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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성, 40년 만의 최초 인터뷰

박부성작가의 40년 만의 최초 인터뷰!!

2010-07-14 박인하


일시 : 2010년 4월 12일
장소 : 청강문화산업대학 청강만화역사박물관


Q. 1961년 박기정의 「가고파」, 연이어 박기준의 「고향눈」을 그리셨는데, 순정적인 스타일로 데뷔하셨다.
A. 그렇다. 둘 다 순정작품이었다. 두 작품을 끝낸 뒤 시작한 것이 「산소년」이었다. 주인공 진식이를 만들어 전혀 다른 설정으로 데뷔했다. 실질적으로 내 데뷔작품은 「산소년」 그리고 「명견루비」일 것이다.


△ 박부성 작가


Q. 선생님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작품이 「명견루비」일 것이다. 왜 독자들이 그 만화를 기억할까?
A. 그 때 당시는 개를 주인공으로 해서 진식이라는 아이하고 인간보다 진한 우정을 가지고 교감하는 작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꽤 어필한 것 같다.

Q. 1960년대 계속 순정풍 만화를 작업했다.
A. (웃음) 뭐 한 10년은 좋았다.

Q. 어떤 작품이 반응이 제일 좋았나?
A. 아무래도 「명견루비」를 제일 좋아했죠. 「산소년」은 거기에 배경이 산 속이고, 조금 아이들에게 생소했는지 「명견루비」하고,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을 많이 다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는 게 만화 아닌가? 그래서 요술지팡이라거나 유람선이라거나 시골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많이 했다.


Q. 선생님 고향은 북한이시죠?
A.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다. 계월희 선생도 아마 정주 근처였을 것이다. 우리 집이 1948년도에 월남했다. 6.25 나기 전에 강제로 밀려 내려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10살 때였다. 내가 「고향눈」을, 물론 박기준씨가 한 것이지만 내대에 와서 완성을 한 것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내 고향 이야기를 체험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충청도에 와서 정착했는데, 주로 충청도 이야기가 많이 있다. 고향이야기는, 진식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진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했다. 「진식이의 피난살이」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 자전적 타이틀이 한 50에서 70편 되지 않을까 한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겠다. 나중에는 타이틀 달기가 고민이었다. 그 당시는 ‘진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계속 나왔다. 진식이 하면, 월남, 피난살이 뭐 이렇게 계속 되었다.


Q. 월남하셔서 충청도에서 계속 지내셨나?
A. 경상북도 접경, 황간에서 한 8년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 때 이야기가 작품에 제일 많이 반영되었다. 「고드름」이라거나, 시골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래서 주인공 중에서 충청도 기질을 가진 주인공도 등장하고, 뭐 그런 게 있었다. 진식이는 나니까, 그 아이는 평안도라고 안 그래도 기질이 평안도다. 뭐, 사투리는 안 썼지만.




△ 명랑가족 앞뒤 표지



Q. 작품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A. 제가 클로버문고에서 데뷔를 했으니까 그쪽 돈도 좀 벌어줘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출판사가 원하는 대로 다작을 했다. 만화가 나가면 80 정도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화생도 많이 두었는데, 스토리는 전부 내 머리에서 나왔다. 그렇게 짜내다 보니까 나중에 고갈되어서 안 나오더라. 새 스토리를 짜도 옛날에 했던 것이고.


Q. 그런데, 남아있는 작품들 찾기가 힘들다.
A. 저도 많이 아쉽게 생각한다. 그나마 저는 다작을 해서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이민을 안갔다면 보관했을 것. 어느 날 물난리가 나서, 많은 작품들이 훼손되었다.

Q. 1960년대에 주로 활동하셨는데, 잡지는 안하셨나?
A. 거의 대본용을 했다. 클로바문고를 하다가, 마지막에 소년한국일보사에 3년인가, 4년인가 있었다. 그 때는 벌써 진이 다 빠졌을 때다. 원로라는 이름가지고 한국일보사에서 대접받았는데 그것도 좀 괴롭더라고. 권수를 제한하기도 하고. 조금 회사 사정이 그러니까 한 권만 줄여주시오. 그러니까 자존심 많이 상하더라.

Q. 그래서 이민을 가기로 결심한 것인가?

A. 아마 그런 것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만화가들이 인기가 없어지면 죽음 목숨이다. 한다는 것이 만화 출판을 해 보자, 그런 정도. 그게 성공한 사람 하나 없다.



△ 해저탐험대 앞뒤 표지


Q. 근황이 궁금하다.
A. 요즘 만화는 책방에 가보니까 가장 큰 공간에 만화가 있더라. 그걸 보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책도 잘 만들어 나오고. 내용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 쌓여있어서. 미국에는 일본만화가 들어와있다. 미국 사람들 그리는 것은, 옛날에 코믹북이라고 하던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은 추세가 그러니까 더 두껍게 만들어서 잘 한다. 요즘 영화같이 그런 스토리가 많아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


Q. 괜찮으시면 펜을 잡고 작업을 다시 해 주시면 어떨까?
A. 소위 자서전적 화집을 한 번 만들어보려고 한다. 젊어서는 생각을 안했다. 이민 가서는 살기 바쁘니까. 은퇴하고 애들이 칠순잔치를 조촐하게 해 줬는데, 그 뒤 생각해 보니까 내 삶을 그냥 무덤을 가져가기가 아쉽더라. 내 어릴 적 삶의 모습, 피난시절 얼마나 어려웠는가. 진솔하게 그런 걸 남겨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작업한 지 한 2년 되었다. 하다보니까 좀 욕심이 생겨, 그냥 할게 아니라 고향 이야기를 하면 고향의 사투리가 있다. 예를 들어 농기구 명칭이 다 다르다. 달마구가 뭔지 아시는가? 단추다. 그런 고증도 넣고 싶었다. 내가 어렸기 때문에 시대적인 걸 잘 모르지만, 시대적인 고증도 가미시키고. 그래서 느리다. 맘이 급한데 요즘은 손이 떨려서 참 큰일이다.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아이들에게 남겨주려고 한다. 만화처럼은 아니고 민속화로 그렸다. 그림하고 설명을 정리해 놓고, 지금 피난 나오려는 순간인데, 벌써 100점을 그렸다.



이름과 몇 권의 작품으로만 남은 작가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건 만화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또 독자의 입장에서 즐거운 일이다. 은퇴 이후 근 30년 만에 다시 펜과 붓을 든 박부성 작가를 응원하며, 이후 전시나 책을 통해 선생님의 작업을 계속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필진이미지

박인하

만화평론가, 서울웹툰아카데미(SWA) 이사장
웹툰자율규제위원회 위원
前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 前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前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정책그룹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