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것: 2020년대 한국여성과 보이즈러브(BL)
2020년대 BL은 '환경화'된 콘텐츠
여성의 성적인 욕망과 쾌락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문화현상으로서의 'BL' 탐색
김효진 (서울대 일본연구소 조교수)
BL이 한국에 유입되어 대중적으로 인지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 이후, BL은 이미 30년의 자체적인 역사를 가진 대중문화로서 자리 잡고 있다. 일본에서 출판된 다양한 BL서적이 수입되는 한편, 2010년대 이후 한국 출판시장에서 출판 BL만화 및 소설, BL로 분류되는 웹소설과 웹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는 더욱 확실한 흐름이 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비상업적 유통이 중심이었던 과거에는 BL에 대해 '음지 문화'라는 인식도 강했지만, 이러한 상업화 및 정식출판시장 진출에 힘입어 BL에 대한 주류사회의 관심도 크게 높아진 상태이다.
이런 변화는 BL을 적극적으로 창작하고 향유하는 2020년대의 한국 여성들과 그들에게 BL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는데 유의미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과거 일본에서 BL이 유입되었던 당시와는 달리 다양한 콘텐츠의 일부로서 BL은 이미 일부 여성의 '이상한' 취미가 아니라, 이미 콘텐츠 시장의 주요한 요소로서 여성들을 둘러싼 일상적인 콘텐츠, 즉 '환경화'된 상황이다. 이렇게 BL을 접한 세대에게 BL은 다양한 여성을 위한 콘텐츠 중 하나로서 여성들이 즐기는 다른 장르들-순정만화, 로맨스소설 등-과 경합하는 동시에 장르로서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상당히 일반화된 취향의 하나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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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이후 주류 대중문화에서 여성을 위한 다양한 콘텐츠가 증가하고 있고, 최근에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ly Correct)한 콘텐츠에 대한 지지도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30년의 시간을 지나 일상적인 대중문화로 정착한 BL을 통해 여성들이 얻는 쾌락, 그리고 표현하는 욕망이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대중문화 콘텐츠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BL은 여성작가와 여성독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거의 유일한 출판시장으로서 여성의 성적인 욕망과 쾌락이 가장 직접적이자 노골적으로, 가장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대중 장르라는 점이다.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여전히 강력한 한국에서, 남성 중심의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여성상과 여성에 대한 성적 묘사에 대해 당사자들인 여성이 거부감을 느끼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대해 BL은 남성(으로 패싱되는1)) 두 사람의 동성애적 로맨스와 성애를 묘사함으로써 여성작가와 독자가 보다 안전한 제3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성적 욕망을 추구하고 충족할 수 있는 장場을 제공한다. 상당수의 헤테로 성애 묘사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묘사를 읽는 여성 독자들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묘사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공포를 무의식적으로 그에 투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BL에서 제공하는 남성 두 사람의 성애 묘사는 직접적으로 여성 신체를 경유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읽는 독자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성적 행위의 묘사에 자주 수반되는 폭력에서 현실의 여성이 겪는 아픔에서 상대적으로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성적 욕망을 탐구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때 남성(으로 패싱되는) 캐릭터들 간의 성적 행위와 쾌락을 보다 자유롭고 안전하게 표현하고 향유할 수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로서 한국의 BL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나아가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해석공동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방적이기도 하다.
둘째, 소설과 만화라는 매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BL의 장르적 특징인 공수(攻受)로 불리는 남성캐릭터 간의 로맨스와 성애,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이들의 관계성(‘커플링’)이 내용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이 갖는 독특한 젠더적 실천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일반적인 헤테로 로맨스의 장르적 규칙에 따라 주인공들의 젠더(남성/여성)을 설정하는 순간, 이 두 사람의 관계성이 확립된다. 즉 이들은 주어진 섹스-젠더에 따라 자연스럽게 각각의 역할을 연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BL소설에서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견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체형의 남성과 섬세하고 단정한, 왜소한 체형의 남성 두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 두 사람의 관계성은 헤테로 로맨스처럼 전자가 후자를 리드하는 역할(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체격이 크기 때문에)을 자연스럽게 맡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관계성은 실제 외모나 성격 등 특성보다는 삽입 성행위로 상징되는 권력관계에서 누가 삽입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바로 여기에서 그 관계성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그 해석의 공유를 통한 독자들의 쾌락이 발생하는 동시에, 이런 공수 캐릭터를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규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탐색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최근 BL에 대해 남성의 표상을 이용하며 삽입섹스를 중심으로 한 공수관계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여성혐오(misogyny)의 문제를 지적하는 비판도 있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BL의 주된 창작자와 소비자가 여성인, 여성 중심의 대중문화로서 그 경제적 효과가 여성의 삶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BL을 BL이 탄생한 일본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2020년대, 한국 여성이 BL을 통해 무엇을 만들고, 얻고 있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BL의 전세계적인 인기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는 여성의 위치라는 어떤 보편적 감수성이 만들어낸 문화현상으로서 BL을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며, 한국의 여성 또한 여기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한국 BL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1) BL에서 등장하는 캐릭터가 실제 게이남성이 아닌 "남성으로 패싱되는)"캐릭터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여성들이 창작하고 향유하는 BL이 기본적으로는 비당사자들의 판타지이며, 이 표상과 대응하는 집단으로서 현실의 게이와는 다르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표상과 판타지는 때로는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자세한 논의는 김효진(2020, 「보이즈 러브의 문화정치와 ‘여성서사’의 발명-‘야오이’의 수용부터 ‘탈BL’ 논쟁까지」 『원본없는 판타지: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후마니타스)를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