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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 코믹스] 히어로 만화 속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슈퍼히어로

그런데, 마침 이번에 내게 의뢰한 주제가,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슈퍼히어로 등을 통해 히어로 만화 속 캐릭터 분석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다행히도 할 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6-08-19 진원석

얼마 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연락이 와서 내게 웹진에 기고를 의뢰했을 때, 솔직히 겁이 났다. 과연 내가 만화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전문가도 아닌데, 함부로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최근 나는 JTBC의 인기 프로그램 썰전에 출연해서 마블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도 나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블 덕후가 아니다. 단지 마블의 노예일 뿐이다." 매년 마블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하는 히어로물 영화들에 꾸준히 돈을 바치는 그 수많은 노예 중의 그저 한명. 그런 내가 과연 감히 히어로물 만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런데, 마침 이번에 내게 의뢰한 주제가,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슈퍼히어로 등을 통해 히어로 만화 속 캐릭터 분석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다행히도 할 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영화계(물론 미국 영화계에 주로 국한되는 얘기이긴 하지만)의 화두기도 하고 인종이나 문화, 그리고 성별의 다양성은 오랫동안 나의 관심사이기도 해서 나의 생각들 몇 가지를 적어 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서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만화 전문가가 아님을 재차 밝히며, 영화감독 입장에서 어느 분야보다도 가장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는 미국 히어로 만화 시장의 변화와 환경을 짚고 넘어가려는 것이고, 이를 통해 히어로 만화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영화계도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를 같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마블 코믹스. 그리고 DC 코믹스

불과 7, 8년 전만 하더라도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익숙했던 이 이름들. 하지만 지금은 디즈니나 파라마운트 등의 브랜드보다도 더 친숙한 존재다. 이제 마블이나 DC는 코흘리개 꼬마들도 잘 아는 브랜드이며 레이블이다.
마블과 DC 코믹스는 둘 다 미국 회사다. 이 두 회사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길다. DC 코믹스는 1934년에 설립된 회사이며, 마블 역시 1939년에 설립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만화 출판회사들이다. 사실 히어로 만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선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1930년대의 미국이라 하면, 백인 위주의, 그것도 남성 위주의 사회이었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지 불과 10여 년밖에 안되었던 시절이며, 흑인이나 기타 유색인종에겐 아직 참정권조차 없었던 게 바로 1930년대 미국의 현실이다. 참고로 소수 인종의 참정권은 1965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다.
또한, 이 당시, 파시즘이 유럽을 강타하고 있었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이었다. 다시 말해, 악의 축이 전 세계로 세력을 펼쳐 나가고 있었을 때이니, 그런 배경 속에서 슈퍼히어로를 꿈꾸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분명 영웅이 필요하던 시대였고, 시대적 배경이 그러하다 보니, 초기 슈퍼히어로들은 당연히 백인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 참정권조차 없는 흑인을 슈퍼히어로로 꿈꾸는 건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슈퍼히어로들 중에는, 지금도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배트맨, 슈퍼맨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들은 각자 다른 사연을 갖고, 다른 방식의 초능력을 발휘하게 되지만, 모두들 악의 세력으로부터 선량한 시민들을 구하는, 완벽한 백인 남자의 이상형을 구현한 것이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승리는 결국 미국의 전성기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미국은 엄청난 부와 힘을 지니게 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곧이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합을 했었던 공산주의 국가들이 적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핵무기의 위협 속에서, 1950년대에는 그야말로 독특한 형태의 크리처물들이 영화와 만화 속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전쟁의 후유증, 핵전쟁의 공포, 공산주의의 위협 등의 배경 속에서 돌연변이 괴수들이 나오는 호러 만화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문화적으로 봤을 때, 1960년대는 아주 흥미로운 시대였다. 우선, 대안 문화인 히피 컬쳐가 북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흑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투쟁과 시민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베트남 전쟁이라는 아주 복잡한 상황까지 엮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즐기고 있던 미국인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데, 과연 우리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인가? 베트남이라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가서 왜 우리는 싸워야 하고, 무고한 젊은이들이 거기서 희생을 당해야 하는가? 영화나 사진이나 책을 통해 접하는 60년대 사회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이었으며, 급격한 문화적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영화도 바뀌고 있었으며, 음악도 바뀌고 있었다. 또한, 사상도 바뀌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의 만화계는 제2의 황금기(혹자는 백은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를 맞게 된다.

1950년대 미국의 만화계는 공포물과 범죄물 위주의 만화가 범람했는데, 이런 작품들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60년대 들어와서, 전쟁 이전부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인기가 많은 슈퍼히어로물이 다시금 등장하는데, 40년대 이전의 슈퍼히어로와는 다른 느낌의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전의 슈퍼히어로들이 완벽하고 거의 신에 가까운 느낌의 캐릭터들이었다면, 60년대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들은 단점도 많고, 자기 회의가 많은,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외모적인 면에서 인간과 거리가 먼 존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DC 코믹스는 이 당시 기존의 캐릭터들을 수정 보완해서 저스티스 리그를 결성하게 되고, 플래시, 호크맨, 아톰 등의 캐릭터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60년대를 백은 시대라 부르게 된 계기는 사실상 마블 코믹스의 급속한 성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영화계에서는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들이 기존의 관습이나 전통을 깬 영화들을 만들어 영화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서 큰 충격을 주었는데, 우리는 이런 움직임을 프랑스 누벨바그(뉴 웨이브 - 새로운 물결)라고 불렀다. 누벨바그는 간접적으로 만화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60년대 등장하는 만화의 캐릭터들은 그 전 세대와 사뭇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두서없이, 미국의 근대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를 얘기하는 건 중요하다. 예술은 항상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는 예술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은 만화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마블 코믹스의 60년대는 놀라울 정도로 생산적이었다. 판타스틱 포, 헐크,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의 캐릭터들이 이 당시에 만들어졌다. 지금도 인기가 많고, 특히 할리우드가 사랑하고 있는 이 캐릭터들은 자세히 보면 히어로라기보다는 안티 히어로의 느낌이 더 짙다. 헐크나 스파이더맨 등의 캐릭터들은 완벽한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슈퍼파워를 갖고는 있지만, 문제점 투성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종의 돌연변이다. 돌연변이를 언급하자면, 엑스맨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다들 알다시피, 엑스맨에서는 아예 돌연변이 집단들이 학교까지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돌연변이는 신체적으로 혹은 그들의 능력에서 우리와는 다른 종족들을 말한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해석해보면, 우리와 다른 사람, 즉, 다른 인종,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대안적 문화에 대한 비유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 흑인들 인권 시민운동에 대한 상징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흑인 및 소수 인종의 참정권 및 인권 신장 운동은 60년대를 격변의 시대로 만들었다.
그 이후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사회는 발전을 하게 되고, 의식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불과 50년 전에 흑인과 백인이 버스를 타더라도 같이 앉을 수 없었다고 말하면 오늘날 세대는 의아해할 것이다. 그만큼 시민의식이 많이 성장했다.

여전히 존재하는 소수자, 인종, 성차별 문제
하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미국에서는, 아니 전 세계적으로 소수 인종 혹은 유색인종의 평등에 대한 투쟁, 그리고 성적 차별 등의 문제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여전히 큰 이슈다. 특히 미국에서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에게 과잉 진압을 당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비극적 사건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주류 대중문화는 여전히 백인 위주이고, 흑인이나 기타 소수 인종이 사이드 킥처럼 등장하기만 한다. 비록 흑인 대통령이 미국에서 탄생했지만, 인종 간의 갈등 및 차별은 알게 모르게 심한 상황이다.

심지어 올해 미국 영화계의 가장 큰 행사인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런 갈등을 극대화시킨 행사라고 볼 수 있다.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그리고 여우조연상 등 총 스무 명의 배우들에게 후보 자격을 쥐어준다. 그런데, 올해 그 스무 명 배우 중에 흑인이나 기타 소수 인종 피를 갖고 있는 배우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백인이었다. 물론 감독상 후보 또한 모두 백인 남자였다. 그 중 한 명은 멕시코 국적의 백인이었다. 그래서 소셜 미디어에서는 #OscarSoWhite 라는 해시태그를 붙여 이러한 문제점들을 부각시켰다.
갈등은 인종 간에만 있을 게 아니었다. 할리우드 톱배우 제니퍼 로렌스는 여성 출연자와 남성 출연자 사이의 개런티에 큰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며, 이런 불평등이 바뀌어야 한다고 크게 한마디 했다.

이런 가운데, 할리우드에서는 이제 더 이상 백인 남성 위주의 캐스팅이나 혹은 백인 남성 위주의 감독 고용은 용납되어선 안 된다는 의견들이 생기며, 새로운 시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근, 흑인 슈퍼히어로 캐릭터인 블랙 팬서를 주인공으로 한 단독 마블 영화가 제작에 들어갔으며, 이미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그 캐릭터를 소개했고, 최근 [크리드]와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등의 영화로 각광을 받은 흑인 감독 라이언 쿠글러를 연출자로 고용했다.

이런 활발한 움직임이 할리우드에서 이제야 일어나고 있지만, 일찌감치 만화업계에서는 다양성을 오래전부터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미 소수 인종이거나 여성인 슈퍼히어로들을 기획해서 진행해오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할리우드는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고, 뒤늦게나마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할리우드는 흑인 히어로 블랙 팬서 외에도, 여성 히어로 주인공의 캡틴 마블 등도 영화화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시아인이 주인공인 히어로 영화들도 곧 나오게 되는 걸까? 세계적 인지도를 갖고 있는 배우들이 아직 없어서 그런 소수 인종이나 여자가 주인공인 히어로 영화들을 만들지 못한다는 할리우드의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들어보면,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친숙하지 않았던 폴 러드(앤트맨), 크리스 프랫(가디언 오브 갤럭시), 크리스 햄스워스(토르 - 솔직히 토르 이전의 크리스 햄스워스를 누가 알기나 했을까?) 등의 백인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영화들을 만든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흑인이나 동양인, 혹은 히스패닉이 주인공인 영화들은 왜 못 만드냐는 반문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계의 이런 논란은 [공각기동대]와 [닥터 스트레인지]로 더 불이 붙었다. 일본 만화를 각색해서 실사 영화로 만들고 있는 [공각기동대]의 여자 주인공을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백인 배우가 맡자, 온라인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로 한창 시끄러웠다. 더더군다나, 주인공의 비주얼이 동양인 모습에 가까웠고, 제작진이 CG로 스칼렛 요한슨의 모습을 동양인처럼 보이게 할 생각을 했다고 알려지니,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한 마블에서 제작하는 [닥터 스트레인지]는 원작에서는 티벳의 남자 마법사 역이었지만, 백인 여배우 틸다 스윈튼을 캐스팅해서 화이트 워싱(White Washing)의 비난을 받았다.
△ <공각기동대> 영화판 주인공역의 스칼렛 요한슨
△ <닥터 스트레인지>의 틸다 스윈튼
그런 의미에서 마블이 [블랙 팬서]를 단독 영화로 2018년에 개봉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과거에 [블레이드]가 영화화된 적은 있지만, 흑인 슈퍼히어로 영화가 소위 말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세계 안에서 최초로 개봉된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이다.

하지만, 만화 [블랙 팬서]는 이미 4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고전이다. 1966년 잭 커비와 스탠 리에 의해 탄생된 블랙 팬서는 그 이름이 흥미롭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만화가 나온 지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미국에는 ´블랙 팬서(흑표당)´라는 흑인무장단체가 결성되었다. 많은 사람은 블랙 팬서라는 캐릭터가 흑표당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믿고 있는데, 정말로 우연하게도 같은 이름의 만화 캐릭터와 정치 단체가 거의 같은 시기에 생기게 되었을 뿐이다.

흑인들의 자기방어라는 모토를 가지며, 베레모와 검은 가죽 자켓을 걸치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채 활동한 블랙 팬서(혹은 블랙 팬더)가 극좌익의 정치적 성향의 단체라면, 만화 속의 블랙 팬서는 아프리카의 가상 국가 와칸다의 국왕이며, 트찰라라는 본명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세계에서 손을 꼽는 부호이며, 비브라늄이라는 금속으로 무장한 슈퍼히어로인데,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가 비브라늄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얼마나 강력한 수트를 입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블의 세계에 따르면, 비브라늄은 남극이나 와칸다에서만 생산되는 희귀한 금속이다.

최근 기자 출신의 저명한 작가 타 네히시 코테스가 블랙 팬서의 최신판을 맡아 글을 썼는데, 21세기에 걸맞은 블랙 팬서를 그려냈고, 영화화하는데 결정적인 청사진을 뽑아냈다고 평을 한다.

흥미로운 건, 코테스는 평생 히어로 만화의 팬으로 자라다가, 이번에 히어로 만화를 직접 만들게 되는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는데, 지금의 대부분 아티스트들이 결국엔 1세대 만화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을 보고 자란 팬들이다.

하지만, 코테스에겐 블랙 팬서가 남다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이다. 만화 팬들에겐 스티브 로저스의 캡틴 아메리카로의 변신이나, 피터 파커의 스파이더맨으로서의 변신이 자기 같은 나약한 인간들도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해주고, 판타지를 이루게 해주기에, 히어로 만화는 항상 특별한 존재다. 하지만,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들이 백인이기에, 유색인종이거나 소수민족 출신인 팬들의 입장에선 뚜렷한 롤모델이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블랙 팬서의 등장은 흑인 팬들 입장에선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히어로가 등장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아프리카의 가상국가의 왕이라 할지라도.

이런 히어로가 60년대에 등장했다는 건 아무튼 엄청난 사건이다. 이는 또한 1960년대 시민운동의 산물이자 반응이다.

엑스맨, 그리고 변화하는 슈퍼 히어로
그런 의미에서 엑스맨 역시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만화였다. 비록 주인공의 대다수가 백인이지만, 스톰 같은 흑인 캐릭터가 70년대에 소개되고, 자비에 교수와 매그니토는 당시 시민운동의 대표 주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X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볼 수 있다. 킹 목사는 평화적 방법으로 저항하길 원했고, 말콤 X는 투쟁적 방법의 저항을 원했다. 누가 봐도, 스탠 리나 기타 작가들이 어디서 영감을 얻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만화계는 어느 매체보다도 진보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림으로 접하다 보니, 아마도 소수 인종 히어로들이 덜 저항적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문화적 혹은 인종적 배경을 가진 2세대 만화가들이 등장하면서, 만화계에도 수정주의 관점의 작품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흑인 히어로나 히스패닉 히어로 캐릭터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백인 남성으로 기억되던 기존의 히어로들이 소수 인종으로 재탄생하는 트렌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 경우가 작년에 나온 캡틴 아메리카다.

캡틴 아메리카 하면 우리는 스티브 로저스를 떠올린다. 비록 혈청을 통해 아주 작은 체구의 남자가 기가 막힌 변신을 하지만, 스티브 로저스는 미국의 영웅이며, 흠잡을 데가 없는 백인 남자 히어로다. 물론 과거에 캡틴 아메리카의 역할을 다른 인물들이 가끔 맡긴 했지만, 여전히 백인 위주였다. 그런데, 작년에 놀랄 만한 일이 발생했다.

처음으로 유색인종의 캡틴 아메리카가 탄생했다. 그동안 캡틴 아메리카와 어벤져스 세계에서 스티브 로저스의 사이드킥 역할을 해 왔던 팔콘(그의 또 다른 이름은 샘 윌슨이다)이 캡틴 아메리카가 되었다. 상징적으로 이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2차대전 당시부터 존재해왔던, 어떻게 보면 백인우월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캡틴 아메리카가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매우 충격적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대장이 흑인이라? 어찌 보면, 현실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된 상황인데, 늦은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참고로 샘 윌슨은 마블의 세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게 1969년이다. 역시 시민 저항 운동이 한창이던 격동의 시대에 소개된 최초의 유색인종 캐릭터 중 한 명이다. 흥미로운 건, 샘 윌슨은 다른 캐릭터들과 달리, 뚜렷한 직장이 있다. 마블 영화들 속에서는 전쟁 참전 용사들의 전후 후유증을 치료해주는 상담사로 등장하지만, 만화 속에서는 할렘에서 불우한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회봉사자로 표현된다.

아무튼, 샘 윌슨의 캡틴 아메리카는 만화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고,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놀라운 변화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이런 비슷한 움직임이 부쩍 늘었다. 마블 코믹스의 파격적 시도는 흑인 캡틴 아메리카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2년 전, 마블에서 또 다른 충격적인 뉴스를 발표한 것이다. 만화 속의 토르가 여자가 된다는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 하면, 스티브 로저스를 떠오르듯, 토르 역시 덩치 큰 백인 남자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여자가 토르가 되고, 천둥의 여신이 된다고? 그 커다란 해머 묠리느를 여자가 집어 든다고?

그 여자 토르의 주인공은 예상을 뒤엎고, 토르의 연인이었던 제인 포스터로 알려졌다. 만화 속에서 그녀는 유방암을 선고받은 상태인데, 과거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암에 걸린 슈피히어로?

무엇보다도, 이런 변화들은 팬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다. 이런 긍정적 메시지는 사회적 변화와 맞물린다.

2008년 미국에선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리고 지금 미국 민주당에서는 첫 여성 대통령 후보를 선정했으며, 현재 분위기로 힐러리 클린터 후보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회의 변화는 만화에도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50년 동안 미국에서는 흑인이나 여성의 평등에 대한 투쟁과 저항이 계속되어 왔으며, 그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시대가 다가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단순히 흑인과 여성이 소수자로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다. 지난 몇십 년 사이에 히스패닉 인구가 부쩍 늘었고, 아시아계 미국인의 숫자도 이젠 무시 못 할 정도로 불고 있다.

슈퍼히어로 만화 속에서도 이런 변화를 반영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역시 기존의 유명 히어로 캐릭터의 계승이다.

2011년 마블은 피터 파커로부터 대를 이을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캐릭터를 전 세계에 소개시켰다. 그는 흑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어머니를 둔 10대 소년 마일스 모랄레스다. 미국 인구의 17% 이상을 차지하는 히스패닉 혹은 라틴계 미국인들에게도 그들만의 슈퍼히어로가 생겼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흥미로운 건, 마일스 모랄레스는 오바마 대통령과 흑인배우 도날드 글로버에게서 영감을 얻어 탄생된 캐릭터라고 한다.

2008년,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마블의 작가들은 이제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마당에, 슈퍼히어로들이 굳이 다 백인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몇 년이 지난 후, 배우 도날드 글로버가 당시 리부트로 기획 중이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주인공 역 오디션을 보고 싶다는 의지를 SNS를 통해 알리면서 이런 내용이 바이럴로 퍼져 나갔다. 안타깝게도, 그는 오디션조차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영화 속의 스파이더맨은 또 다른 백인 배우 앤드류 가필드에게 돌아갔지만, 당시 글로버의 온라인 로비는 꽤나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 글로버는 TV 코미디 시리즈 에 출연하게 되는데, 한 에피소드에서 스파이더맨 잠옷을 입고 나와, 당시 상황에 대한 패러디와 오마쥬를 하게 되었다. 이를 보게 된 마블 작가 중 한명이 여기서 자극을 받아, 마일스 모랄레스라는 캐릭터를 만들게 되었다고 전한다. 참고로 이후에 도날드 글로버는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성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화면에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목소리라도 스파이더맨 역을 맡게 되었으니, 반 정도 소원 성취는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통적 슈퍼히어로의 세대교체는 계속 진행되면서 아시아계 미국인에게까지 퍼져나가는데, 2005년에 마블 코믹스에 첫 등장한 아마데우스 조라는 한국계 미국인 캐릭터가 2015년 말에 발간된 에서 헐크로 변신한다. 한국인이 헐크라? 정말로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마데우스 조의 탄생의 배경에는 한국계 미국인 그렉 박과 미야자와 타케시라는 두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들의 역할이 큰데, 특히 영화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렉 박의 경우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의 영화들을 주로 만들었지만, 당시 영화계에서는 독립영화계의 아주 극소수의 관심만을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영화계를 떠나, 만화 세계에 들어서면서 그는 아시아계 미국인 슈퍼히어로 이야기를 만들게 되었고, 이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아마데우스 조는 인기가 높은 캐릭터로 급성장하면서 심지어는 차세대 헐크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영화계가 얼마나 닫혀져 있고, 만화계는 얼마나 열려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케이스다.

영화계도 이런 점을 인지, 블랙 팬서와 캡틴 마블처럼 흑인이나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을 준비하며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마도 영화 속에서 히스패닉계 스파이더맨이나 한국계 헐크를 보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만화계의 이런 노력은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2014년에는 무슬림 슈퍼히어로가 탄생했다. 그녀의 이름은 카말라 칸. 미즈 마블의 새로운 인물로 그녀가 결정되었는데, 그녀는 이슬람교도 집안에서 자란 파키스탄 계 미국인 2세다.

아무리 인종이 다양한 미국의 세계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무슬림 캐릭터의 등장은 사실 껄끄러울 수도 있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9.11 이후 무슬림과의 다소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대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은 평화를 원하는 선량한 시민이지만, 일부 극단적 테러리스트 집단의 과격한 행동으로 주류사회에서 무슬림이라 하면 편견을 갖게 된다. 실제로 지금 미국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이를 악용해서, 무슬림들을 입국 금지시키자고 선동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카말라 칸의 등장은 파격적이며,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미즈 마블이 정치적 메시지를 띈 만화라고 볼 수 있을까? 아마도 작가들이 그런 의도를 갖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슈퍼히어로 만화를 보면서 정치적 혹은 종교적 우화라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결국엔, 쿨한 슈퍼히어로를 보여주는 게 그들의 의도이니까.

사실 어찌 보면, 카말라 칸은 급진적이거나 과격한 캐릭터는 아니다. 오히려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캐릭터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카말라 칸의 세계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민 가정의 2세 그대로의 모습이다. 가족 모두 이슬람교를 믿고 이에 따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카말라는 미국 뉴저지에서 자라는 평범한 16세의 소녀의 모습이다. 집에서는 전통과 규율을 따라야 하지만, 이에 반항하는 지극히 평범한 10대인 것이다. 이슬람교라는 게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뿐이지, 이민자 세대가 겪을 수 있는 흔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녀는 미국 소녀로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뿐만 아니라, 슈퍼히어로서의 정체성 또한 숨길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그건 우리가 그동안 숱하게 보아온 슈퍼히어로의 모습이 아닐까?

위에서 나열한 새로운 슈퍼히어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만화계에서는 수많은 변화가 다양하게 진행되어 오고 있고, 분명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캐릭터들이 이제는 사이드 킥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의 전면에 주인공으로 나서고 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변화하기 위한 노력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변화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우선, 사회가 그만큼 변하고 있다는 증거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히스패닉 혹은 라틴계 미국인이 전체 인구의 17%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흑인을 가리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구는 전체의 13% 조금 넘게 차지한다. 다시 말해 절반 가까이가 소수 인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소비자층이 다양해졌다는 것이고,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은 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그리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 역시 다양해졌음을 의미한다. 앞서서 타 네히시 코테스의 예를 들었지만, 카말라 칸의 탄생에는 마블의 편집자인 사나 아마나트의 역할이 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무슬림계 미국인이다.

다시 말해, 백인 영웅을 그린 만화를 보고 자랐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성장 이야기와 정체성 이야기를 슈퍼히어로 이야기에 접목시키게 된 것이다.

그럼 주류문화에서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질문에 앞서 슈퍼히어로 코믹이 진정으로 주류문화일까? 사실 지금은 누구나 마블이나 DC의 캐릭터들에 대해 알고 있고, 영화로 각색되어서는 엄청난 흥행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코믹은 주류라기보다는 니치(niche)적인 색깔이 짙다.

아무튼 독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슈퍼맨이 흑인이거나 여자라고 상상해보자. 과연 여러분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최근에 미국에서 개봉하고 한국 개봉을 앞둔 [고스트버스터즈]라는 영화의 경우, 주인공을 모두 여자로 만들어서 리부트했다. 84년도 오리지널 영화를 사랑하는 팬들 입장에선 다소 어색할 수밖에 없다. 익숙지 않은 그림이었던 것이다. 변화에 대한 저항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전통에 대한 저항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올 수밖에 없는 순리이며, 그런 변화를 의도적으로 앞장서서 시도하고 있는 만화 작가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실 영화인 입장에선 부럽기 짝이 없다. 우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다른 분야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리며,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지는 공정이라 민첩할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변화에 느리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블랙 팬서나, 캡틴 마블, 그리고 원더우먼 등의 영화가 제작되어 가는 과정에서, 다소 늦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고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이런 변화가 여기저기서 시도되고 있지만, 현실에선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고, 많은 갈등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전히 여혐, 인종차별, 혹은 호모포비아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더 심해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지난 50년 동안 진행되어 왔던 시민운동과 투쟁이 헛수고가 된 마냥, 세상은 관용과 관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은 일부에 국한된 현상일 테고, 대다수의 시민들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도, 보이는 현상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 만큼, 아티스트들의 꾸준한 노력은 더더욱 중요하고, 필요하다. 무슬림 소녀 히어로를 통해, 히스패닉 스파이더맨을 통해, 또한 여자 토르를 통해,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으며, 또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에 대해선 응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판타지는 인종이나, 성별이나 문화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똑같이 꾸는 꿈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계속해서 만화를 즐겨보는 이유이고,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