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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도시 앙굴렘, 만화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엿보다

전시 중간 중간에 숨겨진 명작 만화들은 그들의 언어를 모르는 내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건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여행지의 분위기처럼, 그림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그 어떤 것이었다. 바로 내가 찾던 만화의 가능성과 다양성이 도시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으며, 이는 내게 새로운 만화의 대한 갈망을 다시금 환기시켜 주었다.?

2017-02-28 고동동


앙굴렘국제만화축제는 1974년 작가들의 발표회에 자극을 받은 앙굴렘시의 투자로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앙굴렘시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고, 1980년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칸 영화제와 더불어 프랑스의 대표적인 5대 축제로 거듭나게 된다.

대표적인 세계 만화 축제로 수상작은 세계인이 인정하는 베스트셀러로 인정받게 된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팔며, 함께 교류 할 수 있는 이 축제는 다양한 만화를 찾는 독자에게 혹은 만화가에게 꼭 가봐야 할 곳이라 하겠다.
내가 앙굴렘 만화 축제를 알게 된 것은 2010년이었다. 당시 벨기에의 카나 출판사와 〈레아는 진공청소기 사용법을 기억하지 못 한다〉라는 합작 작업을 진행하던 난, 앙굴렘국제만화축제가 프랑스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격분(?)했었다.

만화의 가장 강력한 생명력은 다양성이라 생각했던 내게 앙굴렘국제만화축제는 신세계를 만날 꿈의 항해같이 비춰졌던 것이다. 하지만 항상 행운은 쉽게 오지 않으며, 또 오게 된다 해도 지켜내기가 어려웠다. 출판사가 보내준 축제참가 항공권은 다른 곳으로 넘어갔고, 그렇게 앙굴렘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갈수 없는 엘도라도로 남게 되었다. 한국에서 작품을 만들고,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즉 만화가가 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고, 어렵게 얻은 연재 기회는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지옥철〉과 〈명탐정 포우〉를 작업했다.

내 작품을 돌아보며, 독자들의 댓글을 보며, 난 항상 내 가슴속 어딘가에 도사린 굶주림과 마주치게 되었다. 내가 원했던 이미지, 내가 원했던 그림, 내가 원했던 만화는. 만화의 가능성은 그 무한한 상상력과 새로운 가능성이라던 그 이상은 어디에 가버린 건가.
그 부족함은 항상 나를 불안하게 했다.
파울료 쿠엘료의 〈연금술사〉에 보면, 주인공인 산티아고가 여행 중 전재산을 털리고, 잠시 머물게 되는 크리스탈 그릇가게의 주인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항상 메카를 생각하고, 메카성지순례를 죽기 전에 해야 할 성스러운 일로 생각하지만, 절대 가게를 떠나지 못한다. 항상 다음해로 미루고 또 미루고, 그는 결국 메카에 가지 못한 체 죽을 것을 예감한다. 그래서 주인공에게 말한다. 너의 꿈을 찾아 떠나라고,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고 말이다.
감명 깊게 본 부분인데, 정작 난 주인공 산티아고가 되지 못하고, 점점 크리스탈 그릇 가게의 주인처럼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 작가의 집에서 바라본 앙굴렘 시내
그런데 갑자기 기회가 찾아왔다. 〈피리 부는 남자〉가 ‘글로벌 웹툰 지원사업’에 당선되었고, 해외 홍보 차원에서 해외 만화축제 참가 비행기 값을 지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앙굴렘 축제의 대한 꿈을 환상을 드디어 7년만에 현실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담 쌓은 지 10여년이 넘은 상태로 무작정 프랑스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이미 머릿속은 하얘지기 시작했다. 버스는 어떻게 타고, 택시는 어떻게 타고, 지하철은 어떻게 탈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건 동행한 박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선 동양인만 봐도 어찌나 반가운지….
그런 와중에 같은 비행기 속의 한국인을 만났다.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였으니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무턱대고 말을 걸 순 없었다. 이때 중년 부부가 먼저 말을 걸어왔고, 우리의 목적지가 앙굴렘임을 알게 된, 옆자리에서 조용히 있던 여자 한 분이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적지도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다름 아닌 앙꼬작가였다.
이번 앙굴렘만화축제에 작품상 후보로 거론된 작가였던 것이다. 낯선 타지에서 말을 통할만한 한국인을 만난 것만도 즐거운 일인데, 게다가 만화가였고, 몇 명 작가들의 이름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가까운 친구마냥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숙소와 예약 일정이 달라, 나와 박작가 일행은 이틀 뒤에나 앙굴렘을 향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원시인이 되어 손짓 발짓, 눈짓을 총동원해 도착한 앙굴렘의 첫날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잠시 머물렀던 파리는 관광지 쪽이 아니었기에, 일반 도시의 풍경과 다를 게 없었다면, 앙굴렘은 그야말로 동화속의 유럽 도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건물 하나하나가 새로 왔으며 영화나 명화 속에서만 보던 다양한 구조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1월의 프랑스 날씨는 영상 0도 정도의 춥지 않은 기온이었고, 날씨는 화창 했다. 카메라만 가져다 대면 인생샷이 터져 나왔다. 커다란 축제장 한곳에서만 모든 행사가 치려지는 일반적인 만화축제와 달리 앙굴렘은 유서 깊은 만화의 도시에 걸맞게 도시 전체가 축제장이었기에, 거리마다 펼쳐진 만화 전시관을 찾아가는 길 자체도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 한국관 만화부스와 필자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보고 있는 관람객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시민들 자체도 홍보대사라도 된 듯 친절히 낯선 외국인들을 상대해 주었다. 그렇게 한국관 부스를 찾아갔고, 한국관 부스의 만화영상진흥원 직원들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어리둥절하던 차, 그 원인이 이틀 먼저 온 앙꼬작가가 우리소식을 알렸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관 직원들은 흔쾌히 행사 관계자들만 가질 수 있는 프리패스 관람증을 끊어주었고, 우리는 진흥원 직원들과 함께 일반인은 혹은 작가들도 쉽게 갈수 없는 앙굴렘만화박물관의 수장고까지 갈수 있는 영광을 맛보았다.

앞서 언급한 1976년부터 수집된 세계 각국의 만화들로 수장고는 가득했고,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 원화, 그리고 일러스트 작품들까지 어디서도 쉽게 대할 수 없는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종이가 상할까봐 습도와 온도까지 조심스레 체크하며 작품을 보관하는 수장고의 모습은 수작업 작가로서 무척 인상 깊은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속엔 만화가 단지 일회성 소모품이 아닌, 몇백년이 지나가도 후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인류사적인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내포 되어 있었던 것이다.
△ 앙굴렘 만화박물관 전경과 수장고 입구
짧은 마감과 독자의 인기도만 신경 쓰며 무조건 빠르게, 무조건 독자들이 좋아하는 플롯만 따라가려는 다급함이 전부가 아닌 다른 길이 있음을 생각해볼 기회였던 것이다.
수장고만이 아니어도, 전시 중간 중간에 숨겨진 명작 만화들은 그들의 언어를 모르는 내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건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여행지의 분위기처럼, 그림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그 어떤 것이었다. 바로 내가 찾던 만화의 가능성과 다양성이 도시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으며, 이는 내게 새로운 만화의 대한 갈망을 다시금 환기시켜 주었다.

나 역시 내 일정대로 프랑스 연재가 약속된 델리툰 편집장과의 일정을 마치고, 각 부스를 돌며 작품 홍보에 나섰다. 그런 일정을 소화하며 앙꼬작가와 일정이 맞으면, 앙굴렘 여행을 함께 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앙굴렘을 자주 찾었던 앙꼬작가는 선배 가이드가 되어 도시 곳곳의 역사와 한국 만화의 자취를 설명해 주었다.

나에겐 작품 홍보 외에도 한 가지 미션이 더 있었는데, 연재 분량을 못 끝내고 프랑스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작업할 것 챙겨서 일하려 나와야 했다. 내가 머문 숙소는 아쉽게도 책상이 없었기에 카페를 찾아야 했다. 프랑스에는 새벽에 여는 카페가 많았고, 심지어 술도 팔았다. 여행지에선 여독 때문인지 새벽에 일어나게 되었고, 그때마다 가는 프랑스 카페에서 맞는 프랑스의 아침 태양은 황홀한 아름다움을 주었다. 카페 주인 역시 낯선 동양인이 아침마다 일할 걸 가지고 와 커피한잔 시켜놓고 일하는 모습이 재밌어 보였던 것 같다. 나중에는 이런저런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만화의 도시이기에 만화가에게 더욱더 관대한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 새로운 발견상을 수상한 앙꼬 작가와의 기념 촬영
그렇게 며칠이 흘렸고, 축제의 백미인 시상식이 남아있었다. 우리와 자주 함께 하게 된 앙꼬작가는 시상식을 앞두고 무척 떨려했다. 이때 우리가 함께 간 페이퍼 박물관이 그녀에게 작은 위로를 주게 된 것 같았다. 앙꼬작가는 10여 년 전부터 새만화책 출판사 직원들, 그리고 동료 작가들과 축제에 찾아왔고, 그때 함께한 작가들과 밤을 새워 작품 전시를 준비했던 게 바로 이 페이퍼박물관이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게 된 앙꼬작가는 그날 저녁의 시상식에서 결국 ‘새로운 발견상(Prix revelation)’을 수상했고, 10여 년 전 앙굴렘의 찾을 때의 자신을 회상하며, 수상평을 말하게 되었다. 모두의 축제였다. 낯선 앙굴렘에서 함께한 한국인들 모두의 축제.
만화영상진흥원 직원들과 한국작가들 모두는 앙굴렘 최초의 한국작가의 수상을 한마음으로 축하하며 기뻐했다.
거긴 앙꼬작가의 작가적 고뇌의 환호가 있었고, 더 이상 일본만화와 비슷한 동양의 나라가 아닌 ‘한국만화’라는 이름을 각인시켜나가는 우리나라의 만화 종사자들의 환호가 있었다.
뜻 깊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 축제는 끝나고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초보 여행객답게 기차표를 잘못 해석한 우리는 다른 기차를 탈 뻔 했고, 진흥원 직원의 친절로 겨우 제대로 기차를 탈수 있었다.
여행에서 마주친 모든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세계 만화 축제 속에서 그들 모두가 한국만화였으리라 생각한다. 만화 자체이면서, 만화를 홍보하고, 알려주는 모두였던 것이다.

뜻 깊은 여행에서 마주친 모두에게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