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이 가장 쉬웠어요 上편, 만화 계약의 종류와 특징
‘법 없이도 살 사람’.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이 최고의 칭찬이었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법이라는 강제적인 규율이 없더라도 스스로 정한 원칙에 따라 도덕적이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말을 종종 다르게 가져다 쓰기도 하는데요. ‘평생 경찰서나 법원을 드나들 일이 없는 사람’, ‘깐깐하고 매정하게 법을 따지지 않는 사람’, ‘인정 많은 사람’ 등을 두루두루 표현하다가, 가끔은 ‘법 없이 살고 싶은 사람’, ‘법이 싫은 사람’들에 대한 듣기 좋은 변명이 되기도 합니다. 작가 중에도 이 ‘법 없이 살’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계약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담부터 느끼는 사람,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끝까지 읽어보지 않는 사람, 읽고 모르는 게 있어도 물어보지 않고 넘어가는 사람, 자기가 뭐에 사인하는지도 잘 모르고 사인하는 사람들이 이 분류에 속합니다. 그러나 수학을 아무리 싫어해도 구구단은 외워야 하듯이,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선 계약에 대해서도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은 우선 웹툰 작가가 접하게 되는 일반적인 계약의 유형들과 그 특징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계약을 해석하는 기본은 세 가지, 계약의 목적, 권리, 의무입니다. 이 세 가지에 따라 계약의 타이틀과 세부 내용이 전부 결정됩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목적이고 팔 의무와 살 권리를 규정하기 위한 것이라면 매매계약, 사장이 직원을 채용하는 것이 목적이고 사장과 직원의 상호 의무 및 권리를 규정하기 위한 것이라면 고용계약이 되는 식입니다. 웹툰 작가가 가장 흔하게 체결하게 되는 계약은 물론, ‘연재계약’입니다. ‘연재계약’이라는 단순한 단어가 폼이 안 난다고 생각하는지, 플랫폼이며 에이전시들에서는 ‘콘텐츠 제공협약’, ‘투자계약’ 등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에게 연재에 필요한 원고를 그릴 의무를 부여하고, 그에 대한 권리로 고료나 수익을 지급하는 내용의 계약이라면 이는 연재계약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연재’는 저작물을 여러 개의 회차로 분리하여 규칙적인 주기로 게재하는 것을 말하며, 저작물을 통째로 게재하게 될 경우 이는 연재가 아닌 ‘출간’ 또는 ‘출판’으로 분류합니다.

웹툰 연재계약은 저작물을 온라인 플랫폼에 연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계약으로, 보통 작가와 플랫폼, 또는 작가와 에이전시 간에 체결합니다. 저작권이 넘어가는 계약은 당연히 아닙니다. 보통 3년이나 5년으로 정해지는 계약기간 동안 플랫폼, 즉 서비스업자는 연재에 필요한 ‘일부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작가의 허락을 받고, 작가는 연재에 필요한 원고를 제작하여 이를 ‘잠시 사용’할 수 있도록 넘겨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비스업자에게 어느 범위까지 권리를 허락할 것이냐는 계약의 세부 사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용권, 복제권, 배포권, 전송권, 공중송신권 정도가 포함됩니다. 위 다섯 가지 권리를 갖고 있지 않으면 회사에서 작가의 원고를 온라인 플랫폼에 연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독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계약의 경우, 위 권리들 앞에 ‘배타적’이라는 관용어가 추가로 붙습니다. ‘배타적 이용권’, ‘배타적 전송권’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는 해당 계약의 서비스업자 외에 다른 서비스업자나 회사는 이용권이나 전송권을 갖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배타적 발행권’은 저작권과 유사하게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발행권의 설정 사실을 등록할 수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핵심 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웹툰의 내용이나 수위를 플랫폼에서도 엄격히 관리하므로, 그런 부분에 대한 개입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용에 대한 검토권, 수정 요청권’을 넣기도 합니다. 정식으로 저작권법에 나오는 용어들은 아니지만, 굳이 해석하자면 저작인격권의 일부인 ‘동일성유지권’을 조금 변형한 형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는 연재라는 목표를 위해 무단으로 연재를 중단하지 않고, 표절 등 불법행위 없이 독립적으로 원고를 제작하여 정해진 날짜마다 넘기고, 자신이 보유한 권리를 남에게 함부로 팔거나 대여하지 않을 계약상 의무를 집니다. 한편 서비스업자는 작가로부터 받은 원고를 교정 교열하여 계약 시에 정한 플랫폼에 연재할 수 있게 필요한 절차를 밟고, 저작자의 인격을 존중하고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원고료를 지급하거나 수익을 분배해 주어야 하는 등의 의무를 집니다. 법령상 또는 계약상 의무를 위반했을 때 이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쪽은 계약을 해지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웹툰이 연재되는 도중 혹은 연재가 끝난 후, 누적된 회차들을 한데 모아 전자책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오디오북으로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전자출판’이라고 합니다. 이는 온라인 연재와는 분명 다른 개념이므로, 별도의 ‘전자책 발행계약’이 필요합니다. 이 또한 출판사나 회사마다 계약서 명칭을 조금씩 다르게 하는데, 보통 ‘전송권 계약’, ‘전자출판계약’, ‘발행권 설정계약’, ‘온라인 콘텐츠 계약’ 등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연재계약과 전자책 발행계약을 한꺼번에 묶어서 체결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전자책 발행계약을 통해 서비스업자는 이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저작물의 이용권, 복제권, 배포권, 전송권, 공중송신권을 갖게 됩니다. 단, 전자책 발행업자가 자동으로 종이책 출판권도 갖는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에, 보통은 권리를 규정하는 조항에 “인쇄나 도화로 발행할 권리는 제외한다.”, “출판권은 별도로 한다”라는 등의 추가 문구를 넣고는 합니다. 작가는 전자책 발행에 필요한 원고를 서비스업자에게 넘겨야 하고, 서비스업자는 전자책에 적합한 형태로 원고를 편집하고 교정 교열하여, 사전에 저작권자와 협의한 방식에 따라 전자책을 발행하며, 전자책 제작, 홍보, 판매에 따른 비용은 서비스업자가 스스로 부담합니다. 그리고 작가에게는 전자책 출판료 등 수익을 분배해 주게 됩니다.

웹툰이 인기를 얻어 종이책으로 소장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생기거나, 종이책으로 내더라도 충분히 인기를 끌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작가는 종이책 출판사와 별도의 ‘출판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플랫폼이나 전자책 출판사가 종이책 출판사를 겸하는 경우도 있지만, 별도의 회사와 계약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작가들 또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신중하고 싶어 합니다. 전자책으로 인지도가 높은 출판사들과, 종이책으로 전통적인 인지도를 쌓아온 출판사들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전자출판의 시대라지만, 작가들에게도, 독자들에게도, 아직 종이책은 다른 것과 대체될 수 없는 고유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제 첫 종이책을 품에 안았을 때의 감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책을 찍어내면 찍어낼수록 출판사 입장에서는 손해라는 요즘 시대, 누가 내 작품을 종이책으로 내준다고 하면 작가로서 고마운 마음이 앞서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중해야 합니다. 일반 출판계약은 연재계약이나 전자책 발행계약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의 전자책이 여러 개의 플랫폼에서 유통되는 경우는 흔하지만, 하나의 종이책이 여러 개의 출판사에서 나오는 경우는 사실상 없습니다. 그래서 출판계약을 체결하면 출판사는 해당 저작물에 대한 ‘독점적, 배타적’ 출판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출판계약의 핵심이며, 출판사는 그 외에도 출판 과정에서 필요한 복제권, 배포권, 발행권 등을 부수적으로 갖게 됩니다. 출판권 설정 사실 또한 배타적 발행권과 마찬가지로 그 설정 사실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저작자는 출판계약의 효력이 유지되는 동안은 유사하거나 동일한 저작물을 스스로 출판하거나 다른 사람이 출판하도록 해서는 안 되고, 마음대로 개정판이나 증보판을 내서도 안 됩니다. 아무래도 전자책을 만드는 것보다는 실물 종이책을 만드는 것이 노력이나 시간이 많이 들고, 출판사로서의 비용 부담도 크다 보니, 출판사에 보장되는 권리도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작가는 출판료와 출판 수익을 받고, 계약기간 동안 저작물을 ‘절판’ 않고 계속 출판할 것을 출판사에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회사는 해당 종이책을 다른 외국어로 출판하거나, 전집이나 옴니버스 서적에 수록하거나, 개정판을 내는 데 있어서는 작가로부터 별도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다만 종이책 출판의 특성을 고려, 출판권자가 대상 저작물의 동일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미한 수준의 수정을 하는 경우, 출판권자는 저작권자에게 수정 내용에 대해 사전에 고지를 한 후 그 범위 내에서 수정, 편집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단, 이때도 작가가 싫다고 하면서 이의를 제기하면 그 수정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웹툰이나 웹소설 작가가 체결할 수 있는 계약의 형태는 이외에도 다양합니다. 가령 회사 또는 플랫폼이 대략의 얼개를 짜 놓은 기획을 작가가 웹툰이나 웹소설로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획 만화계약이 있습니다. 기획 만화계약의 경우 저작인격권은 작가에게 귀속되지만, 복제권, 공연권, 공중송신권, 전시권, 배포권, 대여권, 2차적 저작물 작성권 등 저작재산권은 회사나 작가 중 누구에게 귀속시킬지 계약에서 일일이 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사업화 등 권리행사를 특정 회사에 위임하는 매니지먼트 계약, 작가가 특정 회사의 근로자가 되어 상시 근로하면서 업무상 창작한 저작물의 저작재산권을 회사에 귀속시키는 업무상저작물계약 또는 고용계약, 웹소설을 원작으로 웹툰을 만드는 노블코믹스 계약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마련한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는 총 여섯 종이지만, 이는 문자 그대로 예시에 불과합니다. “내가 제안받은 계약이 정당한지 확인하려면 표준계약서를 보라고 했는데, 표준계약서에는 똑같은 제목의 계약이 없는데 어떡하지?”하고 당황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계약은 당사자들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과 조건으로 형상화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계약의 타이틀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제목에 구애받지 말고, 계약이 실제로 나에게 지우는 의무가 부당한지 아닌지, 마땅히 나에게 주어져야 할 권리를 박탈하고 있지는 않은지 개별적인 조항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