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취향 판별기? 구구절절 긴 제목부터 짧고 굵은 제목까지 이모션D
바야흐로 콘텐츠 범람의 시대입니다. 대중 매체라고는 TV나 영화밖에 없던 시절에서 이젠 각자의 개인 미디어로 온갖 콘텐츠를 접하는 시절이 되었지요. 영화관을 가지 않아도 넷플릭스에는 볼 영화가 넘쳐나고, 유튜브도 봐야지, 게임도 해야지, 웹 드라마, 웹 소설도 읽어야지, 사방을 둘러봐도 콘텐츠 천지입니다.
웹툰도 이 ‘범람’의 시대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포털 사이트만 찾아가면 어지간한 웹툰은 볼 수 있던 시절이 차라리 호시절이었습니다. 포털에 걸어두기엔 ‘센’ 수위의 작품들까지 다루는 사이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무슨툰’이나 ‘무슨코믹스’라는 이름을 단 웹툰 플랫폼들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습니다. 심지어 이런 ‘플랫폼’에 의지하지 않고 인스타그램, 트위터, 포스타입 같은 곳에서 개인 연재를 하는 작가들도 많아졌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독자 입장에서도 ‘내 취향의 작품’을 찾아 나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나 할까요? 심지어 ‘내 취향의 작품’을 발견한 다음에도 나중에 다시 보려면 ‘그게 어디에서 연재하던 뭐더라?’하고 구글 검색창을 붙잡고 끙끙거립니다.
작품의 얼굴이자 첫인상, ‘제목’으로 어필하기 콘텐츠 범람의 시대이기 때문에, ‘제목’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별처럼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여기를 봐달라고, 내가 재밌는 작품이라고 어필하려면 제목부터 반짝거려야 하죠.
제목을 빛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작품에 독특한 소재가 있는 경우에는 이를 제목으로 내세우며 흥미를 끕니다. 마음속에 오가는 생각과 감정의 갈피들을 의인화된 세포로 표현한 <유미의 세포들>(이동건), 남자들을 거세시키는 도자장의 이야기를 다룬 <환관제조일기>(김달)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하죠.
작품 속 캐릭터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는 제목도 있습니다. 특정 인물을 초점화하여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데미안>이나 <파우스트> 같은 소설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웹툰도 있지요. 신의 이름을 지닌 소녀 <쿠베라>(카레곰)나 험난한 인생사를 살아온 어느 남자의 복수극을 그린 <김철수씨 이야기>(수사반장)를 들 수 있겠네요.
간결하고 강렬한 단어 하나로만 제목을 짓기도 합니다. 이때의 제목은 작품을 꿰뚫고 있는 핵심 주제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죠. <송곳>(최규석)은 처참한 현실에서도 굽히지 않는 노동 운동가들을 ‘송곳 같은 인간’이라고 표현합니다. ‘송곳’은 대포나 칼처럼 거창한 무기가 아니기 때문에, 든든한 공권력이나 자본도 없이 권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이들의 어려운 현실을 상징하기도 하죠. 짧은 단어 하나지만 캐릭터와 이야기가 엮어내면서, 제목 자체가 이야기 전체를 떠받치는 ‘알레고리(Allegory)’가 되는 겁니다. <미완결>(네온비/안나래) 또한 이야기의 뼈대를 암시하는 제목입니다. 천재 소설가가 자기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주변을 파멸로 몰아넣는 상황에 맞서, 그의 뜻대로 이용당하지는 않겠다는 주동 인물들의 의지가 느껴지는 제목이지요.
그런데 이렇듯 핵심만 담아내는 제목과 정반대의 경향이 나타납니다. 구구절절, 자세히도 풀어 말하는 ‘문장형 제목’이 그것입니다.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같은 라이트 노벨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제목 형태이죠.
사실 이런 문장형 제목이 라이트 노벨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순문학 소설에도 문장형 제목을 찾아볼 수 있죠.
그러나 이런 고전적(?)인 문장형 제목과 달리, 라이트 노벨의 문장형 제목들은 보다 ‘3줄 요약’ 같은 성격을 띱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제목의 문장은 수사법적으로 사용된 것이라면,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는 이 작품이 ‘던전’이라는 ‘#판타지’를 배경으로 ‘만남’이라는 ‘#로맨스’를 다룬다는, ‘#키워드’ 알림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워낙에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다 보니, ‘무슨 내용인지 제목에서부터 훤히 좀 알려줘’를 원하는 독자들이 늘어난 겁니다. 구구절절 긴 제목으로, 대놓고 ‘이 작품은 이런 취향을 노리고 있으니 읽어 봐줘’를 어필하게 된 거고요.
한국 웹툰에서도 이런 구구절절 문장형 제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황도톨,티바/MSG), <그래서 나는 안티팬과 결혼했다>(재림), <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류희온/카콘) 같은 작품들이 떠오르네요. 이런 웹툰들은 동명의 웹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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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긴 제목은 ‘#키워드’를 짚어주듯 한눈에 취향 저격을 해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목이 너무 길다보니 외우기 힘들고, ‘줄임말’을 만들지 않으면 언급하기도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짧고 굵은 제목은 상징성이 뛰어나고, 한 눈에 잘 들어옵니다. 대신 다른 작품의 이름이나 일반 명사와 겹치기도 하는지라, 검색으로 찾다가 곤란해질 때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유니크함이 부족한 제목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무엇보다 요즘의 독자들은 단어 하나에 담긴 상징과 깊이를 곰곰이 들여다보기보다는, 범람하는 콘텐츠 속에 ‘촉’이 오는 작품만 재빠르게 취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구절절 문장형 제목’이 지배하는 시대가 온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짧고 굵은 제목’들도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목’에는 ‘대표성’이 필요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면 작품의 흥행에는 제목이 얼마나 영향을 줄까요? 각 웹툰 플랫폼에서 선두를 달리는 작품들과,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의 제목을 두루두루 살펴보고 나서, 문득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명언이 있었습니다. ‘야잘잘(야구는 잘하던 사람이 잘한다)’. 상황이 어렵든 슬럼프가 있든 결국 본연의 실력은 감출 수 없는 야구의 세계처럼, 웹툰도 본연의 재미가 흥행을 이끌어 갑니다. ‘작재재(작품은 재미가 있어야 재밌다)’라고나 할까요.
제목에 끌려 첫 화를 클릭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결국 다음화를 계속 보게 하고, ‘팬심’을 만들어 ‘입소문’을 타게 하는 것은 ‘재미’, 그 자체입니다. <모죠의 일지>(모죠)는 50화 특집에서 ‘제목 잘못 지은 만화’라고 한탄하지만, 제목이 좀 헷갈려도 그의 작품은 널리 사랑 받고 있는 것처럼요.
콘텐츠 트렌드를 잘 캐치해낸 문장형 제목부터, 상징성 강한 단어형 제목, 독특한 소재를 어필하는 제목부터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제목까지, 다양한 웹툰에는 다양한 제목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억에서 바로 떠오르는 웹툰 제목이 있으신가요? ‘인생 작품’으로 꼽는 웹툰 작품이 있다면, 그 제목은 어떤 걸 담고 있나요? 이름 석자만으로 나의 정체성 전부를 표현할 수 없겠지만, 이름으로 인하여 나의 존재가 호명되듯, 웹툰의 제목 역시 작품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떠올리게 해주는, 작품의 명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