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만화 시장에서 그래픽노블의 약진 '상업과 비상업의 대결이 아니었다'
출판만화는 웹툰의 약진 이후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시장이었다. 웹툰이 약진하면서 팬덤이 일본만화를 중심으로 한 출판만화와 디지털 스크롤을 중심으로 한 웹툰으로 양분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책 소비 자체가 줄면서 시장 자체가 감소했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나마 일본만화는 꾸준히 이슈가 되었지만, 일종의 ‘무관심의 영역’에 있던 장르가 있다. 바로 그래픽노블이다.
그래픽노블 시장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의가 있다. ‘그래픽노블’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는 의견, 우리나라에선 곡해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의견과 형식과 서사 중에서 어떤 것이 그래픽노블을 규정하느냐는 질문까지 다양하다.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에 대한 정의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그래픽노블의 특징은 1) 잡지 등에 유료연재가 아닌 단행본으로만 발간되며 2) 시리즈를 제외하고 단권으로 서사가 완결된다. 처음 그래픽노블이 등장하게 된 건, 북미 만화시장에서 수퍼히어로 코믹스를 중심으로 한 ‘기획 연재물’에 회의를 느낀 작가들이 직접 나서 판로를 개척하고, 기존의 코믹 스토어(Comics Store) 중심의 유통체인을 넘어 서점으로 확장하기 위한 기획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그래픽노블은 덜 상업적이고, 작가주의적이며 문학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 좌측부터 샤브리나, 쥐, 왓치맨의 표지 이미지
일반적으로 독자들이 생각하는 대표적인 그래픽노블로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 크레이그 톰슨의 <담요>, 앨런 무어의 <왓치맨>,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뜻하다>등 서구권의 작품이 많은 것도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의 뿌리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명을 붙이고 나온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이 중에는 판매나 형태가 아니라 작품의 서사 또는 형식을 두고 ‘그래픽 노블스럽다’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작가주의적이고 상업적 자극보단 문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품에 흔히 붙이는 수식어처럼 쓰인 경우다.
‘덜 상업적’이라는 인상 덕분인지, 그래픽노블은 상대적으로 무관심의 영역에 놓여 있었다. 용어의 혼돈은 이를 뒷받침한다. 흥미롭게도 만화의 판로를 넓히고, 상업적 개념을 확장하기 위한 단어였던 그래픽 노블이 우리나라에선 ‘상업적이지 않은’, ‘예술적인’ 작품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됐다. 하지만 만화의 본질은 ‘읽히는 것’이고, 복제를 통한 대중예술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얼마나 많이 읽히는가’가 중요한 척도가 된다. 하지만 ‘덜 상업적’이라는 인상은 여기에 의문을 던진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래픽노블은 서구권에서 발명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그래픽노블의 정의가 혼재되어 사용되는 것도 맞다. 그럼 한국에는 그래픽노블 시장이 없을까? 한국에도 분명 그래픽노블 시장이 있다. 온라인 서점을 운영하는 예스24에서는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의 그래픽노블 판매량과 판매 동향을 공개했다. 예스24에 따르면 2010년 대비 2020년 우리나라 그래픽노블 판매량은 7배 증가했고, 판매 종수는 4배 증가했다.
△ 2011-2020 그래픽노블 판매량 증가추이 (자료 제공 예스 24)
* 연도별 최다 판매작(도서명/저자/출판사) - 자료 제공 '예스 24'
2010년 만화 체 게바라 평전 / 시드 제이콥슨, 어니 콜론 글그림, 이희수 역 / 토트출판사
2011년 아스테리오스 폴립 / 데이비드 마추켈리 글그림&박중서 역 / 미메시스
2012년 만화 체 게바라 평전 / 시드 제이콥슨, 어니 콜론 글그림, 이희수 역 / 토트출판사
2013년 설국열차 / 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글, 장마르크 로셰트 그림, 이세진 역 / 세미콜론
2014년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킴 그림, 해바라기프로젝트 역 / 길찾기
2015년 쥐 / 아트 슈피겔만 글그림 / 아름드리미디어
2016년 쥐 / 아트 슈피겔만 글그림 / 아름드리미디어
2017년 쥐 / 아트 슈피겔만 글그림 / 아름드리미디어
2018년 하비비 Habibi / 크레이그 톰슨 글그림, 박중서 역 / 미메시스
2019년 까대기 / 이종철 글그림 / 보리
2020년 까대기 / 이종철 글그림 / 보리
일반적으로 수년씩 연재하는 연재만화와 달리 단권으로 종결되는 경우가 많은 그래픽노블은 주요 소비층 역시 달랐다. 일반 만화 단행본, 즉 일본의 출판만화의 경우 20-40대 남성이 주요 고객이었지만, 그래픽노블은 20-40대 여성이 가장 많이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지점은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가 생겨난 원인, 즉 ‘만화의 판매 저변 확대’와 맞닿아 있다. 수십년의 시간을 돌아 한국에서 그래픽노블이 그동안 ‘잠재적 독자’로 여겨지지 않던 사람들에게 만화를 읽게 만드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작품은 한국의 작품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예스24에서 가장 많이 팔린 두 작품 중 하나인 아트 슈피겔만의 <쥐>와 닉 드르나소의 <사브리나>는 각각 1992년 퓰리처상, 2018년 그래픽노블로는 최초로 맨부커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김금숙 작가의 <풀> 역시 국내 출간보다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서 다수의 수상경력을 쌓으면서 국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케이스다. 이 지점은 한국의 만화, 특히 출판만화가 아직까지 마케팅을 통해 독자를 만나는데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전까지는 ‘작품의 이름값’ 자체가 마케팅 포인트가 되는 식이었다.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 작품이 한국에 ‘정식 발매’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픽노블 역시 비슷한 지점에서 마케팅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서 수상경력이 있는’, ‘해외 평론가가 인정한’ 등의 표현과 <사브리나>는 박찬욱 감독과 이동진 평론가가 추천사를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덜 상업적’ 이라는 편견이 작동한 것인지, 아니면 ‘더 예술적’이라는 선입견이 작동한 것인지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책을 상품의 영역에서 바라보고 마케팅을 통해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고 한국의 그래픽노블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창비는 ‘창비만화도서관’ 시리즈를 통해 틸리 월든의 <스피닝> 등 해외 명작부터 정원 작가의 <올해의 미숙>, 구정인 작가의 <비밀을 말할 시간>등의 작품을 내기도 했다. 열린책들은 임프린트 ‘미메시스’를 통해 ‘미메시스 아트 시리즈’와 ‘미메시스 예술만화 시리즈’ 등을 내놓았고, 보리출판사는 ‘보리만화밥’ 시리즈를 통해 <까대기>, <그녀들의 방>, <좀비 마더>등의 작품과 더불어 김금숙 작가의 <풀>등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방향성은 다르지만, 최근 문학동네는 자기 브랜드를 걸고 <정년이>,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등의 단행본을 내놓기도 했다.
△ 틸리 월든의 <스피닝>(좌),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아스테리오스 폴립>(우)
이들 대부분의 작품은 ‘1) 잡지 등에 유료연재가 아닌 단행본으로만 발간되며 2) 시리즈를 제외하고 단권으로 서사가 완결된다’는 특징에 부합한다. 그래픽노블이라는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작품들의 발간이 늘어나고, 해외 수입이 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독자층이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웹툰 전문 웹진 ‘웹툰인사이트’에 따르면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 2019년 ‘만화책’과 ‘그래픽노블’ 카테고리에서 펀딩에 성공한 작품은 30여종에 불과했지만, 2020년에는 80여종으로 크게 늘면서 독립출판 방식으로 출간되는 그래픽노블 역시 크게 늘었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 독립-그래픽노블-앤솔로지 <여명기>(좌), 보리출판사의 작품 <까대기>(우)
특히 총명기 팀의 <여명기>는 1억 4천여만원에 달하는 펀딩을 달성했고, 수신자 작가의 <곤>은 5천여만원을 달성하는 등 ‘여성서사’ 작품들이 강세를 보였다는 점을 볼 때 예스24의 그래픽노블 주요 독자층이 20대-40대 여성이라는 데이터와 일맥상통한다. 한국 작가의 그래픽노블은 이제 단순히 대형 출판사를 넘어 마이크로인플루언서(팔로워 1천명~1만명 사이를 가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인플루언서 그룹을 부르는 말)가 직접 자신의 콘텐츠를 판매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독자들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고, 작가-인플루언서-본인에게 더 많은 감정이입을 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세는 웹툰이다. 이를 부정할 순 없다. 이미 전체 만화시장에서 디지털 만화는 출판만화를 역전한지 오래됐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0 만화산업백서>에 따르면 만화 독자들 3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디지털만화(e북 포함)만 이용한다’는 독자가 전체의 2/3을 넘는 68.6%로 나타났다. 디지털만화와 종이만화를 모두 이용하는 독자의 비율은 27.0%, 종이만화만 이용하는 비용은 불과 4.4%로 저조했다.
독자들에게 ‘표준’은 이미 스크롤 방식으로 읽는 웹툰이다. 상대적으로 ‘더 상업적’인 작품을 소비하는 독자들에게 어떤 갈증이 있는지, 또 어떤 필요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일본의 소년만화로 대표되는 출판만화를 주로 소비하는 20대에서 40대까지의 만화 독자 중심으로 짜여 있는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독자를 만나는 장르적, 형식적 변용으로써의 그래픽노블을 조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만 아직까지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를 제외하면 독립출판 그래픽노블 중 오늘의 우리만화상이나 부천만화대상 등의 수상을 통한 마케팅을 할 수 있는 작품을 찾기 어렵다는 점은 아쉽다. 마케팅의 측면에서 조금 더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규모가 있는 출판사들이 발행하는 작품이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성 있는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창구가 부족해보이는 것은 아쉽다.
대중예술로서 만화는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상업적 우수성은 그 과정에 따라오는 ‘대중-상업예술로서의 가치’에 가깝다. 하지만 최근 웹툰시장이 주목받고 급성장하면서 ‘상업적 가치’가 곧 작품의 가치 전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렇기에 현재 상황을 ‘상업vs비상업’의 대결구도로 인식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상업 작품도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있고, 그래픽노블도 높은 상업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최근 OTT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OTT의 오리지널 콘텐츠로 만화가 주목받기 시작한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넷플릭스는 브라이언 랄프(Brian Ralph)의 2011년 그래픽노블 <데이브레이크Daybreak>를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데이브레이크>를 선보이기도 했고, 찰스 포스먼(Charles Forsman)의 <빌어먹을 세상따위The End of the Fuxxing World>를 원작으로 하는 시리즈 <빌어먹을 세상 따위>를 총 2개 시즌으로 선보인 바 있다.
또한 화려한 캐스팅으로 주목받은 <엄브렐러 아카데미>, 섬뜩한 분위기로 이목을 집중시킨 <로크 앤 키>, <워리어 넌: 신의 뜻대로>, 역시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다. 북미시장에서는 이런 OTT 콘텐츠가 런칭 될 때 맞춰 리커버 에디션을 판매하거나, 서점에서 프로모션을 함께 진행하는 방식으로 판매고를 끌어올렸다. 특히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런칭과 동시에 신작을 발매하는 등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보여 한동안 판매 순위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를 적극 벤치마킹한다면 한국의 그래픽 노블도 기존 독자를 포함해 그동안 만화독자로 포섭되지 않았던 독자들을 끌어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