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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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웹툰에선 불청객… 구영탄 아빠 고행석 화백을 만나다

198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한국 사람치고, 졸린 눈에 꺼벙하게 생긴 ‘구영탄’이라는 만화 주인공을 모르면 간첩이 분명하다. 고(故)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 허영만 화백의 이강토, 이현세 화백의 설까치(오혜성), 고 박봉성 화백의 최강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우리 만화의 최고 스타였다.

2016-11-25 홍지민

198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한국 사람치고, 졸린 눈에 꺼벙하게 생긴 ‘구영탄’이라는 만화 주인공을 모르면 간첩이 분명하다. 고(故)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 허영만 화백의 이강토, 이현세 화백의 설까치(오혜성), 고 박봉성 화백의 최강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우리 만화의 최고 스타였다. 한없이 게으르고 세상에 무관심해 보이다가도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대표적으로 박은하-이 위기에 처하면 숨겨놓은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곤 한다. 당대 유행하던 남자 주인공 캐릭터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던 독특한 존재로, 유쾌한 웃음과 눈물, 감동을 주곤 했다. 만화방(대본소) 앞을 지나다가 구영탄이 주인공인 ‘불청객’ 시리즈의 신작이 나왔다는 게시판을 보면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만화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구영탄이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세상을 선물한 것은 고행석(68) 화백이다. 최근까지도 대본소 만화에만 주력해 웹툰을 즐기는 요즘 세대는 알듯 말듯한 이름이 됐다. 지난해부터 웹툰에 도전하고 있다는 고 화백이지만 아직 큰 반향은 없는 상황. 얼마 전 네이버 웹툰의 한국만화거장전을 통해 만화가로 살아온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독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다.
구영탄은 세월이 흘러가며 독한 눈매에 악 다문 입의 ‘악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만화계 동료인 이희재 화백은 바보처럼 순박하게 살아도 좋았던 시절이 가고 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된 시대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웹툰 시대, 구영탄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고 화백 화실을 찾아가 봤다.


Q. 웹툰이 대세라 현업에서 거리가 멀어진 느낌도 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A. 신문 잡지 연재 작가도 있고, 웹툰 작가들이 있지만 난 대본소 작가를 줄곧 해왔다. 지금도 하고 있는데 상황이 열악하다. 20년 전 만해도 전국에 대본소가 1만 5000곳이나 됐는데 지금은 500군데 정도 남았다. 3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드니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내 스토리 고료를 빼더라도 권당 제작비가 최소 100만원 들어가는 데 들어오는 것은 80만원이다. 그런데 타이틀을 낼 때마다 500군데가 꼬박꼬박 사주는 것도 아니다. 한 타이틀 걸러 사주곤 한다. 대본소도 자기 수입에서 책 사는 돈은 빼야 하니까 책을 덜 사려고 한다.

Q.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롭게 변신한 만화방들도 나오고 있다. 사정이 그렇게 안 좋은 것인지.
A. 재개발, 재건축의 개발붐을 타고 대본소가 많이 없어졌다. 임대료가 비싸지니 대본소를 하려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대본소가 1000여 곳이던 4~5년 전만 해도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좀 늘어나지 않을까 희망도 품기도 했었다. 대본소 작가 입장에서는 동남아에서 그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쪽도 인건비가 올라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한다. 대본소 전문 작가는 나를 비롯해 황성, 사마달, 묵검향, 박봉성, 김성동 등 대여섯 명 정도 남았다. 실제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하는 것은 나와 황성 정도다.


Q. 요즘은 한 달 기준으로 어느 정도 작품을 하는지.
A. 전문적으로 스토리를 쓰는 사람이 한두 명 있을 때는 정말 많이 그렸다. 지금은 혼자 쓰니까 많아야 10권정도 될까 싶다. 한때는 화실 식구가 백 명 가까이 됐는데 이젠 데생도 1명이고 몇 명 안 남았다. 늙은이가 측은해 곁에 있어주는 것 같다. 허허허.

Q. 아이큐 점프나 소년 챔프에 ‘전설의 야구왕’, ‘마법사의 아들 코리’ 등을 연재하며 큰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잡지 연재를 많이 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인지.
A. 그 때는 내가 대본소 쪽에서는 너무 유명해서 잡지에서 먼저 원고 청탁이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잡지 원고료가 대본소 원고료보다 적었다. 그래서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잡지 연재를 귀찮아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대본소가 잘되니 굳이 잡지를 하지 않아도 됐던 거다. 그때는 대본소가 평생 갈 줄 알았다. 나중에 돌이키니 그 때 그 길로 갔어야 했나 후회가 컸다.


Q. 만화방 단골 시절을 돌이키면 처음 1, 2권 정도는 작화가 꼼꼼하다가 그 이후부터 문하생이 대신 그리는지 퀄리티가 떨어지는 게 아쉬웠는데.
A. 대본소에선 고행석 이름만 붙으면 그냥 팔렸다. 작가가 그런 태만한 짓을 하니까 망해버리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다작을 많이 했다. 어떤 작가는 한 달에 100권 넘게 하고 그랬다. 그러니까 공장장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거다. 지금 대본소는 무협 마니아만 가는 장소가 됐다. 무협이 아니면 잘 안받아준다. 한국 대본소 작가는 책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일본 만화가 굉장히 싸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국내 대본소 만화보다 두껍고, 종이 질도 좋고 그림도 촘촘하고 잘 그린 작품이 수두룩하다. 일본은 대여섯 명이 석 달에 한 권 그린다는 데, 우리는 대여섯 명이면 한 달에 10권 이상 그려야 한다. 그런데 일본 만화는 우리 대본소 만화보다 가격까지 싸다. 경쟁이 안 되는 거다.

Q. 원로 작가들의 웹툰 도전 사례가 늘고 있는데.
A. 대본소 상황이 워낙 좋지 않으니까 몇 년 전부터 주변에서 웹툰을 해보라고 많이들 권유했다. 그래도 대본소가 살아날 것이라고 미련스럽게 버티다가 회생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지난해부터는 웹툰 쪽으로 기웃거리고 있는 중이다. 한 1년 반이 넘었다. 네 타이틀 정도 공을 들였다. 웹툰 형태는 아니지만 올 컬러로 작업한 범죄물 ‘디아블로’를 레진코믹스에 연재한 적이 있다. 먼저 종이 원고에 그리고 포토샵으로 옮겼다. 스크롤 방식이 아닌 페이지뷰 방식으로도 해도 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제작비의 반도 건지지 못했다. 미스터블루 등 몇몇 만화 사이트에 올라간 범죄물 ‘해피버스데이’도 종이 원고 작업한 것을 오려서 스크롤 방식으로 이어 붙여본 정도다. 판타지 장르 등 웹툰 방식으로 작업한 게 있는데 여러 플랫폼에 보내봤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 칠 십 가까운 나이 때문에 꼰대처럼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옛날 대본소 작가에 대한 안 좋은 인식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대본소 작가는 만화가가 아니다, 공장장이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웹툰을 우습게 보고 덤벼서 몰랐던 게 많았다. 요즘은 조금씩 알만해져 가는 데 아직 결실이 없다. 나름 신중하게 그리고 있는데도 상당히 어렵다. 그간 웹툰 해보겠다며 제작비를 2억원정도 들였는 데 결과가 미미해 사실 좀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때가 있을 것 같다.


Q. 기존 작법과 웹툰은 어떤 점이 달랐는지.
A. 장편 위주로 해왔기 때문에 이야기를 길게 잡는 게 문제인 것 같다. 호흡도 다르다. (웹툰 기획자들이) 간략하면서 리얼하게 묘사해주는 것을 원하는 것 같다.

Q. 후배 작가의 웹툰 중 눈 여겨 본 작품이 있는지.
A. 쭉 연결해서는 못 보는 형편이다. 이 작품 저 작품 공부하듯 들여다보고 있다. ‘프리드로우’, ‘하이브’, ‘치즈 인 더 트랩’ 등이 생각난다.


Q. 장기였던 코미디, 개그물이 웹툰 시대에도 유효할 것 같은데.
A. 슬픈 이야기인데, 웃기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대본소에서 살아남으려고 한 10년 정도 자극적이고 잔인한 성인물을 그리고 있다. 다시 코미디를 해보려니까 잘 안되더라. 옛날에는 코믹한 작품을 그리기 위해 영화나 유머 관련 책을 보며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코미디를 잘하면 슬픈 이야기는 저절로 나온다. 사실 요즘 유행하는 웹툰을 보면 어디가 웃을 타이밍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하다. 자신이 없어져 다시 하려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것 같다.

Q. 팬들은 불청객이 웹툰에서 부활하기를 기대할 것 같다. 불청객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A. 또래들은 20대 초반에 데뷔한 경우가 많은데 난 34개월 군대 다녀와서 스물다섯에야 상경한 뒤 간신히 문하생 생활을 시작했다. 한 10년 정도했던 것 같다. 데생, 마스크, 터치, 배경, 먹칠에 스토리까지 다한 적도 있었다. 또 3년간은 한 만화 출판사에서 (안팔리는) 죽작가 신세로 지내며 서러움과 수모를 많이 겪었다. 만화방 일도 보며 골방에서 작업하던 시절이었다. 잘나가는 작가와 안 팔리는 작가는 대접부터 달랐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 신경과민에 시달릴 정도였다. 그 시절 이야기는 거장전에서 자세하게 다뤘다. 어느 순간엔가 내가 잘못살고 있다는 생각에 한 번 독하게 해보자고 낸 게 히트를 쳤다. 갑자기 만 몇 천 부가 나갔다. 그게 ‘요절복통 불청객’이다. 내용은 이런 거다. 팔이 잘 부러지는 주인공인데, 매일 깁스한 채로 살아야 하니까 발로 밥을 먹고, 발가락으로 모든 것을 해야 했는데 어느 날 은하라는 여학생 집에 얹혀살게 됐는데 은하는 질색을 하고…. 그런 이야기에서 불청객이라는 콘셉트가 나왔다. 그때 기존에 그리던 주인공 얼굴도 바꿨다. 이전에는 주인공 눈이 멀쩡했다. 신경과민에 시달리면서 깨달은 게 느긋하게 사는 게 좋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얼굴의 주인공을 쓰면 그리는 나도 마음이 편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항상 졸리는 눈의 주인공을 만들었다. 아무것도 관심 없고 미련도 없고 그런 주인공이다. 이름은 불청객 시리즈 이전부터 구영탄을 사용했었다. 집집마다 있던 구멍 아홉 개의 연탄을 보고 떠올렸다. 구공탄이면 왠지 천박할 것 같아서 구영탄으로 정했는데 독자들이 쉽게 외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 졸린 눈의 구영탄도 나중엔 매서운 눈으로 변했는데.
A. 그렇게 인기 있던 불청객 시리즈도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청객 시리즈를 대본소에서 총판에서 받지를 않으려고 할 정도였다. 당시 대본소 전문 작가가 21명 정도 남았는데 거기서 19등을 할 정도 판매부수가 떨어졌다. 그래서 2000년부터 변신을 꾀한 게 악질 시리즈다. 구영탄의 눈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악질 시리즈도 그리 오래하지는 못했다. 불청객 때도 그랬지만 포맷만 이리저리 바꿔놨지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우려먹은 결과였다. 어느 순간 불청객 이름이 부끄러워졌었다. 악질도 그래서 접었다. 최근 한 5년 정도는 일본 범죄, 스릴러 소설을 참고서 삼아 성인 만화를 그리고 있다.

Q. 수많은 작품을 했는데 그중 가장 아끼는 작품은.
A. 얼추 잡아 지금까지 500 타이틀 정도 한 것 같다. 아무래도 ‘요절복통 불청객’에 가장 큰 애착이 간다. 그리고 ‘전설의 야구왕’도 생각난다. 그 정도 정성을 들인 작품이 따로 없다.

Q. 구영탄닷컴(www.guyeongtan.com)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A. 한 달에 1만 2000원 내고 내 작품을 보고 또 보고 할 수 있는 곳인데, 진짜 고행석 마니아, 진짜 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온다. 크게 수익이 나는 것은 아니다.


Q. 어려서부터 꿈이 만화가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A. 김종래 선생님 그림을 너무 좋아해서 그 책을 갖다놓고 백날 흉내 냈다. 나에게는 신적인 존재였다. 맨날 칼 들고 나오는 시대극으로 연습했는데 정작 만화가가 되고 나서는 그런 장르의 작품을 하지는 못했다. 허허허.

Q. 후배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오히려 후배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야할 입장이다. 웹툰을 배워야 한다. 젊은 작가들과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워낙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쉽지 않다. 굳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십 년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물러나기는 좀 억울한 것 같다. 세대차가 있겠지만 만화 그리는 감각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매일 만취한 상태에서 작업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 때는 6시간을 넘으면 집중이 안됐다. 요즘은 담배도 끊고 술도 끊으니 머리도 맑고 집중력이 늘고 10시간을 작업해도 피곤하지 않다.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