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참가단이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FIBD, 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ee)에서 수행해야할 대부분의 일정이 끝났다. 참가단은 앙굴렘의 이모저모를 확인하기 위해 관광객처럼 길게 늘어선 채 도시를 탐했다. 앙굴렘은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파리에서 442km 떨어져있고 와인 산지로 유명한 보르도에서 16km 떨어져있다. 로마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고도로 앙구누아 지방의 역사적 중심도시이다. 제지업으로 번영을 누리기도 했지만 쇠락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만화와는 별 상관없는 도시였지만 세계 3대 만화축제로 손꼽히는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이 열린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있는 중세도시에 현대적 만화 이미지가 거리 곳곳을 매우고 도시 외벽은 대형 만화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의 상점이 만화를 상품 진열에 활용한다. 서점이나 기념품 상점은 물론이고 여행사, 부동산, 병원, 약국 등 업종과 상관없이 만화가 함께한다. 앙굴렘에 유학 와 있는 한국 학생에게 물어보니 행사 기간만 이런 것은 아니란다. 앙굴렘시는 프랑스 정부가 운영하는 국제만화영상단지와 함께 작가의 집, 만화관련 전문학교와 석박사 과정이 있는 대학 등이 밀집해 있다. 도시 전체가 만화와 관계하고 있는 곳이다. 이 같은 변화는 프랑스 정부가 오래전부터 추진해왔던 수도권 과밀 방지와 지방분권화 정책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 정부가 어느 날 갑자기 작은 도시 앙굴렘을 만화도시로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앙굴렘을 세계의 만화도시로 이끈 이는 이 지역 출신의 만화팬이자 시의원이었던 프랑시스 그루(Francis Groux, 1934~)이다. 연애시절부터 아내와 함께 만화를 즐겼던 그루는 1964년 SOCERLID(Societe Civile d’Etude et de Recherche des Litteratures Dessinees)를 결성했다. 그림문학시민연구회로 번역되는 이 단체는 일종의 만화애호가 모임으로 시민들이 그린 만화나 만화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1969년 만화주간(Une Semaine de la Bande Dessinee) 행사를 열기도 한 그루는 1971년 앙굴렘 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정책 결정권을 지니게 된 그루는 1972년 앙굴렘에서 천만 개의 영상(Dix Millions d’Images)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 전시가 대성공을 거두자 그루는 만화평론가이자 편집자였던 클로드 모리테르니(Claude Moliterni)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루카만화축제를 참관한다.
△ 행사 진행을 하고 있는 프랑시스 그루
△ 1985년 앙굴렘을 방문한 미테랑 대통령
큰 감명을 받은 그루는 1974년 앙굴렘시립박물관에서 국제만화살롱(Salon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ee)이라는 이름의 상설 만화 전시를 개최했다(한상정,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을 탐하다, 부천만화정보센터, 2007). 이 전시가 지금의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로 발전했다. 앙굴렘 시의 전폭적 지지와 80년대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가 대중문화산업에 지원을 집중하면서 1984년 문화부 장관 자끄 랑은 앙굴렘에 국립만화영상센터(CNBDI, Center National de la Bande Dessinee et de l`Image )를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후 1991년 CNBDI가 설립되면서 앙굴렘은 세계인의 만화도시로 거듭 났다.
한국과 앙굴렘의 인연은 1983년 서울미술관과 앙굴렘미술관과의 교류전으로부터 시작됐다. 민정기, 임옥상 등 당대의 화가들이 앙굴렘에서 교류전을 열고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재불화가들을 통해 앙굴렘의 존재가 만화계에 알려졌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세계화 정책의 일환으로 문화산업발전방안이 마련됐다. 규제 중심의 만화정책이 이 시기부터 지원 중심으로 바뀌었다. 1994년 한국 만화가들이 앙굴렘을 찾았고 1995년 정부 주도하에 제1회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수상작들이 한국을 찾았다. 앙굴렘과 한국만화계는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1996년 정부는 ‘만화육성발전발안’을 발표하면서 ‘역대 문체부의 사업가운데 흑자를 낸 사업은 만화페스티벌이 유일(경향신문, 1996.01.20.)’하다며 프랑스 앙굴렘 같은 만화산업 거점도시를 만들겠다고 했다.
정부의 선언에 가장 먼저 움직인 쪽은 민선2기 시장 체제 하에 있던 부천시였다. 원혜영 시장은 일종의 도시재생 사업 일환으로 부천을 문화도시로 만들겠다고 했고 그 모델로 프랑스 지방 분권화와 도시 재생 사업의 상징적 도시 중 하나인 앙굴렘을 꼽았다. 이 지역 출신 만화가 조관제의 역할도 컸다. 원혜영 시장과 조관제를 비롯한 만화가 일행도 앙굴렘을 찾았다. 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김동화 이사장도 그 시절을 함께한 만화가 중 한명이었다. 김동화 이사장은 그 시절의 기대와 희망을 소상하게 기억해 냈다. 1998년 CNBDI를 모델로 부천만화정보센터가 설립되고 FIBD를 모델로 부천만화축제가, 만화의 집을 모델로 만화창작스튜디오 등이 만들어졌다. 이 같은 정책 기조는 원혜영 시장이 국회의원 재직 시 보좌관을 지냈고 시장 재임 중에는 시의원으로 활동한 현 김만수 부천시장으로 이어졌다.
1998년으로부터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만화계와 부천시는 소박했던 부천만화정보센터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으로 키웠다. 진흥원이 보유한 만화비즈니스센터와 만화박물관 건물은 한국 최대 규모의 만화산업단지가 됐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부천시가 행정을 관리하고 만화계 인사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수립한 정책을 49명의 조직원이 만화계와 시민의 참여를 통해 실행한다. 2017년 기준 예산은 175억 원. 국비 47%, 시비가 출연금과 보조금 포함 38%이다. 만화가와 관련 기업이 입주해 있는 만화비즈니스센터와 만화창작스튜디오에는 작가 75팀(295명), 기업 16개사(105명), 관련단체 3곳(24명)이 입주해있다. 만화박물관 수장고에는 만화원고 6천 여 장을 비롯해 2만1천점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고 도서관에는 2십7만여 권의 장서가 수집되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3점과 2십7만 건의 디지털아카이브도 구축됐다. 20회를 맞이한 부천국제만화축제는 매년 10만 여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고 10여 개 국 이상에서 100여 업체가 참여해 다양한 전시, 페어, 컨퍼런스, 이벤트 등을 연다. 앙굴렘 처럼 유네스코 창의도시에 지정되기도 했고 도시 곳곳이 만화벽화와 이미지로 가득하다. 한국 최고의 만화도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축제가 한창인 앙굴렘에 서있자니 인구 90만의 만화도시 부천이 인구 5만의 앙굴렘보다 작게 느껴졌다. 부족하지 않다 자부했지만 많지 않았다.
△ CIBDI 전경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경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는 우리만화의 위상 때문일까? 유럽과 미주를 돌아 아시아 만화까지 끌어안고 있는 앙굴렘의 포용력 때문일까?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현대를 수용하고자 하는 그들의 견고한 철학 때문일까? 모든 것이 컸고 모든 것들에서 작았다. 그중 가장 컸던 것은 만화도시 앙굴렘을 이끌고 있는 구조와 체계였다. 앙굴렘의 동력은 누가 뭐라 해도 정부의 만화육성기관인 국립만화영상센터이다. 국립만화영상센터는 오랜 기간 동안 앙굴렘시가 조성한 만화도시의 여러 기능과 요소들을 하나로 묶고 몇몇 기관을 통합했다.
명칭도 국제만화영상단지(CIBDI, Cite Internationale de la Bande Dessinee et de l’Image)로 바꿨다. 집중력이 생겼고 규모가 달라졌다. 하지만 축제조직위인 FIBD는 철저히 민간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뒀다. 중앙정부의 지원과 지방정부의 중재, 민간(산업계, 학계)의 조화로운 발전 의지가 모일 수 있도록 했다. CIBDI 건물은 외형만으로도 차이에 대한 인정과 역할에 대한 존중, 옛것과 새것이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함께하는 구조와 체계. 앙굴렘 참가단은 앙굴렘 도시 둘러보기를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파리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서로 또는 같이 앙굴렘을 이야기했다. 만화의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구조와 체계.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존중’일 것이다. 한국의 만화도시 부천, 한국의 만화영상단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느끼고 싶은 품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