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이 가장 쉬웠어요 中편, 절대 피해야 할 독소조항들
계약법에는 ‘독소조항(毒素條項)’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법률에 등장하는 정식 용어는 아니지만, 판례에는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poisonous clauses’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계약에 독을 뿌리는 조항, 계약 당사자 중 일방의 권리를 부당하게 제한하거나 부당한 의무를 지게 함으로써 계약 전체의 본래 취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부적절하고 편파적인 계약 조항을 의미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을 보면 독소조항에 대해 “법률이나 공식 문서 등에서 본래 의도하는 바를 교묘하게 제한하는 내용”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물론 읽는 사람이 함정에 걸리도록 복잡하고 은근하게 만들어놓은 독소조항도 있지만, 아예 대놓고 뻔뻔하게 “맘에 안 들어? 그래도 사인해야지 네가 어쩔 거야” 하는 식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독소조항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작가 계약의 경우에는 어떤 것들이 독소조항에 해당할까요?
독소조항 중 가장 악독한 것은, 권리의 일부 또는 전부를 넘기는 ‘매절계약’입니다. 아마 작가나 작가 지망생은 누구나 ‘매절’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매절 또한 정식 법률 용어는 아니지만, 종종 판례에 등장합니다. 원래 매절은 종이책 업계, 즉 출판사에서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작가가 쓴 글을 마치 채소나 과일을 무게 달아 사듯 몇 쪽에 얼마 하는 식으로 일시로 대가를 지급하고, 그에 대한 권리를 통째로 사 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매절계약에서 작가는 이름만 책에 올리는 ‘무늬만 작가’로 남아 있거나, 더 심한 경우 출판사 대표나 다른 작가에게 크레딧조차 뺏기고 ‘유령 작가’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악 관습은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야금야금 그 영역을 넓혀 만화계나 동화업계까지 번져, ‘검정 고무신 사건’, ‘구름빵 사건’ 등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매절의 유형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용 허락’에 그쳐야 하는 작가의 계약이 작품에 대한 권리의 일부 또는 전부를 ‘양도’ 또는 ‘이전’하는 형태를 취한다면 이는 매절계약으로 독소조항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본 작품의 저작재산권(단, 저작인격권은 제외한다)은 사업상 필요에 따라 회사에 귀속된다.”
제가 변호사 개업을 한 후 처음으로 맡았던 계약서 검토 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조항입니다. 계약서를 가져왔던 웹소설 작가는 ‘저작인격권은 제외’라는 문구와, ‘양도는 아니라 귀속’이라는 회사의 설명을 듣고 그러면 문제가 안되겠구나, 괜찮겠구나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건 그냥 말장난일 뿐입니다. 저작인격권은 일신전속적, 그러니까 작가라는 개인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권리여서 어차피 계약으로 양도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회사가 원하는 것은 작품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저작재산권이지 작가라는 명예감과 연결되는 저작인격권은 아니기도 하고요. 그리고 양도나 귀속이나 이전이나, 표현의 문제일 뿐 권리가 넘어간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물론, 모든 매절계약이 일방적으로 작가에게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구름빵 사건’에서 출판업계가 목소리를 냈듯이, 작가나 작품에 많은 초기 투자가 필요한 경우, 신생 작가나 무명 작품을 위해 그 정도 금액을 투자하는 게 회사에는 그 자체로 리스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나중에 작품이 잘 되었을 때는 회사도 그만큼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해 매절이라는 조건을 내건다는 것입니다. 또한 작가 입장에서도, 인세 수익으로 장래 얼마를 벌게 될지 전혀 보장이 되지 않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확보할 수 있는 돈을 손에 넣는 쪽을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동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매절계약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작가가 매절인지도 모르고 매절에 동의하게 되거나,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에 권리를 매절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매절 계약의 문제점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작가들의 권리 의식도 높아지면서, 요즘은 대놓고 매절계약을 요구하는 회사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다음으로 문제 된 것이 바로 ‘2차적 저작물 작성권 양도’ 조항입니다. 잘 만들어진 하나의 원작으로 웹소설, 웹툰, 드라마, 애니메이션, 뮤지컬, 굿즈까지 다양한 컨텐츠를 생산하는 것이 업계의 주된 수입원이 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시대, 원작자의 저작권 못지않게 중요해진 것이 바로 원작을 바탕으로 새로 만든 작품의 권리인 ‘2차적 저작물’에 관한 권리입니다. ‘영상화’나 ‘웹툰화’라는 단어에는 익숙하지만, ‘2차적 저작물 작성’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많은 신생 작가들이나 작가 지망생들이 이 덫에 걸리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들은 2차적 저작물 작성권에 대한 계약 문구를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다양하게 변형해 놓았습니다.
“해당 작품의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계약 기간 동안 회사에게 부여한다.”
“해당 작품의 2차적 저작물에 대한 사업권(저작재산권)을 계약 기간 동안 회사에게 허락한다.”
“해당 작품을 바탕으로 작성한 2차 콘텐츠의 권리는 2차 콘텐츠를 작성한 회사에 귀속된다.”
“계약 기간 동안 작가는 작품에 대하여 타 회사와 2차적 저작물 작성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
“계약 기간 동안 작품의 2차적 저작물 관련 사업은 오직 회사를 통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위 문구들은 결국 다 같은 의미인데, 한 마디로 작가가 원작을 웹툰, 드라마 등 다른 형태로 가공하여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싶다면 지금의 회사가 직접 하거나 지금의 회사와 함께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그 사업에서 생겨난 수익은 회사가 상당한 부분을 가져가겠죠.

원 저작물에 대한 연재나 출판, 전자출판은,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이나 사업권이 없어도 얼마든지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재계약이나 전송권계약, 배타적발행계약을 하면서 2차적 저작물 작성권에 대해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아예 계약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만일 나온다면, 그때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은 전적으로 작가에게 귀속된다”라는 식으로 작가의 당연한 권리를 명확히 확인해주는 형태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유토피아의 이상론일 뿐, 현실은 또 다릅니다. 대부분의 에이전시나 플랫폼, 출판사에서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에 대한 논의 없이는 연재나 전자책 출판에 대한 논의도 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회사가 가장 바라는 것은 웹툰이나 웹소설이 그 자체만으로 대박 나는 것보다는, 영화나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OTT를 통해 전세계에 퍼져 나가고 오 년, 십 년이 지나더라도 재방, 또 재방되고 리메이크되어 이른바 ‘벚꽃연금’처럼 장기간 천문학적인 수입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연재나 전자출판이라는 게 회사 입장에서도 기획, 편집, 교정, 교열, 표지나 삽화 제작, 홍보 등 많은 시간과 인력과 품이 들어가는 것인데, 영상화로 가는 길이 아예 막혀 있거나, 그보다 더 심한 경우 ‘남 좋은 일’을 시키게 될 것이 뻔하다면, 의욕이 확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에 대하여 까다롭게 굴지 않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계약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연재처의 숫자는 턱없이 적안 반면,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괜찮은 작가나 작품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회사도 대리해 보고 에이전시도 대리해 보고 작가도 대리해 본 변호사인 저로서는, 그래서 2차적 저작물 관련 조항을 아예 빼기보다는, 최대한 상세히, 물론 공정하게 넣는 것도 괜찮다고 조언하는 편입니다. 작가의 당연한 권리는 보장하되 회사에도 ‘적어도 다른 회사보다는 조금 더 유리한’ 입지를 가질 수 있는 정도의 혜택을 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2차적 저작물에 대한 사업을 작가에게 ‘제안’하고 ‘계약’할 수 있는 우선권을 원 계약 기간 동안 회사에 부여하되, 연재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3개월 동안 회사가 작가에게 아무런 제안을 하지 않으면 그 우선권을 자동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때부터 작가는 다른 회사와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게 하는 식입니다. 또한 2차적 저작물에 대한 우선권을 회사가 행사하게 될 경우, 2차적 저작물 작성에 대한 세부 사항과 수익 정산은 별도의 서면계약으로 체결해야 하고, 그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작가는 계약 체결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고 추가로 못 박아 두는 것도 좋습니다.
그 외에도 작가의 생활이나 건강을 해칠 정도로 무리한 연재 주기를 요구하는 조항, 휴재권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 조항, 원고 인도가 늦어지거나 불가피하게 이행되지 않았을 경우 과도한 위약금을 거는 조항, 작가의 신념과 개성을 무시하고 회사가 작품에 대한 무 제한적인 수정이나 삭제를 요구할 수 있게 하는 조항, 계약종료 이후에도 작품에 대한 게시를 허가하거나 그 사용을 허가하는 조항, 홍보라는 명목으로 작가의 개인정보나 사적인 이야기를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게 해주는 조항, 작품의 연재처나 가격 등 매우 중요한 사항을 작가의 ‘동의’를 받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협의’하여 진행하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최종적인 결정권은 회사가 가지고 작가는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조항 등이 부당한 조항들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이책과 종이만화책에서 전자책과 인터넷 연재, 오디오 북이 생겨나면서 작가와 회사 간의 계약조건과 세부사항은 계속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콘텐츠의 취급 방식은 더 다양해질 것이므로 독소조항 또한 새로운 형태로 작가를 속이려 들 것입니다.
지금까지 작가가 연재계약이나 콘텐츠 계약, 출판계약이나 전송권계약 등을 체결할 때 맞닥뜨릴 수 있는 독소조항들을 몇 개 알아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봤던 것들 외에도, 표준계약서에 나와 있지 않은 추가적인 내용으로, 그것이 작가에게 불리한 것이고, 그 조항이 들어가야만 하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그 어떤 조항도 독소조항이 될 수 있다고 보시는 게 좋습니다. 물론, 독소조항이 있다고 해서 항상 수정을 요구하거나 계약을 거부할 수 없는 게 작가의 현실이긴 합니다. 다 알면서도 데뷔를 위해, 영상화를 위해, 또는 회사와의 의리를 위해 못 본 척 사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라도, 계약을 통해 자신이 얻는 것과 잃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산해서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내 작품이 자식이라면, 계약은 일종의 입양이나 마찬가지고, 내 소중한 자식을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맡겨서는 안 된다는 걸, 작가는 부모로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