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을 듯 말 듯 한 꿈을 그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단편을 보여주는 이정현의 작업들은 역시나 꿈의 모호함과 난해함으로 이끈다. 자신의 머리에 오랫동안 머물던 꿈을 현실화 하고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만화적인 형식으로 받아들였고, 꿈이라는 시공간의 실타래를 실험적이며 정밀한 칸의 연출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이정현은 현재 그 꿈의 완성본인 <변신Metamorphosis> 을 작업 중이며, 올해 출간의 계획하고 있다.
부천의 하늘 아래 하루의 작업을 정리하고 있을 그녀를 떠올리며, 늦은 밤 메신저를 켰다.
A. 왔습니다.
Q. 반갑습니다. 얼마 전 처음 이정현 작가님 원화를 봤는데 아름답더군요. 밀도와 깊이가 있는...
A. 꼬질꼬질하죠.
Q. 터치가 촘촘한 v자더군요. 그런 건 처음 본 거 같아요. 혼자 익힌 거세요?
A. 면을 채우다보니... 점을 찍는 대신 짧은 선을 그어대니까요.
Q. 밑그림은 그리세요? 연필 선이 옅어서 밑그림을 그리면 올라올 것 같은데...
A. 밑그림 많이 그립니다. 그리고 많이 지워대요.
Q. 아... 지우면서 그리면서 계속 그렇게 하시는군요?
A. 네. 그러다 보니 스케치 버전이 따로 없네요. 혼자 익혔다 볼 수 있지만, 그런 방식의 그림을 좋아했어요. 대학 시절에 내셔널 지오그래피 표지도 그렸던 작가를 좋아했는데 그 사람도 펜으로 점을 찍는 기법을 사용했지요.
Q. 벡신스키 같은 느낌도 있어요. 벡신스키도 연필그림이 많잖아요. 몽환적이고. 그로데스크하고. 물론 차이도 크지만... 어떤가요?
A. 그렇죠. 저도 책 한 권 갖고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람 영향을 받았다고는 볼 수 없어요. 화면구성이 단순해서이고... 그 판타지도 그냥저냥...


△ 스케치: 1997-1999
Q. 좋아하는 작가 있으세요? 구체적인 영향을 끼친 작가나...
A. 한때 베이컨에 열광했어요. 배낭 여행 중 우연히 공항에서 얻은 잡지에 베이컨 그림이 있었어요. 아직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였고, 그의 전시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완전 매료됐었죠. 지금은 세잔과 뭉크 그리고 피카소 그림을 좋아한답니다.
Q. 세잔의 촘촘함과 뭉크의 꿈, 베이컨의 그로데스크함, 피카소의 연출과 구성...? 헌데 이정현 작가님 작업은 거의 단색조입니다. 색을 거의 안 쓰잖아요. 왜죠?
A. 네. 색을 잘 모르겠어요. 종이에 물이 닿는 게 지금으로선 무서워서요.
Q. 익숙하게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A. 그게요... 아직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나봐요. ‘색=덩어리감’이라고 여기는데 아직 뭔가 부족해요. 아직 제대로 빛과 입체를 표현해내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Q. 꿈을 그리시잖아요? 그 꿈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 주세요.
A. 흠... 다섯 살 짜리 아이가 한밤중에 꿈에 놀라 깨었어요. 그 내용은 말하면 싱겁기만 해서... 여튼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을 보게 된 거죠. 그게 무섭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Q. 네.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지였나요?
A. 그 광경은 지금 하는 책 작업의 핵심이 되는 장면인데. 제 앞으로 동그란 연못이 있어요. 그 연못의 물은 굉장히 맑고 투명했지만 너무나 깊어 들여다보기가 무시무시할 정도였어요. 그 물 속에는 거대하고 하얀 물고기 두세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는데, 제 쪽으로 자꾸 몸을 부딪혀와서 전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웃긴 건 전 그 연못을 등지고 누워있었는데도 그 광경을 다 볼 수 있었답니다. 그 연못과 제 주위를 숲이 에워싸고 있었어요.
Q. 멋지네요.
A. 그 물고기와 물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수족관에 갔을 때 그 비슷한 물고기를 찾아보려고 했었죠. 심폐어 종류가 제일 비슷하겠더라구요. 꿈의 것은 그보다 더 컸지만... 그 이후에도 물과 물고기 꿈은 자주 꿨지요. 깊은 물이 주는 공포감 있잖아요.그러면서 정말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Q. 꿈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요? 그냥 너무 아름답고 인상적이어서...?
A. 꿈에서 얻은 그 인상을 현실에서도 보고 싶었어요. 음... 자아도취일 수도 있겠지만 도피처나 위안처도 되어 주었고요.
Q. 그 꿈이요, 아니면 그걸 작업하는 게요?
A. 그 인상, 그 이미지를 떠올리면, 제 존재가 설명되는 느낌을 받아요. 그 인상이 현실에서 만난 다른 대상에게도 투사가 되기도 했죠.
Q. 그 꿈은 성적인 것과 연관이 있을까요?
A. 그럴 수도 있지요. 왜 그런지 설명하기는 참 쉽지 않지만(그래서 책을 만들고 있죠), 물고기는 남성, 나무는 여성... 이런 식으로 투사가 되요. 으... 근데 이런 내용이 보여지는 게 썩 내키진 않아요.
Q. 말로 하는 게요?
A. 제가 말을 잘 못해서 주시는 질문에 이런 식으로 밖에 대답 못 하는 게 좀 답답하네요. 음, 꿈의 구체적 내용... 이런 것이요. 흐흐, 노출되는 것도 좀 두려워요.
Q. 작업이 꿈을 그린 거여서 그런지 너무 모호하고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정현 씨 작업은 보는 사람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A. 흠... 설명이 모호해서일 수도 있고요, 완성이 안 돼서이기도 해요. 지금 책 작업이 그 완성편이죠. 제 딴엔 설명한다고 하더라고 ‘간장 옆 소금, 소금 옆 간장’이 될 가능성도 크다고 봅니다.
Q. ‘간장 옆 소금’?
A. 소금 어딨어?’ 라고 묻는데, ‘간장 옆에...’, ‘간장은 어딨어?’ 그러면 ‘소금 옆에...’ 라고 대답하는 거요.
Q. 꿈을 완성하면 다음엔 무얼 그릴 건가요? 그 줄 위에 자전거 타는 토끼?
A. 잘 모르겠어요. 그 토끼는 식초죠. 간장과 소금 옆에 있는. 생각을 계속하고는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없지는 않지만, 지금은 집을 떠나 미지의 곳을 향한 새로운 여행을 하는 기분인지라...




△ 에그: 2001
Q. 이정현 작가님은 만화가 지망생은 아니었지만, 본인의 작업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만화적인 양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A. 음... 자연스럽게 만화적 양식이 되었죠.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아주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만화방에 자주 들락거렸고...
Q. 오... 몰랐던 얘기. 어떤 만화를 보셨어요?
A. 주로 일본만화들. 순정만화 있잖아요. 당시 인기있던... <꿈속의 신부> 라고 아시려나? <유리의 성> , <백조> ... 황미나, 강경옥, 신일숙 만화도 좋아했어요. 중고등학교 때 언젠가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래서 한편 만들어보기도 했었죠. 대학교 들어가서도 해 보려고 했어요. ...하진 않았어요.
Q. 왜요?
A. 진지하지 않았으니까요. 자세가 이중적이었거든요.
Q. 이중적?
A. 돈 되는 그림과 그냥 저만의 그림, 이렇게...
Q. 만화하는 게 즐거우세요?
A. 지금 작업은 굉장히 즐겁죠.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걸 안 하면 전... 여튼 약속을 지키지 않은, 뭔가를 회피한 느낌을 받게 될 거에요. 그게 두려워서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 겁니다.
Q. 너무 작품에 완벽을 기하는 것 같아요. 아까 피카소 얘기가 나왔었는데. 세잔이야 열심이었지만, 피카소는 다작에다가 생각하면 바로 표현하는 스타일이잖아요.
A. 그렇게 나온 그림은 별로더라구요.
Q. 음. 그럼 청색시대니 그 이전 작업이 좋은 건가요?
A. 네. 피카소 그림 중에서도 아직 자연적인 형상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그림이 좋아요. 물론 게르니카나... 몇 가지 후반기 작업도 좋아하기는 하지만... 맥빠지는 그림도 많다고 생각해요. 광대 옷 입은 사람들 그리던 시절 그림이 좋아요.
A. 저도 궁금한 게 있네요. 제 만화를 어떻게 보시나요? 아니, 내용이 너무 모호하니까... 그냥 그림 보는 재미 정도로 보는?
Q. 누군들 꿈이 합리적인 게 있겠어요? 그렇다고 그냥 그림을 보는 건 아니죠. 이미지의 연속을 보는 거죠. 그러니까 만화를 보는 겁니다.
A. 전 꿈 자체보다 해몽에 관심이 더 많아요..
Q. 그 꿈이요? 음, 제 생각엔 이정현 씨가 형상화시킨 꿈은 좀 이국적이라는 느낌입니다. 동양적이라거나 한국적이지는 않지요...(전통을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좀 고급 꿈 같은 느낌도 있고요.
Q. 아마 꿈을 그린다고 하면 뭐라고 토를 달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막스 에른스트의 판화작업도 생각이 나더라구요. 인물의 얼굴에 콜라쥬를 해서...
A. 저도 알아요. 101가지 뭐...
Q. 그러니까 그건 해석이 좀 불가한데. 그래도 그게 이야기가 없는 낱장의 이미지들은 아니라는 겁니다. 부조리한 상황. 그러니까 어떤 악몽 같은 걸 느끼는 거죠.
A. 그것보단 해석이 될 여지가 많죠. 제가 생각하는 제 작업과 보여지는 제 작업은 참 다를 수 있겠어요.
Q. 아마 누구든 해석을 내리는 건 어려울 겁니다. 지금 작업 같은 건 그저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거죠. 그런 면에서 회화적인 성격도 있네요.
A. 제게 가장 신기하게 여겨지는 상황은 그것이 거기에 그렇게 있다더라구요. 그래서 회화적이 되는 것 같아요. 한 칸 한 칸이.
Q. 예종 다닐 때 만화 수업이 있었을 텐데요...
A. 전 그때 그 수업 안 들었는데, 같은 과 애가 분석해서 발제한다고 <지미 커리건> 의 작은 책 몇 권을 빌려 왔더라구요. 크리스 웨어에 열광했죠. 현실과 꿈을 버무린 장면, 그리고 여러 기호들이 결합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게 너무 재밌더라구요.
Q. 음, 일러스트도 잘하시지만 일이 많이 들어오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림이 좀 어둡다고...
A. 흐흐... 왜 그럴까요? 전 제 성격이 나빠선가 하는 생각도 해 봤어요.
Q. 의식적으로 너무 어둡게 그리는 걸까요? 저는 한 작가가 여러 가지 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정현 작가님은 어찌 보면 거의 한 길만을 보고 가는 것 같아요.
A. 음...예쁜 그림도 그릴 수 있는데, 다만 제가 지금 작업에 좀 한이 맺혀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해 주세요.
Q. 뭐 잘 됐죠. 한눈 안 팔고 자기 작업 열심히 하게 된 상황이니까.
A. 웃는 그림 그리려면 화가 나네요. 이상하게. 괴상하죠?
Q. 네. 괴상합니다.
A. 여유가 없나 봐요. 이것 끝나면 좀 더 자유로워질 것 같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다른 일이 하기 싫어요. 이런 정신자세 덕분에 조만간 전 거지가 될 거구요.
Q. 작가는 기다리면 된다고 보아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자기 길을 가는 거라고 봅니다.
A. 흐흐... 네. 이게 제 속도인 것 같아요. 애써 페이지를 메우려했기 때문에 대량수정 사태가 발생한 거구요.
Q. 작가로 사실 건가요? 앞으로 삶에서 좀 특별한 계획 같은 게 있으신가요?
A. 가장 솔직한 대답은 ‘잘 모르겠습니다입니다. 다만 만족할만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이 만화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