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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만화 팬을 사로잡은 여성만화가들③ 우루시바라 유키: 새로운 세계를 펼쳐내다

소년만화 팬을 사로잡은 여성만화가, 그 두 번째로 소개할 작가는 우루시바라 유키다. 그 역시 『강철의 연금술사』의 아라카와 히로무처럼 장편데뷔작 『충사』(1999~2008)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2016-08-12 백지홍

소년만화 팬을 사로잡은 여성만화가, 그 두 번째로 소개할 작가는 우루시바라 유키다. 그 역시 『강철의 연금술사』의 아라카와 히로무처럼 장편데뷔작 『충사』(1999~2008)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곤충과 정령 중간 쯤 되는 존재인 ´벌레(蟲)´와 그 벌레에 관한 지식을 전승하며 벌레와 인간의 매개자가 되는 ‘충사(蟲士)’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하는 『충사』의 형식은 만화시장에서 주류가 되는 만화들과 스토리텔링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 같은 세계관 내에서 충사 ‘깅코’가 겪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각 에피소드의 이야기와 등장인물은 이후 에피소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경우가 다수이며, 심지어는 만화책 10권의 타임라인도 정확하지 않다. 몇몇 굵직한 이야기가 기저에서 연결되어 흐르고 있지만,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캐릭터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있는 독자라면 연재 순서와 상관없이 특정 에피소드를 읽어도 무리 없는 감상이 가능하다.

이렇듯 비전형적이고, 낯선 만화 『충사』는 2시즌에 달하는 TV애니메이션과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만화책 10권의 에피소드가 모두 영상화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일본 최고 스타인 오다기리 죠가 주연한 실사 영화도 제작되었고 게임 등으로도 제작되었으니, 『충사』는 ‘미디어믹스(Media Mix)’라는 면에서 더할 나위 없는 성과를 올렸다. 지금까지 출간된 작품이 초기 단편집 『필라멘트』와 앞서 설명한 『충사』그리고 상하권으로 발매된 중편 『수역』일 정도로 작품 수가 적은 것을 감안하면 그의 팬 층은 제법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그의 작품이 그러하듯 열정적이거나 정면으로 나서지 않지만,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팬들은 우루시바라 유키의 어떤 면에 매료되는 것일까. 

안개낀 녹색 세계 속으로
『충사』의 가장 큰 매력은 깅코가 충사로 활동하고, 다양한 벌레들이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충사의 세계’ 자체다. 일본 만화의 매력을 화려한 액션이나, 섬세한 감정선, 톡톡 튀는 캐릭터에서 찾는다면 대체로 맞아 떨어질 것이나 『충사』만큼은 그 모든 것에 앞서,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깅코 보다도 앞서 감상자를 사로잡는 것은 『충사』를 감싸고 있는 몽환적인 세계다.
충사의 세계는 불분명하다. 복식이나 건축형태, 생활수준 등 배경의 묘사를 보면 충사의 세계는 중앙집권이 이뤄지기 전의 일본이다. 하지만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는 행정 등의 요소가 작품에 전혀 등장하지 않기에 구체적 추정이 불가하다. 거기에 더해 깅코의 복장은 현대식 코트이며 그가 피는 담배 역시 오늘날 흔히 피는 궐련 형태로 작가가 ‘시대 배경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 그래, 『충사』의 세계에 현실의 잣대로 분석하지 말자. 벌레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그곳은 과거의 일본이 아닌 완전히 다른 시공간일지도 모른다.
이끼 낀 숲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자연과 공존할 수밖에 없고, 일반인은 알 수 없는 자연의 존재들도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이는 비단 『충사』 속 가상 세계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은 도시 문명에서도 우리의 시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자연과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우리를 매혹하기 충분하다. 더구나 ‘벌레’로 대표되는 『충사』의 자연은 인간에게 기생하는 등의 방식으로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때로는 소름끼치고, 때로는 아름다운 세계는 달팽이와 유사한 벌레의 퇴치에, 달팽이에게 치명적인 소금을 사용하는 등 우리의 경험과 맞닿은 방식으로 표현되기에 『충사』의 세계가 머지않은 곳에 존재할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사실 우루시바라 유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몽환적인 세계가 일본 만화계에서 유일한 것은 아니다. 작가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마녀』, 『SARU』, 『영혼』 등의 다양한 작품으로 펼쳐냈다. 우루시바라 유키의 『수역』과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해수의 아이』처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펼쳐냄에도 유사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작품도 존재할 정도다. 다양한 원시종교와 현대 종교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된 그의 세계는 우루시바라 유키의 세계보다 거대하다. 그러나 거대함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필라멘트』, 『충사』, 『수역』에 담겨 있어 우루시바라 유키만의 구역을 만드니, 바로 따뜻한 정서다.

비극일지라도, 따뜻한
『충사』에 붙는 다양한 수식어 중 하나는 ‘힐링 만화’다. 작 중에서 다뤄지는 인간과 벌레의 이야기는 때로는 등장인물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담담하게 그려내는 그의 만화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충사』에서 벌레들도 인간들도 외로움 때문에 무언가를 그리다 함께 하게 된다. 벌레가 기생한 인간은 기생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발적으로 기생을 받아들이고 점차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연출 방향에 따라 공포나 스릴러에 어울릴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우루시바라 유키는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작품의 주인공 깅코 역시 대의를 위해 앞장서는 영웅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외면하지는 못하는 평범하게 선한 사람이다. 거기에 벌레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가일 것이다.
그리고 『충사』의 세계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은 인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따뜻함이 아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온전한 주체가 아니다. 벌레와 상호작용하며 나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인간에게는 비극이라 판단될 수 있는 비극도 발생하지만, 작품의 담담한 시선 속에서 자연의 이치처럼 느껴진다. 인간만이 주체가 아닌 세계에서 비극의 기준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한 담담함이 기묘한 『충사』의 세계가 적지 않은 이들에게 편안하게 다가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가 개별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다는 점에서 그가 영향을 받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이야기가 ‘세계관’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과 확실히 차별되는 지점이다
다양한 습작들이 담겨있는 『필라멘트』에서도 다소 거친 듯 진행되는 단편들 사이사이로 우루시바라 유키의 담담한 시선과 따뜻함은 느껴진다. 담담한 시선으로 담은 몽환적인 세계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근작 『수역』(2011)에서도 빛을 발한다. 꿈을 통해 과거와 현실이 뒤섞인 세계로 연결되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몽환적’이다. 또한 산이 깊은 곳이면 의래 내려오기 마련인 오래된 전설과 자연 개발 이야기 등이 뒤섞인 이야기에 한 소녀가 얽히면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슬프지만,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읽게 된다. 옴니버스로 구성된 『충사』와 달리 상·하권, 총 500페이지에 가까운 이야기가 지속되는 『수역』은 등장인물들의 드라마에 보다 깊이 빠져 들게 만든다. 10권에 달하는 『충사』 연재를 통해 안정된 그림과 스토리텔링 능력은 『수역』이 안 알려진 작품으로 남아 있기에는 너무나 아깝게 하는 요소다.

주류의 너머에서
이전 연재에서 다뤘던 아라카와 히로무의 『강철의 연금술사』는 일본 만화계의 가장 주류로 자리잡은 소년만화의 공식을 따르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우루시바라 유키의 영역은 주류의 공식에 속하는 세계가 아니다. 유사한 작풍의 작가를 찾는다면 앞서 언급한 이가라시 다이스케, 『양의 노래』 등의 토우메 케이 등을 찾을 수는 있겠으나, 주류의 공식에서 벗어난 만큼 각 작가마다 개성이 강하고, 이들 모두 비주류로서 하나의 장르나 집단으로 묶을 수 없다. 그렇기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낸 『충사』의 성과는 새삼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만화계가 각 장르의 공식을 반복하며 매너리즘에 빠질 때, 이러한 주류의 영역 너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곤 한다. 아직 우루시바라 유키의 작품을 접하지 못한 이에게는 『충사』, 『수역』을 접해보길 바란다. 작품에 안개처럼 깔려있는 약간의 우울함에 적응할 수 있다면, 아마 그동안의 일본만화에서 느낄 수 없던 새로운 매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작품세계에 흥미가 생겼다면 『필라멘트』를 통해 그의 초기작을 접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것이다. 표지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작가의 수채 그림도 작품의 성격과 잘 어울려 감상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잡지 연재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주류 공식은 따르지 않는 우루시바라 유키의 작품을 논할 때, ‘여성 작가’임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 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작가의 성별이 잘 가늠되지 않는다. 성별에 따른 업계 논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런 작품의 경우 작품에 나타나는 특성은 작가의 개별적인 특성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으로 소개할 『엠마』와 『신부이야기』 등 카오루 모리의 작품은 등장인물의 연애가 중심에 있는 순정만화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넓은 세계관과 액션을 가미하여 순정만화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넓은 독자층을 포섭 한다. 필자를 포함한 남성 독자가 순정만화에 쉬이 접근 못하는 이유도 함께 다룰 것이다. 그 지점들을 넘어서는 모리 카오루의 이야기는 지난 연재에 이어 일본 만화계가 ‘장르의 틀’에 갇혀 깨어나지 못 하는 부분을 보여줄 것이다. 2011년 이후 신작을 볼 수 없는 우루시바라 유키의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며 이번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