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 만화방 만화의 전성시대. 가장 대중적인 레이블인 클로바문고에는 세 명의 박 씨 성을 가진 작가가 있었다. 박기정, 박기준 그리고 박부성. 사람들은 이들이 모두 형제인줄 알았다. 만화계를 주름잡는 세 명의 박 씨 형제, 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장르적인 차이가 있었지만 그림 스타일이 비슷했고, 한 출판사에서 작품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박기정과 박기준은 형제였고, 박부성은 형제가 아니었다. 박기정이 순정과 액션만화 그리고 스포츠 만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다면, 박기준은 조금 더 명랑만화에 가까운 작품을 그렸고, 박부성은 주로 서정적 만화를 그렸다.
△ 명견루비 2권 앞뒤 표지
박부성하면, 「명견루비」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 만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액션만화나 모험만화보다는 사람과 개의 교감을 다루는 따뜻한 서정만화에 가깝다. 박기준은 자신의 저서 「한국만화야사」에서 박부성에 대해 “1960년대의 걸작으로 유명한 박부성씨의 「산소년」, 「유람선」, 「명견루비」 등을 모른다면 아마 간첩으로 몰렸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고향의 향수를 일깨워준 솜사탕 같은 작품으로서 북쪽에 두고 온 고향을 노래해 성공한 작가”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1960년대를 풍미한 ‘쓰리박’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작품의 완성도, 당대의 인기 등에 비해 지금까지 연구성과는 미비하다. 1960년대의 주요 작가로 거론되기는 하지만, 「명견루비」 정도의 작품만 알려졌지, 「유람선」, 「산소년」이나 자전적 만화인 ‘진식이 시리즈’ 등 당대를 풍미한 작품의 가치는 평가되지 않고 있다.
박부성 만화가 갖는 장점은 서정성이다. 당시 크로바문고를 운영하던 만화가 박기준은 1960년대 만화는 “대도시 독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내용”만을 펴냈다고 한다. 액션만화, SF, 탐정만화 등이다. 소녀 팬들을 겨냥한 만화라면 공주만화여야 했다. 그런데, 박부성의 만화는 까까머리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풍모부터 웃음을 주려하거나, 멋있게 보이려하지 않고 그저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까까머리 소년 그대로다. 「산소년」은 산에 사는 소년의 모험을 다루었고, 「명견루비」는 개와 소년의 교감과 우정을, 그리고 자전적 만화인 ‘진식이 시리즈’는 고향 이야기를 다루었다. 박기준은 그런 그의 만화를 이색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 출간을 결심했고, 박부성은 인기 작가로 부상했다고 한다.
박부성 만화가 지닌 서정성의 원천은 고향이다. 10세까지 살았던 평안북도 정주의 풍경. 그리고 피난 와서 정착했던 충청북도 영동 황간의 풍경이 만화에 다양하게 반영되었다. 1938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박부성은 1948년 월남해 충청북도에 정착했다.
“경상북도 접경, 황간에서 한 팔년 정도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 때 이야기가 작품에 제일 많이 반영되었다. 그래서 내 만화에 「고드름」이라거나, 시골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많다.”서울대 미대를 다니던 박부성은 빼어난 작화 실력을 인정받아 문하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1961년에 데뷔했다.
“데뷔는 1960년대인가, 1961년인가? 내가 데뷔한 해에 5.16이 일어났다. 1961년에 데뷔했다.” 박부성은 특이하게 스승인 박기정의 작품을 이어 받았다.
“데뷔작품은 박기정 선생이 하던 「가고파」라는 만화가 있다. 그 분이 그 작품을 3편, 상중하로 끝냈다. 그런데 박기정 선생의 문하에 드나들다 보니까, 후속편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해서 그걸 했다. 이름을 아마 그때 형제처럼 하려고, 박부성으로 했다. 원래 그 댁이 기자 돌림인데, 박기세, 박기정, 박기준 그리고 원로 만화가 중에서 박기당이 있었다. 아마 기자 돌림으로 적당한 이름이 없어서 전혀 엉뚱하게 박부성으로 했다. 그렇게 만화계에 데뷔했다.”
박부성의 본명은 이세희다. 많은 독자들은 크로바문고(크로바문고는 시리즈의 레이블이고 출판사는 명진문화사, 신진문화사, 영진문화사 등 이었다.) 레이블에서 같이 출간되는 박기정, 박기준, 박부성이 모두 형제 작가인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자들에게 첫인상을 심어주는 캐릭터의 모습이 세 작가가 모두 비슷하다. 박기정 작품이 붓 터치를 더 많이 사용했고, 얼굴 모양도 다양하게 그렸으며, 주로 이마가 튀어나온 캐릭터를 활용했고, 박부성은 펜 터치를 더 많이 사용했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큰 맥락에서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박기정의 「가고파」를 그리며 데뷔한 박부성은 박기준의 「고향눈」도 이어 그리게 된다. “운이 좋았던지 「가고파」가 인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박기준 씨가 내 만화인 「고향눈」이 끝났는데, 이 만화를 계속 해 봐라 하더라구. 그래서 양쪽을 다 했다. 두 작품을 꽤 여러 편 했다.“

△ 까까중 앞뒤 표지
1960년대에 만화를 즐겼던, 연로한 독자들에게 물으면 훈이, 두통이에 버금가게 진식이라는 주인공을 기억한다. 진식이의 탄생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처음에는 주인공도 훈이를 그대로 썼다. 내가 그 작품(「가고파」)을 맡아서 하다가, 주인공 훈이를 혁명가로 해서 외국으로 망명시켰다. 그 때 변장을 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하다가 머리를 깎았다. 훈이는 머리가 새까맣고, 내 주인공은 머리가 상고머리다. 그래서 ‘진식이’라고 하는 캐릭터가 탄생했다.” 박기정, 박기준, 박부성 세 작가는 모두 1960년대를 풍미한 작가였고, 대중적인 작가였다. 작화의 스타일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내용적으로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박기정은 1960년대 초기 순정,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시작했다가 점점 스포츠, 액션을 중심으로 남성적 만화를 그렸다. 반면 박기준은 ‘두통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올림픽 소년」 같은 시리즈물을 그렸다. 반면 박부성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향’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 명견루비 12권 앞뒤 표지
대표작인 「명견루비」를 보자. 시골이 배경이다. 엄마와 떨어져 혼자 남은 루비가 어린 진식이를 돌보며 만화가 시작된다. 이후 다양하게 변주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자연, 동물과 인간의 교감 등이다. 박기정의 작품을 이어서 완성한 「가고파」나 박기준의 작품을 이어서 완성한 「고향눈」도 모두 체험적 고향이야기다. “내가 「고향눈」을, 물론 박기준씨가 한 것이지만 ‘내대(代)에 와서 완성을 한 것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내 고향 이야기를 체험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충청도에 와서 정착했는데, 주로 충청도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이밖에 「고드름」, 「산소년」 등의 작품도 뼈대는 자연의 이야기다. 박부성의 만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자연 속에서 어우러진 순박한 소년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물론 여러 장르의 만화들도 많이 있지만, 중심을 이룬 작품 스타일이 그랬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1981년도에 한국을 떠났다. 만화에 대한 비우호적인 시선, 작품 아이디어의 고갈 등 여러 문제가 겹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뉴욕에서 정착했다. 미국으로 떠난 첫 해에는 세탁소를 시작했다. 그 뒤 화랑으로 바꿔 거의 20년을 운영한 뒤 은퇴했다.
“1981년도에 도미했다. 만화는 그리지 않고, 뉴욕에서 화랑을 운영했다. 거의 20년 정도 운영했다. 은퇴한지는 한 8년 정도 되었다. 미국의 화랑은 여기 화랑과 좀 성격이 다르다. 포스터 팔고, 프레임 만들고 그런다. 전시관이 화랑이 아니고. 둘이서 자그마한 것 운영하면서 지냈다. 지금은 은퇴했다.”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1960년대를 풍미한 작가가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박부성은 미국으로 이민간 뒤, 만화와는 완전히 연을 끊었다.
△ 박부성 작가
“전혀 하지 않았다. 무 자르듯, 완전히 다른 생활을 했다. 아이들 공부 시켜야 되고, 우리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거기만 전념했다. 30년 동안. 요 최근에 만화박물관도 생기고, 수집을 해서 많이 보관도 하는 움직임이 있어서, 내가 참 사람이 앞날을 내다볼 줄 알면 잘 보관해 둘걸 하는 후회를 많이 했다.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었거든, 그래서 크게 애착을 갖지 못했다.”
1960년대 만화에 대한 사회적 처우는 원로 작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서정적이면서 자연과 고향을 주로 그린 만화는 심의와 큰 연이 없는 듯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요즘 만화가 분들 많이 행복하겠다. 윤리위원회가 생겼죠, 옛날에 영화를 막 가위질 하던 때. 심심하면 자기들도 뭔가를 많이 정화했던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냥 막 잘랐다. 참 자존심 많이 상했다. 일단, 한번 수정이 걸리면 이 스토리는 뭐가 문제니까 고치라고 나온다. 다시 넣으면 다시 재차 심의가 나오는 게 있다. 그러면 집어던지고 싶은데, 출판사와 관계도 있고, 원고료도 받았고. 할 수 없다. 하라는 대로 고쳐야한다. 부분적으로 이 스토리 전체가 ‘어때서 문제가 있다’라고 나오면, 스토리를 다시 하라는 말이다. 참 골치 아프다. 가려던 방향을 바꿔야 되니까.”
작가의 경험을 물어보았다. 전체를 다시 작업한 적도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최대한 고쳤다. 다작을 했으니까 스토리가 바뀌어도 전혀 지장이 없으니까.” 내가 본 범위에서 박부성 만화는 그야말로 어린아이들의 맑은 동심을 다룬 만화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심의에 걸렸을까? “주로 반공에 대한 내용이 있었고, 아이들 정서를 해친다고 언어에 대한 것. 또 이런 것이 있고 소위 시골에서는 발가벗고 멱을 감는데, 남자 아이들 여자 아이들 할 것 없이. 그러면 팬티를 입혀라. 그러고, 또 입히면 너무 짧다고 그러고. 내가 어렸을 적 시골에 살았는데, 무슨 팬티를 입나? 훌렁 벗고 들어가지. 옷을 물에 적시면 안 되니까.”
참 힘든 세월이었다. 그런 세월을 겪으며 박부성은 서정적이면서 유쾌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1년 한국을 떠난 뒤, 2010년 근 30년 만에 한국 땅을 찾아 자신의 오랜 자식들과 해우했다. 그가 그려준 그림에는 이제 백발이 성성한 작가 자신의 모습과 그런 그를 찾아온 진식이와 여러 캐릭터들이 보였다. 까까머리 남자 아이들과 단발의 여자 아이들이 반갑게 안고 있는 모습이 왠지 가슴이 찡하다. 어려웠던 그 시절, 어린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 박부성의 작품을 2010년 풍요의 시대에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