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 : 늦었다고 생각 말고 지금 당장
△ ⓒ MBC <무한도전>
“늦었다고 생각할 땐 너무 늦은 거다. 그러니 지금 당장 시작해라.”
TV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개그맨 박명수 씨가 가상으로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하며 읊은 문장이다. 필자는 당시 무한도전을 ‘본방사수’하며 즐겨보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멍했다. 그때 당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문장은 계속 기억에 남아있었지만 북큐브네트웍스에서 웹툰사업부를 총괄하고 있는 요즘, 그 문장이 자꾸만 더 떠오른다. 도서정가제 때문이다.
지난 7월 출판문화진흥법이 개정되며 도서정가제(이하 도정제)에 대한 내용이 수정됐다. 그러나 기존 웹툰, 웹소설 업계에서 요구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개정되어 향후 몇 년간 업계에서는 지속적인 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점은 추가되었지만, 디지털 콘텐츠는 어디로?
웹툰, 웹소설을 비롯한 디지털 콘텐츠 업계에서는 새로운 개정안에서 디지털 콘텐츠가 별도의 식별코드 등을 통해 명시될 가능성을 기대해왔다. 하지만 개정된 도정제 법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러한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디지털 콘텐츠 사업자들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은 셈이다.
법안에는 서점에 대한 항목이 신설되었다. 하지만 출판의 역사가 수십 년 넘게 이어져 온 지금, 법적으로 서점을 재정의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기존 법안에는 서점에 대한 부분이 없어 이번에 추가했다고 하지만, 전통적으로 ‘서점’이라 하면 물성이 있는 종이책을 기본으로 한다. 이미 5G 시대를 이야기하며,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 사람과 소통하고, 온라인을 통해 재택근무가 이뤄지는 시대에 종이책을 기반으로 법이 수정되었다는 것, 그것도 새롭게 추가된 법의 개정안이 ‘종이책’만 들여다볼 뿐 디지털 콘텐츠를 놓치고 있다는 점은 쉽게 믿기 어렵다.
물론 법에서 필요하니까 서점에 대한 항목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콘텐츠 시장의 성장세를 생각하면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무래도 ‘도서’라는 개념이 종이책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도정제 자체가 종이책, 그러니까 ‘도서’ 시장을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마련했을 것이라 짐작해볼 뿐이다.
취지는 알지만, 결과는?
도정제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 도정제의 취지는 책 시장의 혼탁함을 막고 지방의 중소 서점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도정제 시행 후 몇 년이 지난 지금,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법을 만들 때의 취지대로 시장이 보호되고 활성화되어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 도정제에 웹툰, 웹소설을 포함하는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고유 식별 체계가 필요하다고 늘 이야기해 왔다. 그렇게 해온 이유는 디지털 콘텐츠의 속성 때문이다. 웹툰, 웹소설은 무형의 디지털 콘텐츠이므로, 종이로 된 유형의 컨텐츠인 도서와는 다르다. 형태가 전혀 없는 디지털 콘텐츠는 유통이 자유롭고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서비스가 가능하다. 실물이 있는 도서의 경우 보관, 물류, 유통에 들어가는 비용은 물론, 종이를 인쇄하기 위한 비용 또한 필수적인 데에 비해 디지털 콘텐츠는 이런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구매해 볼 수 있다는 것이 디지털 콘텐츠의 장점이자 특성이다.
대신 디지털 콘텐츠는 불법 복제가 쉽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는 도서정가제와는 거리가 멀다. 결국 이 같은 디지털 콘텐츠와 전통적인 도서의 차이는 기존의 도서 유통 시장과 디지털 콘텐츠 시장을 분리해서 다른 시장으로 구분해야 할 필요를 낳는다.
웹툰 플랫폼이 서점이 된다?
그렇다면 웹툰, 웹소설과 같은 디지털 콘텐츠가 도서와 함께 묶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웹툰과 웹소설의 뿌리와 관련이 있다. 웹툰, 웹소설의 태생이 ‘만화책’과 소위 ‘장르문학’에서 출발하다 보니, ‘출판사’로 등록을 한 곳에서 작품을 만들고 유통해 온 경우가 많았다. 출판사에서 출간을 하다 보니 으레 도서에 하듯 디지털 콘텐츠에도 ISBN을 붙이곤 한 것이다.
ISBN(International Standard Book Number)은 국제 표준 도서 번호로, 1970년 국제표준화기구에 의해 만들어졌다. 즉, ISBN은 디지털 콘텐츠라는 상상이 불가능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과도기에는 출판사 등이 관행이나 편리에 의해 디지털 콘텐츠도 ISBN으로 등록해왔지만 현재의 업계 실정에는 잘 맞지 않는다. 이에 한국전자출판협회에서는 ‘ECN(eBook Certification Number)’이라는 전자 출판 인증번호를 만들어 기존의 도서와는 형태가 다른 전자책에 대한 관리를 해 왔다. 필자는 이 형태가 웹툰, 웹소설을 발행할 때 가장 필요한, 그리고 업계가 주장해 왔던 것과 가장 유사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플랫폼은 서점일까? 개정된 도정제 법안에 따르면 간행물을 판매하는 곳은 서점으로 볼 수 있다. 디지털 콘텐츠를 간행물로 본다면, 웹툰, 웹소설을 서비스하는 대부분의 플랫폼들은 서점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다. 플랫폼에서 수많은 작품이 연재되고 있고, 플랫폼은 그것을 판매하고 있으니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플랫폼은 서점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서점(書店)은 ‘책을 판매하는 곳’이라는 뜻인데, 과연 플랫폼을 서점으로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플랫폼은 책만 판매하는가?
‘면세 포기하고 세금 내겠다’는 플랫폼들
이 문제에 조금 더 근본적으로 접근하면 ‘웹툰, 웹소설의 어디까지를 책으로 볼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ISBN이 다시 나온다. ISBN은 출판사업자가 등록할 수 있고, 출판업은 면세 사업자다. 출판업이 면세가 된 역사는 과거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국민의 교양과 지적 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출판업에 종사했던 선배 출판인들이 정부와 힘들게 논의를 거친 끝에 출판업은 면세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즉, ISBN을 발행받는 이유도 이 면세 혜택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ISBN을 발행받게 되면 도정제의 대상이 된다. 웹툰과 웹소설 시장이 커지기 전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만, 지난 몇 년간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웹툰 및 웹소설과 관련한 도서정가제 이슈가 불거졌다. 웹툰과 웹소설이 도정제 대상이 되면 각 플랫폼들이 그동안 진행해왔거나, 앞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 기법을 이제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미 대부분의 플랫폼에서 코인(플랫폼별 명칭은 다를 수 있으나 편의상 코인이라 칭함)을 이용하여 콘텐츠를 구매하는 방식이 자리잡았다. 이는 플랫폼뿐만 아니라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코인을 이용하는 것이 디지털 콘텐츠의 소비문화로 자리잡았다는 의미다.
특히 중소 플랫폼의 경우 코인 결제와 관련하여 ‘슬라이딩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슬라이딩 방식을 따르면 1코인당 구매가격은 플랫폼, 구매시기, 구매방법, 구매량 등에 따라 매번 달라지게 된다. 특정 기간에만 진행되는 할인 프로모션이나, 한 번에 많은 코인을 구매하면 추가 혜택을 주는 이벤트를 이용하는 식이다. 또, 코인을 구매할 때마다 포인트를 주고 그 포인트로 다시 코인을 구매하게 하여 독자들을 락인(LOCK-IN)하는 플랫폼도 있다. 이는 디지털 콘텐츠의 특성에 맞춰 더 많은 독자, 즉 소비자를 플랫폼에 안착시키기 위한 마케팅 수단이다.
△ 대부분의 플랫폼에서 한 번에 더 많은 금액을 충전하면 더 많은 코인을 추가로 증정한다.
이처럼 각각의 플랫폼은 자사 소비자들의 소비패턴에 맞추어 다양한 마케팅 기법을 활용한다. 하지만 웹툰과 웹소설에 완전한 도정제가 시행된다면 이러한 방식의 판매는 불가능해진다. 코인은 1개에서 더 쪼갤 수 없기 때문에, 2코인 작품을 1코인으로 할인하면 ‘최대 10% 할인’ 조항을 어기게 된다. 2코인짜리 웹툰을 10% 할인하려면 코인 0.2개를 할인해야 하는데, 코인을 그렇게 판매할 수 없다. 또한 프로모션 역시 시간에 맞춰 출석하면 이용권이나 코인을 지급하고, 일정 회차 이상을 감상하면 추가 보상을 지급하곤 하는데, 이 역시 도정제의 ‘10% 이상 할인 불가’와 ‘5% 이상 재화 지급 불가’라는 조항과 대치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디지털 콘텐츠 업계에서는 웹툰과 웹소설이 도정제와는 맞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부 플랫폼에서는 ‘이럴 바엔 차라리 면세 혜택을 포기하고 세금을 내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플랫폼도 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이미 기존에 형성된 시장에서 가격상승 효과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업계에서 목소리 내도 여전히 제자리걸음 중인 도정제
2019년 2월 한국 웹툰산업협회 총회에서는 각 업계 관계자들이 모여 현재의 도정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으니, 이제는 이러한 문제점들의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여러 가지 논의를 거쳤다. 하지만 그 이후 국회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쳤음에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이에 웹툰협회에서는 2020년 9월 입장문을 발표하며 2020년 11월 도정제 개정을 앞두고 “웹툰의 도서정가제 일괄 적용 요구는 전자서적과 웹툰의 장르적 차이와 유통, 마케팅 분야에서의 현격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발상이며 웹 시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한 바 있다. 또한 ‘적용하기 싫으면 빠져라’라는 식의 일부 출판계의 이해 못 할 목소리에 심히 유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결국 도정제 찬성 측에서는 웹툰, 웹소설 계의 이러한 요구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고, 답답한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했다. 디지털 콘텐츠 업계에서는 분류체계 추진 협의체를 구성하고, 협의체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웹툰, 웹소설은 별도 분류체계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문체부, 한국콘텐츠진흥원 등과의 미팅에 전달하였으나 2021년 8월 현재까지 별도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바는 없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만약 지금의 도정제가 웹툰과 웹소설에 100% 적용된다면, 코인으로 판매하는 웹툰, 웹소설 콘텐츠 업체 대부분은 정가 미표기를 함에 따라 100만 원의 과태료를 내야 하는 실정이다. 심지어 이번 법안 개정으로 이 과태료가 300만 원으로 늘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이러한 과태료를 내는 업체가 있다는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신고를 한다면, 일부 중소 플랫폼들은 확실히 위험한 상태다. 그러니까, 중소 ‘서점’을 살리겠다는 도정제가 ‘서점’으로 분류한 중소 웹툰 플랫폼을 위협하는 꼴이 된 셈이다.
업계인으로서 이번에 수정보완 된 도정제법을 보면서 법을 만들고, 여기에 찬성한 의원들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법을 만들거나 수정보완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철학과 완고함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업계에서 수년간 사용해 온 마케팅 기법이나 판매 기법 등을 하나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웹툰, 웹소설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이 시점에서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진짜 늦었으니 지금이라도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웹툰, 웹소설의 식별 체계는 전세계적으로 우리의 콘텐츠를 알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부와 유관기관이 나서서 이러한 디지털 콘텐츠 업계의 눈물겨운 노력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미래를 위한 일이다. 늦었다고 생각하면 진짜 늦은 것이니, 디지털 콘텐츠 시장의 보호를 위한 도정제의 수정 보완은 지금 바로 필요하다. 지금, 움직임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