “2년 만에 누적 매출 300억 달성 탑툰 … 사옥 확장 이전”,
http://www.nocutnews.co.kr/news/4587796
“창립 2년만에 매출 300억 레진코믹스, 뛰어난 인재도 덕후 아니면 안 뽑아 성공”,
http://news.chosun.com/misaeng/site/data/html_dir/2016/04/26/2016042602359.html
3) “올해 해외서 200억, 전체 500억 매출”..K툰 스타 탑툰“,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E41&newsid=03263606612583976&DCD=A00504&OutLnkChk=Y
4) 예를 들면 2015년부터 현재까지, 레진코믹스는 ‘성인만화 BIG 4 공모전’을 개최해오고 있다.
5) 최열, 『한국 만화의 역사』, 열화당, 1995, 135p.
6) 위기철, 「대중적 양식으로서의 만화」, 『만화와 시대』, 공동체, 1987, 230p.
7) 안드레아 드워킨, 『포르노그래피』, 유혜연 옮김, 동문선, 1996, 42p.
8) 게일 루빈, 「성을 사유하기」, 『일탈』, 임옥희 외 옮김, 현실문화, 2015, 60p.
9) 한창완, “웹툰 플랫폼의 산업적 진화와 세계화 전략 연구”, 애니메이션연구(11)3, 한국애니메이션학회, 2015, 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