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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만화의 탄생과 전개

7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는 명랑만화다. 명랑만화는 다시 구분하면 잡지나 신문에 연재된 만화와 만화방용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화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일반적으로 ‘명랑만화’란 구분은 잡지나 신문에 연재된 어린이를 위한 우스개 만화를 부르는 명칭이었다.

2017-03-21 박인하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과 명랑만화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며, 축적된 경험을 통해 세계를 판단한다. 여러 정보 중 시각정보는 눈을 통해 받아들이는데, 눈으로 본 정보는 약 2초 정도 감각기억(sensory memory)에 저장되고 시각정보 중 축적된 경험에 의해 중요성을 판단해 단기기억(short term memory)을 거쳐 장기기억(long term memory)에 저장된다. 시각정보의 지각과 기억의 과정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삭제하고, 필요한 특징을 과장한다. 그리하여 특징적이면서도 간략하게 시각정보를 조합한 후 저장한다. 기억된 시각정보를 외부로 재현할 필요가 있을 때, 저장된 시각정보와 유사하게 재현하게 된다. 배워서가 아니라 DNA에 습득된 정보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형상의 특징을 잡아 선으로 시각정보를 재현했다. 문자 언어 탄생 이전 이미지 언어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문자 언어가 등장하면서 이미지 언어는 소통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가끔 왕의 업적이나 종교의 교리를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었을 때 무대에 등장했다. 이런 원형적 만화의 전통은 17-19세기 풍자화와 풍자만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지 언어를 활용해, 연속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만화’라 부르기는 어렵다. 만화는 근대매체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근대적 매체 만화의 성립과 우스개 캐릭터
이미지 언어를 체계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건 근대에 들어서다. 1702년 영국 최초의 일간지 《데일리 코란트(Daily Courant)》가 창간되는 등 신문, 잡지와 같은 근대매체가 등장한다. 이 시기 풍자만화는 신문과 전단을 통해 대중적 인쇄물로 자리잡아갔다. 1820년대에는 ‘풍자 산업’이 영국 주요 도시에 지점을 운영할 정도였다. 19세기 초반 풍자만화는 인물의 특징이나 행동을 과장해 그리며 세태를 풍자했다.
1827년 스위스 기숙학교 교장인 로돌프 토페르(Rodolphe Töpffer)는 우스개 캐릭터를 등장시킨 만화를 만들어 지인들끼리 돌려보았다. 주인공이 나오고, 칸으로 분절되어있으며, 그림과 문자가 분리되어있으며, 페이지가 연속된 ‘만화’였다. 느닷없이 거의 완벽한 형태의 만화가 출현했지만, 아무튼 괴테의 권유로 출판을 결심해 1833년 첫 작품 <자보씨 이야기(Histoire de M. Jabot)>를 출간한다. 이후 몇 권의 만화를 더 출간하는데, 모든 작품들에 우스개 캐릭터가 등장하는 일상적인 해프닝을 다룬다. 토페르는 1845년 자신의 저서 <관상학 에세이(Essai de Physiognomonie)>에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 그림이 묘사된 화면의 연속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판화 문학’이라 명명했다. 

△ 자보씨 이야기

19세기 중반 풍자만화와 토페르의 만화 등에 영향을 받은 만화들이 등장했다. 이들 만화는 새롭게 창간된 유머 잡지에 실려 인기를 끌었다. 영국에서는 유머 잡지(로저 새빈은 <만화의 역사>에서 ‘중산층 잡지’라 표현했다) 『펀치(Punch)』(1841), (로저 새빈이 ‘노동자 계층을 겨냥한 잡지’라 표현한) 『주디(Judy)』(1867), 『웃기는 사람들(funny Folks)』(1874), 『스크랩스(Scraps)』(1883) 등의 잡지가 창간되었다. 이들 (만화)잡지는 세태를 풍자하건, 바보 같은 사람을 놀리건 간에 우스개 만화가 중심이 되었다. 1884년 길버트 댈지엘(Gilbert Dalziel)이 창간한 『앨리 슬로퍼의 반나절의 휴일(Ally Sloper’s Half Holiday)』은 싸구려 주간지였는데, ‘앨리 슬로퍼’라는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가 실렸다. ‘앨리 슬로퍼’라 불리는 알렉산더 슬로퍼는 상류계급 흉내를 내는 술주정뱅이 노동자다. 대머리에 붉고 커다란 코, 가느다란 팔다리와 볼록 튀어나온 듯 보이는 배 같은 외형만 봐도 전형적인 우스개 캐릭터다. 앨리 슬로퍼는 한 페이지 만화와 연속되는 이야기에 나오는 등 종횡무진 활략을 하는데, 인기 우스꽝 스러운 캐릭터 ‘앨리 슬로퍼’의 인기에 기대어 잡지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옐로키드

19세기 후반 미국의 신문은 새로운 독자를 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는데, 죠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는 1833년 《뉴욕월드(New York World)》의 일요판에 컬러부록을 신설해 만화를 연재했다. 영어에 미숙한 이민자들을 겨냥한 아이디어였다. 퓰리처는 젊은 작가들에게 만화를 연재시켰다. 젊은 작가 중 한 명인 리처드 펠튼 아웃코트(Richard Felton Outcault)는 1895년 5월 5일 뉴욕의 빈민가 호건즈 앨리의 풍경을 담은 <호건 골목의 서커스에서(At the Circus in Hogan’s Alley)>를 발표했다. 아웃코트가 그린 빈민가에는 노란 옷을 입고 있으며, 커다란 귀가 팔랑이고, 대머리 중국아이 꼬마가 나왔는데, 작가는 꼬마의 옷에 재미있는 대사를 적었다. 이 아이는 ‘노란 꼬마’라는 별명을 얻으며 인기를 얻는다. 《뉴욕저널(New York journal)》로 자리를 옮긴 아웃코트는 1896년 10월 25일자부터 노란꼬마를 주인공으로 <옐로 키드(The Yellow Kid)>를 연재한다. <옐로 키드>는 우스개 주인공이 나오고, 몇 개의 칸이 연결되는 우스꽝스러운 만화인 ‘코믹 스트립스(comic strips)’의 형식을 완성했다.

한국 근대만화와 웃음
1909년 6월 2일 창간된 《대한민보(大韓民報)》에 연재된 이도영의 <삽화(揷畵)>에서 한국의 근대만화가 시작되었다. 이듬 해 8월 31일 《대한민보》가 폐간될 때까지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목판화의 강력한 선으로 현실을 풍자하고, 민중을 계몽했다. 1910년 강제병합된 이후 한국의 매체는 대부분 폐간되었고, 《매일신보》나 《경성일보》와 같은 조선총독부의 관제매체만 살아남았고, 《대한민보》에서 보여준 풍자와 계몽의 만화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1920년, 각각 3월 5일과 4월 1일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되며 한국만화에 새로운 변화가 불기 시작했다. 후발주자인 《동아일보》는 창간호에 김동성의 4칸 만화를 시작으로 <그림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23년 5월 3일 사고를 통해 만화작품공모를 시작했고, 5월 23일에는 당선작을 발표했다. 이후 《동아일보》는 독자투고만화란을 지속적으로 운영했다. 1924년 1월 1일 《조선일보》도 신춘만화공모작을 발표한다. 이처럼 1920년대에 접어들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독자투고 만화를 통해 이도영 만화에서 보여준 풍자와 계몽이 계승되었다. 그러나 만화매체의 폭발적 확산이나 장르의 분화 등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새로운 근대매체인 만화는 일본과 조선에 직수입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신문 만화 시대를 개척한 김동성은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신문과 신문만화를 공부했고, 유학시절 《신한민보》에 시사만화를 발표한 후 1919년 귀국하여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해 다양한 만화를 발표했다.
1920년대 일본의 신문, 잡지 편집자들은 영국과 미국의 신문, 잡지를 통해 만화를 접하게 되었다. 1913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조지 맥머너스(George McManus)의 히트작 <아빠 기르기(bringing up father)>는 일본의 잡지 『아사히 그라프(アサヒグラフ)』에 <아빠 기르기(親爺教育)>로 번역되어 1923년에 소개되었다. <아빠 기르기>는 1913년 1월 12일부터 킹 피쳐스(King Features)에서 미국 전역에 배급하며 큰 인기를 얻은 우스개 만화. 이밖에 같은 잡지에 영국 《더 데일리 미러(The Daily Mirror)》에 연재된 <핍, 스쿽과 윌프레도(Pip, Squeak and wilfred)>를 참조해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를 등장시킨 <쇼우짱의 모험(正チャンの冒険)>도 연재되었다. 1924년 3월 31일 《시대일보》에 미국 조지 맥머너스의 만화 <신혼부부와 그들의 아기(The newlyweds and their baby)>를 번안한 만화 <엉석바지>가 한 달간 연재되었다. 1913년 미국에서 연재되기 시작해 인기를 얻은 우스개 만화가 10년 만에 일본에 소개되고, 바로 1년 뒤 한국에 소개될 정도였다. 미국과 일본의 우스개 만화는 1924년 10월 13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심산 노수현의 우스개 만화 <멍텅구리>를 낳으며 20세기 초반 근대만화를 화려하게 개화시킨다. <멍텅구리>는 김동성이 기획하고, 이상협이 이야기, 노수현이 그림을 맡았다. 놀랍게도 한국의 첫 오락만화가 조직적인 분업에 의해 기획, 진행된 것이다.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우스개 만화였다. 미국이나 일본의 신문 만화를 한국에 적용해 경성의 모던보이들이 보여주는 허세, 말썽 등을 우습게 풀어냈다. 주인공 최멍텅과 윤바람은 작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 ‘멍청’하거나 ‘바람’ 피는 모던보이들. 그리고 이와 대응하는 여자 주인공 신옥매는 미모의 기생이다. 모던보이와 기생의 조합은 식민지 근대의 서글픈 표정의 또 다른 모습이다. <멍텅구리>는 ‘헛물켜기’를 시작으로 ‘련애생활(연애생활), 자작자급, 가뎐생활(가정생활), 세계일주’ 등으로 시리즈를 계속 이어나갔으며 모두 192회나 연재되었다.

△ 멍텅구리 헛물겨기(좌), 허풍선이 모험기담(우)

<멍텅구리>의 인기에 놀란 《동아일보》는 안석주의 <허풍선이 모험기담>를 1925년 1월 23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한다. 주인공 허풍선이 세계 일주를 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다룬 작품으로 ‘세계여행’이라는 근대의 로망이 펼쳐진 작품이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는지, 8월 17일부터 <멍텅구리>와 같은 형식(세로로 긴 4칸)을 채용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내세운 <엉터리>를 연재하며 <멍텅구리>의 인기에 맞불을 놓기도 했다. 이밖에 《시대일보》에서는 1925년 6월 30일부터 <구리귀신>(작가 미상)를 연재했고, 그 뒤를 이어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마리아의 반생>을 연재했다.
1924년 <멍텅구리>의 인기에 힘입어 시작된 신문 오락만화 경쟁으로 이후 우스개 만화는 신문, 잡지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1924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만화는 풍자만화에서, 우스개 캐릭터가 등장해 연속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우스개 만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9~20세기 초반 근대만화가 정착되던 시기를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풍자화에서 시작해 ①우스개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리즈물로 연속성을 갖고 ②시퀀스 단위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③칸과 말풍선이 등장하는 우스개 만화로 발전했다. 근대만화가 형식적으로 안착되는 가장 큰 동력은 결국 ‘웃음’이었다.
웃음은 캐릭터를 통해 발화되었다. 이들 캐릭터는 ①우스꽝스러운 표정과 행동을 보여줬고 이를 통해 ②중산층을 풍자했다. 집세를 받으러 오는 주인을 피해 땅바닥을 기어가다니지만, 머리에 중절모를 쓴 중산층 행세를 하며 돈만 생기면 술을 마시는 앨리 슬로퍼나, 빈민가에서 태어나 푸대자루와 같은 노란 옷을 입고 대머리에 엉뚱한 소리를 하는 옐로우 키드나, 석공과 세탁부였다가 일확천금을 벌어 안 어울리는 부자 노릇을 하는 직스와 매기 부부(<아빠 기르기>의 주인공)나, 멍청하거나 바람을 피우는 최멍텅과 윤바람까지, 당대 독자들을 웃기던 이 인물들은 이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풍자적으로 그려지기는 했지만 개인은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욕망을 선명하게 드러낸 인물들이다. 근대성이란 신과 종교에서 개인의 욕망으로 시선의 옮겨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근대만화를 정착시킨 우스개 만화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은 가장 첨예하게 근대성을 담아낸 인물들일 것이다.

우스개 만화에서 명랑만화의 등장
우스개 만화가 연 근대만화는 식민지 시대의 한계로 인해 오래도록 발전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 신문, 잡지가 폭발적으로 창간되었지만 경제상황으로 대부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며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창간된 많은 잡지에 만화가 연재되었다. 이들 만화는 신문의 우스개 만화가 정착시킨 네칸만화와 달리 한 페이지나 연속된 페이지로 이야기를 확장시켰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이들 만화가 ‘명랑만화’라 불렸다.
명랑(明朗)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지면이나 매체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소설과 만화 등에서 비슷한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경우 ‘명랑소설’이라는 명칭은 여성교양잡지 『새살림』의 <사랑의 용사>(1948년 7월), 『소년』의 <학교의 명물>(1948년 12월)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문수연은 <최요안의 명랑소설연구>에서 명랑소설이라는 장르명칭이 사용되게 된 경위에 대해 “명랑소설이란 개념은 당시 구미나 일본에서 들어 왔다라고 보다는 잡지사들이 기획하는 단계에서 독자적으로 붙인 명칭일 가능성 또한 높아 보인다”고 하며 “1950년대 중반 이후 명랑만화가 활성화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만화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차용했을 가능성”을 역으로 제기한다. 또한 오세란도 “한국문학사에서 청소년 대중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장르는 명랑소설류였다. 명랑소설이 등장한 시기는 한국전쟁 직후”라고 주장한다. 1955년 3월 창간한 대중잡지 『아리랑』(아리랑사)을 보면, 소설을 역사, 실화, 명랑 등의 세부장르로 구분해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1956년 2월 창간한 대중잡지의 명칭이 『명랑』(미경출판사)이기도 하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1950년대 ‘명랑’이라는 용어는 밝고 경쾌한 우스개를 포괄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때문에 해방 이후 여러 잡지에 연재된 우스개 만화들을 부를 때 편집자나 독자 모두 친숙한 ‘명랑만화’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스개 만화가 점차 대중성을 확보하며, 대중적 내러티브의 정형들(popular narrative formulas)을 만들고, 그 정형들이 ‘명랑만화’란 용어로 장르화된 것이다. 이후 명랑만화는 70-80년대 어린이 잡지와 만화잡지에 주로 연재되며 한국만화의 주류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가 1990년대에 극적으로 퇴장한다.

도심 주택지에 사는 독자들을 겨냥한 1970년대의 명랑만화
7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는 명랑만화다. 명랑만화는 다시 구분하면 잡지나 신문에 연재된 만화와 만화방용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화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일반적으로 ‘명랑만화’란 구분은 잡지나 신문에 연재된 어린이를 위한 우스개 만화를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어린이용 만화만이 아니더라도 어른들을 위한 명랑만화, 예를 들어 길창덕의 <순악질 여사>와 <순악질 남편>, 박수동의 <고인돌>, 정운경의 <가불도사> 같은 만화도 있었다. 우스개 캐릭터가 나오고, 매회 시리즈가 연재되는 작품들이다. 또한 만화방에도 명랑만화가 있었다. 60년대 만화방 만화의 연장선에서 박기준, 김기백, 하고명 등의 작가가 명랑만화를 출간했다.

△ 순악질여사(좌), 고인돌(중), 가불도사(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대를 대표하는 명랑만화는 잡지, 신문에 연재된 어린이용 명랑만화들이다. 물론 70년대 이전에도 명랑만화는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캐릭터를 중심에 내세우고 일상을 배경으로 여러 에피소드를 배치하여 독자들에게 웃음을 준 만화가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만화의 기틀을 닦은 김용환이나 김성환 등의 작품도 대부분 명랑만화에 가깝다. 특히 김성환의 어린이 만화인 <소케트군>이나 학원만화인 <꺼꾸리군 장다리군>은 70년대의 명랑만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50년대 순정만화의 캐릭터들이 화려한 장식미(반짝이는 눈망울, 틀어 올린 머리, 블론드 헤어 등)로 나가기 이전 작품인 권영섭의 <오손이 도손이>, <울밑에 선 봉선이>, <봉선이와 바둑이> 등의 작품은 보편적 캐릭터를 갖고, 일상적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는 명랑만화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70년대 새롭게 등장한 명랑만화는 도시의 어린이들이 주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비주체와 작품의 주인공을 일치시킨 것이다. 70년대 경제개발로 인해 도시는 크게 팽창되었고, 가족계획으로 소수의 어린이들이 태어났다. 도시에 사는 어린이들이 문화 소비의 주체로 등장했으며, 공동체적 민속문화 대신 도시를 배경으로 한 상업문화가 등장한 시기였다.

△ 꺼벙이와 꺼실이(좌), 신판보물섬(중), 선달이 여행기(우)

70년대 명랑만화를 대표하는 길창덕 만화를 보더라도, 대부분 공간은 새롭게 개발된 도심 골목이었다. 길창덕의 대표작인 <꺼벙이>나 <재동이>, <돌석이>, <이웃집 돌네>는 물론 심지어 보물섬을 찾아 모험을 하는 <신판 보물섬>과 전국 여행을 다니는 <선달이 여행기>도 마찬가지다. <선달이 여행기>는 『새소년』 부록으로 장편 이야기를 발표한 세 번째 타이틀이다. 첫 번째 타이틀은 1974년도부터 연재를 시작한 <신판 보물섬> 그리고 두 번째 타이틀이 1975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박달도사>였고, 세 번째 타이틀이 <선달이 여행기>다. 길창덕은 <선달이 여행기> 첫 페이지부터 70년대 명랑만화에서 변화한 공간을 상징하는 도심 주택가 골목 추격 시퀀스를 보여준다. 이 시퀀스는 신흥 주택가의 모습을 펼친 페이지에 하이앵글로 잡으며 시작된다. 주인공 선달이가 찬 공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책을 보던 ‘나최고’의 머리에 맞는다. 선달이는 전속력으로 도망가고, 나최고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말을 타고 쫓아간다. 6페이지 이후에는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 추격 시퀀스가 계속된다.
중산층 도심 주택지는 60년대 명랑만화와 달라진 70년대 명랑만화의 공간이다. 60년대의 대표적 명랑만화인 방영진의 <약동이와 영팔이>는 시골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서울에 올라와도 70년대 만화에서 볼 수 있는 신흥주택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70년대 신흥주택의 보급은 아파트가 아니라 주로 ‘집장수 집’이라 불리는 몇 세대가 함께 기거하는 단독주택이었다. 70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 주택 수 610여 만 호 중 아파트는 82만여 호로 13.4%에 불과했다. 도시지역이라고 해도 1985년까지 아파트의 비율은 23% 미만이었다. 골목과 단독주택은 집 안의 해프닝을 집 바깥으로 연계할 수 있다. 앞서 <선달이 여행기>의 오프닝 시퀀스처럼, 골목에서 날아온 축구공이 방 안으로 들어와 이후 추격이라는 해프닝으로 자연스럽게 연계될 수 있는 것이다.
70년대의 명랑만화의 공간적 배경이 도시 신흥 주택지라면, 주인공은 그곳에 나와 일상적으로 뛰어 노는 어린이들이다. 이 어린이들은 학교와 골목, 그리고 특별 이벤트로 창경궁 같은 고궁이나 방학 중에 시골에 놀러가는 일상의 생활을 보여주며 동질감을 극대화했다. 70년대 명랑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웃음의 일상성이다. 이를 정리하면,
①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 ②도심의 신흥 주택지 골목에서 ③벌이는 해프닝이 바로 70년대 명랑만화의 3대 핵심요소다. 
70년대 명랑만화는 월간 어린이잡지와 어린이 신문에 주로 연재되었는데, 이 중 월간 어린이잡지에 연재되는 명랑만화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월간 어린이잡지의 본지에 연재되는 명랑만화다. 월간 어린이잡지의 본지에 연재되는 명랑만화는 대개 페이지가 한정되어있고, 한 에피소드가 한 회에 끝낸다. 때문에 월 단위 학교 스케줄에 맞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방학, 여름방학, 3.1절이나 크리스마스 등 특징적인 행사에 맞춰 해프닝을 배치했다. 간혹 올림픽이나 에베레스트 정복과 같은 국가 이벤트를 활용하며 일상에서 웃음을 보여주었다. 매일 발행되는 어린이신문의 경우 주로 네칸 만화가 많았는데, 역시 일상적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 잡지와 신문 두 매체 공히 일상에 기초한 해프닝을 다루었고, 해프닝을 다루기 위해 강렬한 캐릭터의 특성을 지닌 주인공을 필요로 했다. 친근하면서도 한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고, 이름과 얼굴에 성격이 드러나는 명랑만화의 주인공들(꺼벙이, 고집세, 돌네, 돌석이, 탱구, 펄렁이, 두심이, 요철이 등)은 연재 매체의 성격에 맞추어 탄생한 것이다.

△ 요철발명왕(좌), 원시소년 똘비(우)

두 번째, 어린이 잡지의 부록으로 제공되는 명랑만화였다. 70년대 어린이 잡지는 잡지의 절반 정도 크기에 64페이지로 된 별책부록이 서너 권 제공되었다. 70년대 초반에는 주로 일본만화를 번안한 만화가 연재되었고, 중반 이후 명랑만화가 조금씩 연재되었다. 한번에 64페이지가 연재되었기 때문에 주로 3단 연출로 되어있으며, 잡지나 신문처럼 짤막한 옴니버스가 아니라 장편 연재작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부록으로 연재된 길창덕의 <신판 보물섬>은 고철이이가 우연히 보물지도를 찾아 친구 삼삼이와 함께 보물을 찾아 떠난다는 이야기다. 1권은 골목에서 벌어지는 70년대 명랑만화였다가, 2권 이후 모험만화로 방향을 선회하고, 3권은 무인도, 4권과 5권은 자석섬과 지하세계로 확장해 간다. 골목길표 명랑만화, 모험만화에 SF설정까지가 혼합되어있지만, 우스개 캐릭터를 내세워 웃음의 힘으로 끌고 간다. 신문수의 <원시소년 똘비>, 윤승운의 <요철발명왕>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일상성보다는 특별한 사건이 전면에 나선다. <원시소년 똘비>에서는 현대에서 원시시대로 들어가는 ‘타임슬립’이 등장하고, <요철발명왕>에서는 다양하고 엉뚱한 발명품이 나온다. 이처럼 별책부록 만화는 여유있는 연재 페이지를 기반으로 캐릭터와 서사가 결합된, 비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며 독자들에게 웃음을 전해주었다.

명랑만화, 한국만화 주류가 되어 1980년대를 맞이하다
80년대가 되어도 명랑만화는 그 힘을 잃지 않았다. 80년대는 흔히 한국만화의 르네상스 시기라고 부른다. 독점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인작가들을 통해 활력을 되찾은 만화방 만화와 1982년 10월 창간된 만화전문잡지인 『만화 보물섬』으로 대표되는, 새롭게 창간된 만화잡지를 통해 새로운 만화 부흥기를 맞이한다. 80년대에도 명랑만화는 잡지를 통해 독자들과 만난다. 『만화 보물섬』은 70년대 메인스트림이었던 명랑만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70년대 데뷔한 작가들의 작품을 배치해 새로운 장르만화를 육성했다. 창간호의 연재 작품의 전체 라인업을 보자. 

스포츠만화 <태풍의 다이아몬드>(허영만)
첩보반공만화 <흑점>(신영식)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극화 <검객 스카라무슈>(이현세)
과학만화 <부력의 비밀>(황석)
SF만화 <우주특공대>(고유성)
역사만화<승전고를 올려라>(한재규)
명랑만화<다부지>(길창덕)
인물만화 <인간, 처칠>(이성박)
추리만화 <아마죤의 비밀>(코난 도일, 백영민)
영화를 번안한 SF만화 (채일병)
순정학원물 <잃어버린 계절>(이상무)
명랑만화 <맹꽁이 서당>(윤승운)
순정만화 <빨강머리 앤>(정영숙)
명랑만화 <고봉이와 페페>(김영하)
역사극화 <소년 수호지>(강철수)
학습만화 <두더지 작전>(백민재)
인물만화 <무쇠장군 임경업>(구석봉, 최철봉)
동물만화 <카람포우의 로보>(시이튼, 이향원)
스포츠 만화 <그라운드의 표범>(김철호)
추리만화 <20가지 얼굴의 사나이>(모리스 르블랑, 이우정)
프랑스 만화로 모험만화 <땡땡>(에르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만화가 명랑만화다. <다부지>, <맹꽁이 서당>, <고봉이와 페페>까지 세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70년대 명랑만화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우스개 캐릭터가 등장하는 명랑만화이지만, <다부지>를 빼고는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준다. <맹꽁이 서당>(초반부는 전형적 명랑만화였다가 나중에 학습형 명랑만화로 변화한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며, <고봉이와 페페>는 모험만화에 가깝다. 즉, <다부지>만 70년대 명랑만화의 3대 핵심요소(
①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 ②도심의 신흥 주택지 골목에서 ③벌이는 해프닝)를 갖고 있는 작품이라는 말이다. <맹꽁이 서당>과 <고봉이와 페페>를 보면, 80년대 명랑만화가 새로운 장르와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추가로 연재에 들어간 작품들을 보면, 이런 특징은 보다 명확해 진다. 

△ 맹꽁이 서당(좌), 고봉이와 페페(우)

1983년 4월부터 10년간 『만화 보물섬』에 연재된 90년대를 대표하는 명랑만화인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는 70년대 명랑만화의 3대 요소를 갖추고 시작했다. 그런데, <아기공룡 둘리>를 비롯한 김수정의 명랑만화는 70년대 작품과 결정적 차이는 대사의 재미다. 70년대의 명랑만화는 ‘대사’보다는 ‘상황’에서 웃음을 유발했다. 앞서 소개한 <선달이 여행기>의 오프닝 추격 시퀀스처럼, 골목에서 축구를 하다 유리창을 깬 범인을 잡겠다고 카우보이 복장을 입고, ‘말’을 타고 추격을 한다. 이것도 황당한데, 도망가는 선달이는 물 건너, 바다 넘어 도망간다. 70년대의 대표적 명랑만화 작가인 이정문의 ‘심술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인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행동이나 상황을 과장되게 풀어가며 웃음을 주는 것이 70년대 명랑만화의 전형이다. 이런 과장된 상황 대신 김수정은 탁월한 대사와 캐릭터의 표정연기를 활용한다. 하종원의 “만화적 재미는 ‘만화판의 김수현’이라고 칭해질 만큼 뛰어난 작가의 언어구사력에 기인한다. 평범한 언어도 적절히 사용하고 상황에 맞춰 절묘히 안배함으로써 살아 있는 대사를 만드는 예의 뛰어난 재주가 사람들에게 재미를 준다.”고 김수정의 만화를 평가할 정도다. 『만화 보물섬』에 연재된 김동화의 <요정핑크>(1985)도 70년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명랑만화다. <아기공룡 둘리>가 70년대의 명랑만화를 계승하며, 새로운 특징들을 추가했다면, <요정핑크>는 소녀취향만화와 소년취향만화를 뒤섞은 융합형 작품이다.
1985년 12월에 창간된 성인만화잡지 『만화광장』은 장단편의 만화와 기획기사, 평론 등이 골고루 균형을 이룬 잡지였다. 성인만화잡지였지만 역시 명랑만화가 빠지지 않았다. 창간호를 보면, 윤승운 <이사관의 덕행>, 김수정 <요즘 여자들>, 정운경 <아내는 요술쟁이>, 이정문 <심술족>, 박수동 <고인돌 야사>, 윤영옥 <고라니 선생>, 김삼 <신판 가루지기 타령>이 연재되었다. 이들 명랑만화는 대부분 70년대 성인만화를 통해 숙성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이후 『만화광장』은 점차 명랑만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며 리얼리즘 극화, 장르극화 등을 중심에 놓게 된다. 『만화광장』을 통한 성인만화의 가능성은 1987년 창간된 『주간만화』로 이어졌다. 주간지로 창간된 『주간만화』는 『만화광장』에 비해 극화의 비중을 높여 명랑만화를 찾기 힘들다. 윤필의 <졸부열전>과 같은 두세 페이지의 세태풍자만화, 이로마의 4컷 만화, 김마정, 박문윤 등의 짧은 만화정도였다. 창간호를 비교해 보면, 『만화광장』에 비해 명랑만화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좌 부터) 아기공룡 둘리, 아리아리 동동, 요정핑크, 미스터손

『만화 보물섬』의 성공은 1988년 8월 15일 『만화왕국』(예음)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만화왕국』은 허영만 <미스터손>, 이두호 <머털도사와 또매형>, 김세영·김재원 <우주팔괴>, 김동화 <꼬마공 뽈비>, 김형배 <고독한 레인저>, 고행석 <아카루카의 불청객>, 이진주 <소녀전사 토리>, 김수정 <아리아라 동동>, 이우정 <첩보원 보바>, 조주청 <가짜친구 진짜친구>, 김영하 <둔갑이>, 이향원 <천방지축 요절권>, 손상헌 <타잔과 개구쟁이들>, 최신오 <파이브 스타>, 홍승모 <두리두리 우리 두리>, 윤준환 <빵돌이>, 김동아 <백팔백구>등의 작품이 창간호에 수록되어있다. 허영만, 이두호, 김동화, 김형배, 고행석, 이진주, 김수정, 이우정, 김영하, 이향원 등 검증된 스타 작가들을 포진시켜 『만화 보물섬』의 아성에 도전했다.

『만화 보물섬』 창간에서 6년이 지난 『만화왕국』의 창간호를 살펴보면, 80년대 명랑만화의 변화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만화왕국』에는 70년대 명랑만화의 핵심요소를 모두 지닌 작품은 윤준환의 <빵돌이>와 손상헌의 <타잔과 개구쟁이들> 정도다. 그러나 앞서 <아기공룡 둘리>와 <요정핑크>처럼 70년대 명랑만화를 계승한 융합형 명랑만화를 고르면 라인업이 다양하다. 허영만 <미스터손>, 김세영·김재원 <우주팔괴>, 김동화 <꼬마공 뽈비>, 고행석 <아카루카의 불청객>, 이진주 <소녀전사 토리>, 김수정 <아리아리 동동>, 조주청 <가짜친구 진짜친구>, 김영하 <둔갑이>, 이향원 <천방지축 요절권>등의 작품은 70년대 명랑만화를 계승해 다양한 장르와 융합된 80년대형 명랑만화들이다.

△ (좌 부터) 보물섬, 만화광장, 주간만화, 만화왕국

이렇게 네 편의 잡지를 분석해 보면 명랑만화의 시대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1982년 『만화 보물섬』, 1985년 『만화광장』은 70년대 명랑만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반면, 1987년 『주간만화』와 1988년 『만화왕국』은 70년대 명랑만화의 영향에서 거의 벗어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명랑만화는 60년대 탄생해 70년대 만화장르의 왕도를 차지했다. 경제개발, 중산층의 형성, 신흥주택지, 월간 소년잡지와 어린이 신문, 별책부록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명랑만화 왕도의 법칙을 만들어냈다. 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명랑만화는 80년대로 연결된다. 인기는 여전했으나, 시대는 점차 변화했다. 독자들은 일상의 이야기만이 아닌 좀 더 특별한 이야기를 원했다. 명랑만화는 다른 장르와 다양하게 융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도심 골목길이 사라지고, 어린이 독자들은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에 환호하며 명랑만화는 전면에서 퇴장해 버렸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우스개 만화에서 출발해 일상을 다룬 명랑만화로 진화한 한국형 만화장르인 명랑만화는 시대를 반영하며 독자들과 함께 했다.


※ 주)
1) 로저 새빈 <만화의 역사>, 2002, 글논그림밭, p12
2) 1896년 10월 25일자의 제목은 <노란꼬마와 그의 축음기(The Yellow Kid and his new phonograph)>였다. 이렇듯 여러 제목으로 연재가 되었다.
3) 아소 유카타(麻生豊)는 조지 맥머너스의 <아빠 기르기>에 영향을 받은 우스개 네칸만화 <논키나토우산(ノンキナトウサン)>를 1922년 11월 26일부터 석간 《호치신문(報知新聞)》에 연재하며 신문 네칸만화의 전형을 정착시킨다. <논키나토우산>은 실업자 주인공이 직장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경찰, 배우, 아나운서 등 다양한 직장에 취직해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만화다. <논키나토우산>이 인기를 끌자 아사히신문사는 1923년 4월 1일부터 《아사히 그라프(アサヒグラフ)》에 조지 맥머너스의 <아빠 기르기>를 <아빠 교육(
親爺教育)>이란 제목으로 번역, 연재했다.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아빠 기르기>는 우스개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주었고, 네칸의 구성, 말풍선의 활용과 같은 근대만화의 특징은 일본근대만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논키나토우산>은 한국의 네칸만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1924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멍텅구리 헛물켜기>도 조지 맥머너스의 <아빠 기르기>보다는 오히려 <논키나토우산>과 유사하다. 주인공 논키나토를 보면 김용환의 코주부와도 닮아보인다.
4)문수연 <최요안의 명랑소설 연구>, 인하대 대학원 석사, 2010, p17~18의 30번 각주
5)오세란 <한국청소년소설 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 2012, p99
6)윤주현 편, <한국의 주택>, 통계청, 2002, p51-56.
7)하종원, <김수정의 날자! 고도리>, <날자! 우리만화>, 교보문고, 2002,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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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

만화평론가, 서울웹툰아카데미(SWA) 이사장
웹툰자율규제위원회 위원
前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 前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前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정책그룹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