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보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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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가장 힘든 소송, 표절소송

웹툰 보는 변호사 – 만화를 만드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알아야 할 법 이야기 7화

2024-09-08 서아람

아마도 가장 힘든 소송, 표절소송

  저번 칼럼에서는 표절을 당했을 경우 창작자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단계적으로 알아봤는데요. 그중에서도 고소소송은 마지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확실하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텐데, 왜 제일 처음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 수단이라고 하는 것일까. 궁금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루에 밥 먹는 횟수보다 고소장 쓰는 횟수가 더 많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제 눈으로 볼 때도, 표절을 이유로 한 저작권 침해 소송이나 저작권 침해 고소는 너무나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표절을 주장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방어하는 사람도, 수사하는 수사관도, 검사도, 재판하는 판사도, 심지어 사건을 변론하는 변호사까지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정신력을 소모해야 하는 것이 바로 표절 소송이나 재판입니다. 아마 변호사 상담을 받아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단순한 불법 다운로드나 불법 유포로 인한 저작권 침해 사건보다, 표절 사건의 경우 변호사 수임 비용도 갑절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도 다른 수단이 다 통하지 않아 결국 소송으로 가게 되었다면, 그때는 꼭 이겨야겠지요. 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형사재판이나 민사소송에서 표절을 판가름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보는지, 어떤 요소들을 갖추어야 승소율이 높아지는지 실제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대한민국 만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표절 분쟁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바람의 나라사건입니다. 김진이라는 예명으로 훨씬 유명한 김묘성 작가님이 1992년도부터 1996년도까지 연재한 순정 만화 바람의 나라,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자명고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대무신왕 무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작이고, 게임화되어 엄청난 히트를 치기도 했고, 뮤지컬로도 공연되었으며, 지금도 바람의 나라일러스트를 보면 저와 같은 3~40대 여성들은 왠지 모를 아련함과 애틋함을 느낄 정도로 순정만화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송지나 작가가 대본을 쓴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가 바람의 나라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분쟁의 경우 조금 특이한 부분이,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가 아니라 제작되기 전부터 유사성 논란이 일었다는 것인데요. 김묘성 작가는 완성된 드라마 대본이 아니라 시놉시스가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송지나 작가를 대상으로 5천만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드라마가 촬영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시놉시스라는 것이 분량이나 형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기승전결의 흐름이 갖추어진 줄거리와 개략적인 캐릭터가 나오기 때문에, 시놉시스만 가지고도 표절 여부를 따지는 것 자체는 가능합니다. 당시 재판에서는 김묘성 작가가 바람의 나라만화책을 법정 내 설치한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고, 송지나 작가는 드라마 촬영 장면 일부를 담은 영상을 상영하기도 하는 등 매우 시각적인 공방이 벌어졌다고 하는데요. 거의 모든 것이 서면으로만 이루어지고 변호사가 입 한 번 뻥긋하는 걸 구경하기 힘들었던 당시의 법정 관습이나 문화를 생각하면, 얼마나 치열한 상황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로스쿨 시절에 당시 재판에 참여했던 관계자 중 한 분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판사님께서 판사실 문을 잠그시고 며칠간 22권의 만화책을 낱낱이 읽고 또 읽으셨는데, 나중엔 내용을 다 외우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생을 건 대표작을 걸고 싸우게 된 유명 만화가, 더구나 상대방은 대한민국 방송계를 통째로 뒤흔들었던 모래시계의 드라마 작가이니, 법원으로서도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는 원고가 패소했습니다. , 드라마 태왕사신기는 만화 바람의 나라를 표절작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종종 바람의 나라 판결을 언급하면서 시놉시스만으로는 표절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해설하는 기사나 칼럼을 보게 되는데, 이는 판결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의 판결은 1심과 2심에 걸쳐 두 번 이루어졌습니다. 중앙지방법원에서 2006년 선고한 1심 판결의 경우, “시놉시스만으로는 완결성이 있는 어문 제작물이라거나 드라마 대본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구체성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설시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1심 판결에 원고가 불복하여 이루어진 항소심에서는 다소 다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같은 법원에서 2006년 선고한 2심 판결에서는, “시놉시스 자체만으로 완결성이 있는 어문 제작물이며 유사성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라고 전제하면서, 단 두 작품 사이에 실질적 유사성을 인정하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송지나 작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태왕사신기의 시놉시스가 A4용지 35매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등장인물의 성격과 그들의 상호관계, 개략적인 줄거리와 에피소드까지 포함하고 있는, 사실상 트리트먼트에 가까운 형태라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만일 문제의 시놉시스가 A4용지 한두장짜리였다면, 법원에서도 그 구체성을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법원에서 표절 여부를 판단할 때는 크게 두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우선 의거관계가 있는지를 봅니다. 굉장히 어려운 용어 같지만, ‘의거관계는 한 마디로 표절한 것으로 의심받는 작가가, 표절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작품에 접근할 기회가 있었는지, 나아가 영향을 받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웹소설이나 웹툰의 표절 시비가 걸렸을 때, 플랫폼에서 해당 작가의 작품 구매 내역을 확인하는 것도 바로 이 의거관계때문입니다. ‘바람의 나라의 경우, 송지나 작가가 바람의 나라만화책을 읽었다거나 참고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해당 작품이 워낙 유명했고 게임, 뮤지컬, 소설 등으로 나오는 등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거관계는 일단 인정된다고 간주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선전을 통과했으니 이제 본선을 거칠 차례입니다. ‘실질적 유사성을 따져보아야 하는 것인데요. 김묘성 작가는, ‘사신을 의인화하여 누군가의 수호신으로 설정하고, 각각의 사신 캐릭터들에 대하여 작가만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구체적이고 독특하게 개발된 캐릭터와 그 캐릭터들의 상관관계를 통해 부도 또는 신시를 지향한다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 만화의 핵심인데, 드라마에서 이걸 도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고구려의 고분벽화 사신도에 나오는 현무, 주작, 청룡, 백호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지적 자산이고, 이를 의인화하는 것도 일반적인 표현 방식으로서 일본 만화에도 환상게임’, ‘푸른 봉인등 비슷한 컨셉을 사용한 작품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두 작품에서 의인화가 이루어지는 세부 방식이 다르다는 것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부도신서같은 소재도 사신과 마찬가지로 공유의 영역이며, ‘주인공 또는 훌륭한 지도자가 주위의 충성스러운 보필자,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그 이상을 추구한다는 흐름은 수많은 영웅담에서 나오는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주제 또는 줄거리로서 저작권법의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사실 여기 인용한 것 외에도 실제 판결에서는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비교 대조가 이루어졌습니다. 2심 판결문 자체가 아주 빽빽한 21페이지짜리니까요. 가령 두 작품 모두 사신수가 누군가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 현무가 나이가 많고 지혜로우며 예언이나 계시를 얻는 캐릭터라는 점, 태왕사신기의 청룡이 먼 옛날 소서노를 남몰래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은거자인데 바람의 나라에도 세류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사랑하다가 잠을 자는 백호 캐릭터가 나온다는 점, 두 작품 모두 백호 캐릭터를 몰락한 가문의 아들로 염증을 느끼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현명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인물로 설정했다는 점 등이 쟁점이 되었습니다. 김묘성 작가는 위와 같은 캐릭터들이 다소 전형적인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서로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이야기 전개나 비극적인 결말까지 유사한 것은 우연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법원은 주인공이 낯선 장소에서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게 거부감이나 적개심을 가진 자를 만나는데, 그가 곧 주인공의 심복이 되고, 심복은 전장에서 주인공을 구출하는 등으로 주인공보다 먼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와 관련된 나라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딜레마에 빠진다.”는 전개는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는 흔하게 나오는 것들이고, 그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두 작품이 차이를 보이며, 결말의 경우 바람의 나라가 완결이 나지 않은 반면 태왕사신기에서는 주인공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안고 죽는다는 결말이 명확하게 나타나 유사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위 사건의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표절을 법적으로 다툰다라는 개념이 아직 익숙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에 표절을 판단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그에 대한 원칙, 신념을 구체적으로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저작권 보호의 범위, 그 내용으로서 실질적 유사성의 비교가 문제되는 사건에서 정확한 권리보호의 범위를 판단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문제이나, 그 판단은 결국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저작권자의 창작 의지를 고취시켜서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사회적 편익(social benefit)의 크기와 저작권자의 권리로 보호됨으로 인해 더 이상 새로운 창작자들이 그 소재 및 내용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서 더 나은 창작물이 탄생하지 못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social cost)의 크기를 형량해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 더 넓은 범위의 저작권 보호를 인정하면 할수록 원고의 편익은 더욱 증가하는 면이 있겠지만, 이는 또한 원고 자신의 비용의 증가로 귀결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원고의 저작물인 바람의 나라 중에서 저작권으로 보호되는 범위를 넓힐수록 그 부분은 원고가 아닌 다른 창작자들에 의해 이미 사용되어진 부분에 해당하게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원고 자신도 자신의 창작에 있어서 그 소재를 사용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이미 사용한 소재 및 캐릭터에 대하여 앞선 다른 창작자들로부터 저작권 침해라는 주장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판결문의 일부입니다. , 법원은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덜 구체적이고 덜 창작적인 부분까지 전부 보호 범위에 넣다 보면, 결국 모든 창작자의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고 누구도 창작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것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는 너무도 합당한 논리이고, 앞으로 우리나라 법원이 표절을 판단함에 있어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태왕사신기바람의 나라의 표절인지 아닌지, 그 진실을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드라마가 무사히 종영한 지 십 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시점에서는 더 이상 다툴 실익도 없겠지요. 사건 이후에 KBS2에서 김진 작가님의 작품을 공식 원작으로 한 드라마 바람의 나라를 방영하기도 하였고요. 지금은 그냥 대한민국 순정만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김묘성 작가님께서 장장 삼십 년에 걸쳐서 연재해 오신 바람의 나라만화가 멋진 완결을 맞이하기를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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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람

필자 서아람은 전직 검사이자 현직 변호사로서, 카카오페이지 추미스 공모전 2회 수상으로 웹소설 작가로 데뷔한 후 에세이, 웹소설, 동화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써서 출간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로서 주로 다루는 분야는 사기, 성범죄, 보이스피싱 등 형사사건과 학교폭력, 저작권 관련 분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