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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만화, 꽃을 피우다 (1) : 만화 속 꽃의 의미
어느덧 겨울이 끝나도 봄인가 싶더니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지구 온난화등등을 언급하지 않아도 언제부터인가 봄은 우리에게 즐길 시간을 주지도 않은 채 급급히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라져가는 봄을 이대로 허망하게 보낼 수는 없겠지요. 이번 매거진에서는 봄의 대표주자 [꽃]을 이야기 해봅니다. 만화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 [꽃]을 보면서 다시 한번 봄을 느껴보세요.
2007-05-07
김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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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Comic & Culture ③] 만화, 꽃을 피우다
어느덧 겨울이 끝나도 봄인가 싶더니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지구 온난화등등을 언급하지 않아도 언제부터인가 봄은 우리에게 즐길 시간을 주지도 않은 채 급급히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라져가는 봄을 이대로 허망하게 보낼 수는 없겠지요. 이번 매거진에서는 봄의 대표주자 [꽃]을 이야기 해봅니다. 만화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 [꽃]을 보면서 다시 한번 봄을 느껴보세요. - 편집부 -
꽃피는 만화들
꽃은 식물학적 정의로는 속씨식물의 생식기관을 뜻한다. 하지만 벌과 나비를 끌어들이기 위한 화사한 색채와 모습에 온갖 장식적, 의식적,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순전히 문명의 산물이다. 대다수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꽃은 아름답지만 나약한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으며, 그 여성이 풋풋한 첫사랑의 소녀든 매춘업 종사자든 광범위하게 사용할 정도로 한마디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단어였고 (풀어서 “꽃을 꺾다” 라는 뜻의 deflower이 “범하다, 더럽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권이 신장된 현대 서구 국가에서 여성 전반을 ‘꽃’이라고 칭하면 오히려 모욕이 될 정도다.
물론, 꽃에 성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새 생명이 싹트는 봄과의 계절적 연관성도 있어 생명, 희망, 나아가 평화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 바로 꽃이다. 너무나 빈번히 사용된 나머지 다소 식상한 감도 있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이미지가 무기와 꽃을 각각 전쟁과 평화로 상징한 것이다. 또한 꽃은 그 장식성 때문에 생일, 결혼식, 각종 행사에서 경사스러운 의미는 물론 장례식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 밖에 연애물에서는 거의 빠지지 않는 인기 선물이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다.
만화를 포함한 대중문화 전반에서, 꽃이라는 소재는 여성의 영역으로 포용 된 듯하다. 즉 여성들에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부여된 꽃이라는 상징을 다양하게 해석해, 내용, 시각적 효과, 소재, 제목 등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되려 여성작가 자신들이며 그런 만화를 읽는 독자들 역시 주로 여성들이다. 그에 반해 주 독자층이 남성인 만화의 제목에 꽃이 들어가면 상당수가 매춘업이나 매춘여성을 다룬 성인극화 일색이니 (다른 말로, 대부분의 남성들은 꽃에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과연 서구에서 성차별 용어로 기피될 만하긴 하다. 물론 예외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만화 속에서 꽃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온 것은 오래 전부터 순정만화 쪽이고, 실제로 순정만화 하면 꽃이 휘날리는 배경과 미남미녀 등장인물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하다. 즉 앞서 말한 꽃의 장식적 특성을 살린, [미화]의 기능이다.
미화 (美化)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야말로 ‘꽃이 날개’다. 기본적으로 주요 인물들과 의상이 화려한 고전 순정만화에서는 이미 옷과 인물이 화려하니, 이것을 더 미화시켜주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금상첨화, 즉 꽃을 장식해 주는 방법만이 남았다. 대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인물이면 주위에 꽃이 둥둥 떠다니며 범상치 않은 오오라를 풍기겠는가? 오죽하면 신라의 불교 국교화에 얽힌 전설에 꽃비가 다 나오겠는가? 종교화로 치자면 후광에 비견할 수 있는, 가히 만화적 탐미성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꽃의 미화적 위력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초라한 옷을 입어도 비중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표시할 때, 꽃의 종류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를 묘사할 때, 원고에 빈 자리가 남았는데 컷을 그려넣기 적합치 않을 때 채워넣기 등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또한 평소에는 3등신 소년 국왕인 파타리로가 자신이 사랑해 마지못해 늘 즐겁게 괴롭히는 대상인 반크램을 만나는 것을 상상하는 장면에서는, 무려 장미꽃에 힘입어 금발, 마스카라, 프릴 셔츠의 3등신 미소년으로 변신하기까지 한다. 단지 몇 송이의 꽃과 누군가를 향한 가학적 애정이 얼마나 사람을 아름답게 가꾸어주는지 증명하는 바람직한 예가 아닐 수 없다. 단, 등신대나 상대방의 마음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안식처
물론 꽃이 단지 보기에만 예쁜 것은 아니다. 식물의 치유적 능력은 굳이 환경적 의의까지 꼽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만화 속의 숲이나 화원은 종종 심신이 지친 등장인물이 유일하게 평안을 찾을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하고는 한다. 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빚을 갚기 위해 스튜어디스를 그만 두고 호스티스로써 힘겹게 살아가는 [스위트 오아시스]의 주인공에게 있어 수의(樹醫: 식물 의사) 코준의 숲은 그녀가 가장 갈구하고 실제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안락한 장소,’ 즉 이상의 오아시스를 상징한다.
단편 [화] 속에서는 주인공이 수년 만에 만난 소꿉친구의 집이 꽃집이다. 싸움에 절어 친한 친구도, 믿을 수 있는 어른도 없이 매일매일을 방황하는 주인공에게 있어 어머니의 꽃집 일을 돕는 친구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 그대로이고, 따라서 처음에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는 불편함을 느낀다. [화]에서 안식처로써의 꽃집이라는 장소는 친구의 존재와 겹쳐지며, 점차 주인공의 마음에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게 된다.
직업
여기서 잠깐. 안식처도 오아시스도 다 좋지만, 유념할 점은 위의 두 경우에서 꽃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은 이야기의 주체인 주인공이 아닌, 언제까지나 상대역이라는 사실이다. 정원이나 꽃집을 들르는 사람이야 그저 편히 쉬고 꽃을 감상하기만 하면 되지만, 정작 그 꽃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피난처도, 안식처도 아닌 치열한 직업의, 생활의 장일 뿐이다. [아마릴리스]의 주인공 모모타처럼 아직 서투른 꽃집 주인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아버지는 병환에, 아르바이트 직원은 버르장머리 없고, 일은 익숙치 않고, 손님들의 주문은 까다롭고, 무엇보다 짝사랑하는 옛 직장 동료는 너무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걱정이다. 심지어 연적이 될지도 모르는 여성의 꽃다발까지 만들어줘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억누르고 아름답고 이 세상에 하나뿐인 부케를 만드는 데 힘쓴다. 사람들에게 꽃을 통해 안식처를 주는 것, 소소한 편안함이나 기쁨을 주는 목적에 모든 것을 거는 직업이니까.
마음
그렇다면, 꽃집에 오는 손님들은 어떤 마음을 꽃다발에 담고 싶은 것일까. 직업이나 영리를 떠나서 자신의 화원을 가꾸는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꽃을 피어내는 것일까. [그는 화원에서 꿈을 꾼다]의 화원이라는 장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주인공이다. 사랑이 없는 남편이 전장에 나간 동안, 부인이 성안에 가꾸어 놓은 화원은 그녀의 유일한 표현 수단이다. 그리고 그 화원은 사랑이 태어난 곳이자, 죽는 곳이고, 헤어지고 또다시 만나는 곳이며, 무엇보다 구원과 희망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미 전설적인 [유리가면]의 보라색 장미는 마야의 최초의 팬이 보낸 선물이자 마음의 버팀목이고, 실제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수수께끼의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를 상징한다. 또한 보라색 장미를 보내는 장본인인 마스미에게는, 현실적으로 자신의 입지 상 표현할 수 없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마야를 향한 호의를 유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자 일종의 가면이다. 보라색 장미가 실존하지 않는 만큼, 보라색 장미의 사람이란 존재 역시 주는 이와 받는 이 양쪽에 있어 일종의 환상이지만, 동시에 진심이다. 현실이 워낙 번잡하고 추하니, 환상의 형태를 빌려서만 존재할 수 있는 진실된 마음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15세에 야쿠자 두목이 된 [격투맨 바키]의 하나야마 카오루에게 손에 잡히지 않는 환상 따위는 없다.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장미 향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건강하던 시절의 그녀를 떠올리고, 맨손 주먹으로 장미 꽃잎을 짓이겨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장미 엑기스를 어머니에게 선물한다. 바로 전날 복싱 선수의 팔을 무참히 부러뜨린 그 악력이 어머니를 위해 장미 꽃잎을 쥐어 짜내기도 하는 묘한 대조가 하나야마 카오루라는 한 인물에 공존하는 파괴성과 섬세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게 한다.
받고 싶지 않은 꽃
영주나 마야, 하나야마 카오루의 어머니는 행복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심 어린 꽃을 선물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쁘더라도 받고 싶지 않는 꽃도 있는 법,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취중진담] 중 [종착역] 편의 친구는 죄다 시집 가서 떠나가고 홀로 남겨진 노처녀 주인공에게 던져지는 꽃다발이다. 몇 번이나 꽃다발을 놓진 그녀를 가지고 숙덕이는 하객들, 그 속에서 그녀, 얼마나 처절하고 심란한 마음이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그녀보다 더 처참한 꽃다발을 받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역시 카이지가 받는 꽃다발을 꼽을 수 있겠다. 지옥 같은 도박선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카이지, 생환 축하 꽃다발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을 주는 것은 바로 자신을 그 도박선으로 끌고 간 장본인인 야쿠자 엔도. 그런 사람이 들고 온, 그것도 생환 축하 꽃다발을 받고 기뻐할 수 있을까? 병 주고 약 주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음침하게 연출된 장미꽃다발과 카이지의 복잡한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추억
꽃은 매년 새롭게 피고, 지고, 다시 땅속의 양분을 흡수해 다시 핀다. 땅 속에 사람의 시체가 있든 카멜레온의 시체가 있든 말이다. 벚꽃의 원산지야 어쨌든 아마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벚꽃에 의미부여를 해온 국가는 일본이고, (사실 식물의 원산지는 문화적 지역성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런 원리대로라면 무궁화는 중동, 혹은 중국이 원산지인 꽃이니 우리나라 국화가 될 수 없다.) 그곳에서 나온 이야기가 바로 벚꽃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는 말이다. 단순한 괴담이나 오랜 무사 문화 특유의 잔인성이라고 치부해버리기 쉽지만, 언제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사사키 노리코의 만화답게 [헤븐]에서는 그에 대한 꽤 합리적인 해석이 나온다. 즉, 꽃구경은 ‘무의식의 성묘’라는 것이다. 작품 중에서는 정말로 묘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꽃구경을 하는 동네 사람들로 가득하긴 하지만, 동시에 앞서 꽃나무는 지난 해의 죽어간 흔적을 양분 삼아 새 생명을 흩날리는 존재임을 상기해 보자. 상징적인 의미 뿐이 아닌 아주 물리적인 차원에서도, 봄에 피는 꽃들은 문자 그대로 과거의 추억, 기억들이 오래되어 묻히고 썩고 분해되 새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난, 그야말로 추억의 가장 아름다운 면만을 모아둔 결정체가 아닌 것일까. 화사한 꽃을 보며 즐기고 기뻐하지만, 그것이 기쁜 것은 무의식 중에 과거와 추억에 대한 성묘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봄꽃을 볼 때마다 한번 즘 생각해 보게 된다.
꽃은 화사하고, 평안을 주며, 사랑을 담고,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덧없이 나약하게 지는 것 같지만 새 생명을 담고, 희망을 싣는다. [꽃피는 남자] 마에다 케이지, 피비린내 나는 전국 시대에서 아랑곳 없이-아니, 오히려 그런 시대일수록 꽃이 필요하기에-화려하게 호탕하게 살아가는 그 남자처럼, 각자의 인생도 멋지게 꽃피워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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