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는 영웅을 부른다.’고 한다. 삼국지와 같은 동양의 영웅담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망토 입은 슈퍼히어로들도 난세를 배경으로 태어났다. 여기서 난세란 21세기 초중반을 뒤흔들었단 양차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전 세계를 침체의 늪에 빠뜨렸다. 기업들은 연이어 도산했고 실업자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30년대 싸구려 펄프 잡지 속의 영웅들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주인공은 친구들과 세계를 모험하는 청동의 사나이 ‘닥 새비지’와 악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시무시한 웃음소리의 주인공 ‘섀도우’였다. 어떤 위기도 헤쳐 나가는 영웅들의 모험담은 좌절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던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었다. 펄프 소설은 영웅들의 모험담 외에도 로맨스, 공포, 추리, 판타지, SF 등 주제가 다양했다. 그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이 존재하지 않았다. 스마트폰 대신에 책이 있었고, 텔레비전 대신에 라디오가 있어서 펄프 소설의 이야기들을 극화한 라디오 드라마들이 전파를 타고 전해지면 그걸 듣기 위해 라디오 앞에 모여 앉곤 했다. ‘섀도우’는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펄프 잡지가 인기를 끌자 잡지사들은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매력적인 커버를 만들고자 애썼다. 신문 가판대 위에서 가장 도드라져 보일 커버를 그려야 시장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잡지사들은 최고의 화가들을 고용했고, 유명 잡지의 커버를 그리거나 나아가서는 광고계로 진출하는 것은 화가 지망생들의 꿈이기도 했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쓰는 사람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필요한 시장이 생겨났고, 그 틈에서 만화 잡지가 태어난다. 초창기 만화 잡지는 일간 신문들의 일요일자 특별판에 부록으로 한 편씩 실리던 만화들을 따로 모아서 묶은 형태였고, 그나마도 판매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비누회사에서 비누를 팔기위한 판촉물로 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자 너도나도 만화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쟁이 붙다보니 신문 연재만화의 콘텐츠가 부족하기도 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발굴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만화 잡지 출판사들은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콘텐츠를 만들어줄 작가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미 펄프 소설 분야에서 특히 SF물에 있어서는 1920년대부터 팬덤이 형성이 되어 있었다. 전화도 제대로 없던 시대에 팬들은 편지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락하고 몇 시간씩 차를 타고 가 서로 만나고 자신들의 습작을 모아 팬 매거진을 출판하여 나누기도 하였다. 이 커뮤니티의 리더들은 풍부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펄프 소설 작가들과 출판사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일도 하였다. 그러면서 20년대 SF 팬덤을 형성했던 10대 소년들이 자라 30년대 40년대 슈퍼히어로 만화의 시대가 열릴 때 편집자로 작가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클리블랜드에 살던 제리 시겔과 조 슈스터라는 이름의 두 소년도 비슷한 케이스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너무나도 좋아하던 펄프 잡지 속의 주인공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슈퍼맨이라는 초인의 이야기를 그렸고, 그것을 신문 연재만화로 내기 위해서 전국의 모든 신문사에 보내었지만 모조리 거절을 당한다. 그러다 천운으로 독립 콘텐츠를 필요로 하던 만화 잡지 편집자와 연락이 닿아 기회를 얻고, 신문 연재용으로 그렸던 만화를 만화책용으로 재편집해 낸 것이 바로 <액션 코믹스 1호>의 슈퍼맨이었다.

이들이 그린 슈퍼맨은 오늘날 슈퍼히어로의 필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이중의 삶, 몸에 쫙 붙는 스판덱스 코스튬, 히어로의 상징이 되는 특별한 문양, 펄럭이는 망토, 멋진 여자 친구까지. 그 모든 것이 70여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들이 계승하고 있는 유산이다.
슈퍼맨에는 당시 1차 세계대전을 겪고 폐허로 변해버린 유럽을 등지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왔던 이민자들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었다. 슈퍼맨은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었고, 고향 행성 크립톤은 완전히 파괴되어서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대신 슈퍼맨은 기자 클라크 켄트로서, 또 지구를 구하는 히어로 슈퍼맨으로서 지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했다. 또한 슈퍼맨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고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전쟁을 막는 것으로 그려졌다. <액션 코믹스 1호>에서 슈퍼맨은 무기를 팔아먹기 위해서 정치가들에게 전쟁을 벌이도록 로비하던 무기상을 붙잡아 전쟁터 한복판에 던져놓고 전쟁의 참혹함과 공포를 직접 겪게 만든다. 그 이야기는 슈퍼맨 탄생 불과 1년 전, 화가 피카소가 스페인 북부의 도시 게르니카에서 프랑코군의 요청을 받고 무차별 폭격을 감행한 독일 비행기들로 인해 수 천 명의 사람이 참혹하게 살해당해야 했던 일을 그림으로 그려 전쟁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던 것과 같은 전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담고 있었다.
선두주자가 새로운 시장의 문을 열면 곧바로 후발주자들이 나타나 경쟁을 시작하는 법이다. 슈퍼맨이 크게 인기를 끌자 곧이어 수많은 후발 히어로들이 나타나 맹추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슈퍼맨을 시장에 내어놓은 DC 코믹스는 슈퍼맨과 전혀 다른 히어로들을 꾸준히 내어놓으면서 시장의 개척자이자 선두주자의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 중에 슈퍼맨과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속성을 갖고 있는 한 명의 주인공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그가 바로 슈퍼맨 등장 1년 후 DC의 간판스타로 떠오른 배트맨이었다.

배트맨은 범죄자에게 부모를 잃은 소년이었고, 자신과 같은 비극을 겪는 아이가 없도록 범죄와 영원한 싸움을 벌일 것을 맹세했다. 1930년대 미국의 도시는 배트맨의 배경이 되는 고담시 처럼 무법지대였다. 갱단이 창궐하는가 하면, 존 딜린저 같은 은행 강도가 나타나서 은행을 터는데, 은행을 공황의 원흉으로 지탄하고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딜린저의 행각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면서 영화계 등에서는 영웅시된 갱단과 무법자들 부패한 관료들과 싸우는 영화들이 만들어져 큰 인기를 얻었다. 미국 정부에서는 FBI를 만들고 범죄와의 전쟁을 시작하였고, 갱단에게 빼앗긴 영웅의 롤모델 자리를 되찾으려 하였다. 그러면서 FBI 요원들과 경찰들을 영웅으로 삼은 소설이나 영화도 많이 등장했다. 범죄의 도시 고담을 배경으로 경찰국장 제임스 고든과 협력하여 범죄자들을 물리치는 자경단 배트맨의 이야기는 이렇게 갱단과 정부가 벌였던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슈퍼맨도 배트맨도 단순히 만화 캐릭터가 아니라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갈망하던 영웅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캐릭터였다.
배트맨은 슈퍼히어로 역사에서 또 하나의 큰 진전을 이루어내었다. 슈퍼히어로의 소년 조수, 사이드킥의 개념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당시에 만화 제작자들이 본 주요 독자층의 연령대는 사실 그렇게 낮지가 않았지만 실제로 만화책을 구매한 독자들은 어린 소년들이 많았다. 슈퍼맨과 배트맨 같은 주인공들은 아주 인기가 있었지만, 실제 독자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성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배트맨 만화에서는 로빈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소년들로 하여금 어른들의 세계에 좀 더 친밀하게 닿을 수 있도록 하였다.

슈퍼맨의 경우는 어른 사회의 이야기를 하고 어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어른의 영웅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초능력의 기원에 관한 것일 뿐이었고, 어린 시절이 그의 영웅심을 형성하는 데 어떤 과정을 제공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슈퍼맨이라는 어른 히어로 이면에는 클라크 켄트가 있었고, 클라크 켄트는 기자이자 어른이었다. 하지만 배트맨은 슈퍼맨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배트맨의 이면에 있는 인물은 겉으로는 막대한 재력가이자 어른인 브루스 웨인이 아니라 어린 시절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한 직후 촛불 앞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맹세하던 소년 브루스 웨인이었다. 그러니까 배트맨은 어른의 껍질만 쓰고 있을 뿐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래서 배트맨의 주변에는 로빈이라는 사이드킥을 두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로빈은 외로운 소년을 속에 담고 있는 배트맨에게 가족이자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 사이드킥의 개념은 마블 코믹스 등 다른 출판사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버키, 휴먼토치와 토로 식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처음에는 군 입대를 거부당했던 약골이었고, 휴먼토치는 엄청난 화염을 내뿜는다는 위험성 때문에 깊은 땅속에 파묻혀야 했던 안드로이드였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고 돕는 소년 조력자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
어린 독자들에게 슈퍼맨이라는 존재가 내가 닮고 싶은 롤모델이라고 한다면, 배트맨은 사이드킥 로빈을 통해서 자신들과 놀아주는 삼촌의 이미지였다. 삼촌의 손을 잡고서 어른 세계를 체험하던 어린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호자 없이 혼자 힘으로 어른 세계에 부딪혀보고 싶어 하게 된다. 그런 열망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캐릭터가 캡틴 마블이었다. 캡틴 마블의 주인공 빌리 뱃슨은 고아 출신이지만 밝게 사는 어린이로 어느 날 마법사를 만나 신화 속 영웅들의 힘을 얻고 캡틴 마블이 된다. 당시 캡틴 마블의 인기는 슈퍼맨을 뛰어넘을 정도로 전설적이었다. 당시 독보적인 1위를 달리던 DC 코믹스는 웬만해서는 자사의 히어로들을 모방한 후발주자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캡틴 마블이 슈퍼맨의 인기를 추월해버리자 슈퍼맨을 모방했다고 소송을 걸며 견제해야 할 정도였다. 캡틴 마블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국에서는 전반적인 만화산업의 침체 등을 이유로 출판이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마블맨’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여 그 명맥을 이어나갈 정도였다.

질주하는 과학 사회에 다른 사랑과 용서를 제시한 원더우먼과 마블 히어로 이렇게 남성 영웅들과 소년 영웅들이 속속 등장하는 가운데, 원더우먼과 같은 여성 영웅들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남성 영웅들과 소년 영웅, 여성 영웅 사이에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슈퍼맨, 배트맨, 캡틴 아메리카, 네이머, 휴먼토치 같은 남성 영웅들은 과학에 기반을 둔 히어로였다. 그 중의 일부는 외계인, 해저인, 안드로이드였기 때문에 인간과 다른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배트맨은 첨단 과학 장비와 오랜 수련으로 단련한 신체를 통해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갖고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슈퍼 솔저 혈청을 마셔서 강해질 수 있었다. 그들의 가진 초능력에는 어떤 식으로든 과학적인 설명이 들어갔다. 하지만 소년 영웅인 캡틴 마블과 여성 영웅인 원더우먼은 마법과 신화의 세계를 통해서 초능력을 얻었다.
1941년에 탄생한 원더우먼은 여전사들의 부족인 아마존의 공주 출신이다. 아마존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남자들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고 평화로운 문명을 건설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남자들을 뛰어넘는 문화력과 전투력을 갖고 있었지만, 낙원의 섬 테미스키라 밖으로 나가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려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섬에 한 남자가 나타나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해 준다. 바깥 세상에 흥미를 느낀 아마존의 공주 다이애나는 그를 따라 남자들의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원더우먼은 그렇게 남성들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문제 해결 방식은 남성 영웅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차가운 이성과 과학을 무기로 삼는 대신 따뜻한 감성과 사랑과 진실의 밧줄을 무기로 삼아 세상을 변화시켜나가려 하였다. 독자들은 거기에 매료되었다.

한편 마블 코믹스는 휴먼토치와 네이머라는 독특한 히어로들을 내어놓으며 DC 코믹스를 맹추격했다. 이들은 DC의 남성 히어로, 소년 히어로, 여성 히어로들과는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다.
1939년 <마블 코믹스 1호>에서 처음 등장한 휴먼토치는 겉모습만 인간인 안드로이드 로봇으로 커버 이미지를 보면 불꽃에 휩싸인 휴먼토치가 철문을 뚫고 나오고 있고, 밖에 있던 과학자가 휴먼토치의 가슴에 총을 발사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 휴먼토치의 등장은 인간에게 위협으로 그려졌다. 네이머도 마찬가지로, 본래는 영웅의 능력을 보유하고는 있지만 정확히는 인간의 적인 존재였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해저 세계 아틀란티스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돌렸으며, 심지어는 뉴욕을 물로 없애버리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나는 불이요 하나는 물, 인간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가장 위대한 두 힘을 모티브로 삼은 마블의 히어로들은 그런 점에서 인간 사회 그 자체와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인간 사회는 그들을 거부하였고, 그들은 인간을 원망하면서도 결국은 인간을 보호해주는 길을 선택한다. DC 코믹스의 히어로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자들을 바른 길로 선도하는 일을 함으로써 히어로의 자리를 지킨다면, 마블의 히어로들은 자신을 미워하고 배척한 인간 사회를 용서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 영웅성을 드러낸다. 마블의 히어로들에게는 과학 문명이라는 잣대가 선을 그어놓은 현대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낙오자들, 과학 문명에 배척당한 자연의 아픔이 녹아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유산은 후대 마블 코믹스 캐릭터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마블은 도시와 과학 문명에서 소외당하고 희생당한 캐릭터들을 지속적으로 불러들여서 그들에게 ‘히어로’의 호칭을 나누어 주었다. 헐크, 스파이더맨, 데어데블, 엑스맨, 울버린 등 후대 수많은 마블 캐릭터들은 휴먼토치와 네이머의 뿌리에서 성장하게 된다.
40년대 초중반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상은 자연스럽게 슈퍼히어로들을 전쟁터로 이끌었다. 슈퍼맨, 원더우먼, 캡틴 아메리카 등 미국의 깃발을 코스튬으로 입고 있는 슈퍼히어로들이 나치의 잠수함과 탱크를 박살내고, 히틀러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는 광경은 통쾌함을 주었다.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나치를 무찌르는 슈퍼히어로의 만화책을 읽으면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고향으로 개선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만화의 인기는 급격하게 시들었다. 만화 팬들은 슈퍼히어로물보다는 로맨스, 호러, SF, 서부활극, 코메디 등을 선호했다. 그간 10여 년간 슈퍼히어로물의 주요 독자층이었던 소년들이 어느새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히 ‘폭력’과 ‘성’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이전의 시대가 당대가 원하는 히어로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인기를 얻었다면, 이제는 독자들 안에 새로이 생겨난 요구를 들어주는 만화들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런 변화에 가장 발 빠르게 대처한 곳이 EC 코믹스였다. EC는 여러 종류의 공포 만화들을 내어놓으면서 만화 시장에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면서 팬덤의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폭력의 묘사와 성적 묘사를 높이는 이러한 변화는 ‘만화의 주 독자층은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심리학자인 프레드릭 웨덤 박사는 ‘순수의 유혹’이라는 책을 내놓고 만화가 아이들의 정신 건강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하였다. 공격은 EC 코믹스의 공포 만화들을 넘어서서 그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재미있고 좋은 만화로 여겨지던 슈퍼히어로 만화에도 확대되었다. 웨덤 박사는 배트맨 만화를 보고 성인 남성이 소년과 동거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전통적인 가족이 아닌 남성 커플만의 가족을 미화하며 동성애를 부추기고 청소년에게 가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여성들만이 따로 살아가는 아마존 출신의 원더우먼 역시도 레즈비언이라고 지적받으면서 사실상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들이 아이들의 정신 건강을 해치는 암적인 존재로 치부되었다.
그 결과 1954년 9월에 설립된 만화 검열기관 CCA는 만화에서 ‘뱀파이어’, ‘좀비’, ‘과도한 폭력’, ‘경찰이나 국가기관 종사자들을 무시하는 표현’ 등을 금지시켰고, 수많은 만화 잡지들이 ‘폭력적’, ‘선정적’, ‘반정부적’이라는 이유로 폐간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도 배트맨 만화는 비정상적인 가족을 그리고 있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서 배트맨의 짝으로 배트우먼을, 로빈의 짝으로 배트걸을, 그리고 이 화목한 패밀리에 걸맞은 반려견으로 배트하운드까지 추가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만화의 침체는 단지 독자들이 만화에 대한 흥미를 잃고, 만화에 대한 가혹한 검열이 행해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화책 대신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안방을 차지한 것이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TV 드라마는 68%의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던 왈가닥 루시였고, 클레이턴 무어 주연의 ‘론 레인저’와 조지 리브스 주연의 ‘슈퍼맨의 모험’이 엎치락뒤치락하며 2위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만화 산업이 침체한 가운데서도 슈퍼맨은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서 인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한 줄기의 ‘섬광’이 어둠의 시대를 뒤흔들고 빛을 가져오는 일이 벌어졌다. 1956년 DC 코믹스에서는 40년대의 슈퍼히어로였던 플래시를 새로운 디자인과 정체성, 새로운 스토리로 재무장시켜 시장에 내놓는다. 이전 시대 DC 코믹스의 히어로팀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 그 멤버인 플래시, 그린랜턴 등을 기억하고 있던 1세대 독자들은 물론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2세대 독자들까지 새로운 히어로의 탄생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플래시에 뒤이어 새로운 그린랜턴과 아톰이 등장하였고, 곧이어 슈퍼걸, 리전 오브 슈퍼히어로즈 등 당대의 십대 팬들에 맞춘 십대 소년 소녀 히어로들도 등장하였으며, 마침내 1960년에는 DC의 간판급 성인 히어로들로 구성된 DC 최고의 팀 ‘저스티스 리그’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시대의 히어로들에겐 우선 지난 시대 히어로들이 메고 다니던 거창한 망토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지난 시대 히어로들이 대개는 선천적으로 초인이거나 고대의 존재에게 힘을 부여받았던 것에 비해서, 평범한 인간이 어느 날 과학과 관련된 사고를 겪거나 UFO 등을 통해 외계인과 접촉하면서 힘을 부여받는다는 설정으로 업데이트된다. 주인공의 직업도 이전 시대 대부분이 사건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언론인이 많았던 데 반하여, 새로운 시대에는 경찰, 비행기 조종사, 과학자 등 새로운 과학 기술을 빨리 접할 수 있는 직업들 위주로 구성이 되었다.
이제 슈퍼히어로들은 대공황과 이민자, 참전 군인들의 애환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들을 표상하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60년대 당시 세계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베를린 장벽을 중심으로 동서로 양분되어 있었고. 냉전 체제 속에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은 보이지 않는 첩보전을 벌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스파이들의 활약상은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1962년 영화 <닥터 노(살인 번호)>가 개봉하자 DC와 마블은 그것을 곧바로 만화책에 등장시켰다. 1963년 DC 코믹스는 <닥터 노>라는 이름의 만화를 만들었고, 마블은 1965년에 닉 퓨리를 첩보원으로 등장시켰다. 그 시대 텔레비전에는 첩보원 나폴레옹 솔로의 이야기를 담은 <맨 프롬 엉클>이 최고의 인기 드라마였다. 스파이들에 대한 관심은 비단 첩보 요원 히어로만을 낳은 것이 아니라, 만화 속에서 신체 강탈 능력을 사용하는 악당들 외계인들을 위협으로 그리게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우리는 달에 갈 것이라며 우주로의 진출을 선언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악기와 노래로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였다. 그런 가운데 마블 코믹스는 음악에서는 비틀즈, 소설에서는 반지의 제왕과 함께 60년대 3대 청년 문화의 하나로 군림하였다. 청년들은 반지의 제왕의 판타지 세계에 그려진 다양한 인종들의 연합을 인종차별 없는 세상, 나무 요정들의 도움을 자연 친화적인 삶, 절대반지의 파괴를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회복으로 받아들였는가 하면, 십대 모범생이면서도 늘 내면적인 갈등을 안고 살아가던 스파이더맨,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초록 괴물 헐크, 사회로부터 배척받은 아웃사이더들이면서도 자신들만의 그룹 안에서 또한 갈등을 벌여나가는 엑스맨, 전쟁상인이자 알코올중독자인 아이언맨, 전지전능한 신의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인 로키와 갈등하고 아버지 오딘과 갈등하며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던 토르 등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DC와 마블의 슈퍼히어로 만화들이 탄생한 40년대와 60년대를 소개하였다. 슈퍼히어로 만화들은 이후 꾸준하게 70년대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늘 그 시대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닉슨 대통령이 물러나자 미국은 물론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진실과 정의와 미국적 방식은 대체 어디 있는가는 물음이 던지면서 DC에서는 우주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그린랜턴이 사회주의자 캐릭터인 그린 애로우와 함께 과연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은 어디있는가의 해답을 찾아 미국 전체를 여행하였고, 배트맨 만화에서는 라스 알굴이라는 악당이 등장해 기존 사회 체제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체제로 교체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다크나이트의 시대를 열었다. 마블에서는 다정한 이웃 스파이더맨에게 절친한 친구를 마약에 빼앗기고, 소중한 연인을 악인의 손에 잃는 비극을 선사하면서 모든 꿈이 사라진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마음을 대변했다. 급기야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 국기의 모양을 가진 옷을 벗어던져버린다. 슈퍼히어로물의 인기가 다시금 급락하는 시대가 찾아오자 마블은 법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강한 자가 승리하는 야만의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코난’, ‘화성의 존 카터’ 등의 고전 소설들을 만화화하면서 법과 정의가 무너진 당시 미국 사회를 이야기하며 만화의 새 부흥기를 노렸었다.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어 2000년대에 들어서 911의 충격, 그로 인한 애국법 제정, 국민에 대한 감시와 도청,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이루어졌던 끊임없는 개인정부 유출 사건 등 역시도 똑같이 만화에 반영되었다. 마블과 DC는 2000년대 중반 <인피닛 크라이시스>와 <시빌워> 등을 통하여 수많은 히어로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하는 대사건들과 그 충격을 딛고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가해자들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는 히어로들의 모습, 히어로들의 신상 정보가 유출되고 그것이 악당의 손에 들어가 히어로들의 가족이 끔찍한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 누구도 믿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거대한 감시 위성을 통하여 모든 초인을 감시하기로 하는 위험한 결정 등 시대적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담아내었다.
그리고 최근 다문화 사회에서 불거지는 여러 문제들을 앞에 두고 마블은 적극적으로 여성, 무슬림, 성소수자, 10대 청소년, 유색인종 등의 다양한 구성을 가진 히어로팀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마블의 대표 히어로인 미즈 마블은 10대 소녀이면서 무슬림이었고, 이제 마블의 아이언맨은 10대 흑인 소녀이며, 스파이더맨 또한 10대 흑인 소년. 그리고 DC와 마블의 수많은 캐릭터들이 하나 둘 씩 자신만의 성정체성을 당당하게 고백하고 나서고 있다.
슈퍼히어로 만화가 가진 저력은 단순히 멋진 디자인과 화려한 그림에 있지 않고 캐릭터를 독자들이 가진 시대적 고민들을 적극적으로 담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로 개발하고, 그 캐릭터를 독자들과 함께 성장시키며 한 세대를 넘어 그 다음 세대까지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키우는 데에 있다. 동시대를 문제를 고민하고 동질감을 갖게 해 주는 인물로서의 캐릭터, 사실 그것이 디자인과 화려함을 뛰어넘은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이 가진 진정한 저력이다. 어느새 만화의 슈퍼히어로들의 이야기는 한 세기를 반영하는 하나의 신화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만화Zine 독자들을 위한 추천 만화와 20자 평! 1. <앤트맨 두 번 사는 남자>
글 닉 스펜서 | 그림 라몬 로자나스, 조던 보이드 | 역자 이규원 | 시공사
>> 역시 최고의 히어로는 우리 아빠인 것 같다. 쥐뿔도 없는 개털 아빠의 눈물 나는 딸 사랑.
2. <세븐 솔저스 오브 빅토리>
글 그랜트 모리슨 | 그림 J.H. 윌리엄스 3세 | 역자 이규원 | 시공사
>> 헌 캐릭터 가져와 새 캐릭터 줄게. 오직 그랜트 모리슨만이 가능한 상상력.
3. <이리더머블 앤트맨>
글 로버트 커크먼 | 그림 필 헤스터 | 역자 이규원 | 시공사
>> 구제불능 히어로. 보는 내내 갑갑하고 답답하다. 그래서 책장에서 손을 뗄 수 없다.
4. <플래시포인트>
글 제프 존스 | 그림 앤디 쿠버트 | 역자 이규원 | 시공사
>> DC 세계의 가장 멋진 변주곡. 스핀 오프까지 더 나왔으면 하는 시리즈.
5. <배트맨 악마의 십자가>
글/그림 조지 프랫 | 역자 김지선 | 세미콜론
>> DC 세계의 가장 멋진 변주곡. 스핀 오프까지 더 나왔으면 하는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