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시선에 반기를 든 만화가의 믿음
만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무엇일까? 화가도 문인도 건축가도 아닌 만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우선 만화(필자 주 : 이 글은 만화와 웹툰이 동일하다고 본다. 만화를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 종이책과 웹이라는 환경 자체가 다르지만, 칸과 칸 사이의 변주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이야기될 수 있다고 본다.)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만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그것(만화)에 대해 생각하고 사유하는 만화 창작자들이 무엇을 하고 고민하는지 조금은 수월하게 느낄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만화는 무엇일까. 우선, 만화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누군가는 “상상적 장면을 구축”(한상정, 「만화읽기의 특성」, 『만화학의 재구성』, 이숲, 2021, 277쪽.)하는 것이 만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 목소리는 독자 입장에서 서술된 것으로 만화 창작자가 연출해 놓은 여러 ‘연극적인 장치’를 독자가 능동적으로 ‘상상’하는 과정에서 만화는 더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하고, 덜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예술적 ‘의도’나 ‘목적’을 반영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만화가의 모든 장치(형식)들을 독자가 얼마만큼 능동적으로 응시하느냐에 따라서 상상의 힘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작품을 보고 독자가 어떤 상상을 끌어낼 수 있느냐에 따라 작품의 표정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만화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에도 통용되는 말이니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만화가 ‘상상적 장면을 구축’한다는 의견은 독자의 상상력이 만화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어떤 상상을 연출할 것인지가 만화가들에게도 값지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의견으로는 만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서사분석은 언제나 매혹적이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 그것은 어찌할 수 없이 만화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 같다.”(오혁진, 「머리말」, 『만화의 형식』, 해피북미디어, 2022, 5쪽.)는 목소리가 있다. 이 인용문은 만화 평론을 하는 글쓴이의 자의식이 투영된 목소리로 만화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하다는 맥락을 담고 있다. 동시대의 만화를 논함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만화의 ‘내용’만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든 목소리로, 보다 정확히 만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칸과 칸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법적인 요소(형식)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만화에는 만화의 언어가 있고, 영화에는 영화의 언어가, 문학에는 문학의 언어가, 미술에는 미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형식’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고유한 장르가 품고 있는 재현된 ‘형식’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독자입장에서 느끼거나 받아들여지는 방법이 타격의 형태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형식’이 잊히는 경향이 있으나, 그림자처럼 숨겨진 ‘형식’이 의미‘화’ 될 때, 만화가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 또한 이 두 명의 저자와 동일한 생각을 오랜 시간 해왔던 터라, 만화의 영역뿐만 아니라, 영화나 문학과 같은 영역에서도, 영화의 ‘문법’과 문학의 ‘문법’이 각각 존재한다는 점에서 각각의 장르가 가진 고유한 ‘형식’과 내용이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웹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종이책에서 펼쳐지는 만화가 아닌, 웹에서 펼쳐지는 만화인 웹툰의 경우도 매질과 매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촉각이 다르다. 그러니 그에 걸맞은 ‘형식’에 따라 비평의 요소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자나 평론가들에게 언급되어 왔다. 이 사실은 만화의 ‘형식’이 값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만화의 ‘내용’과 ‘형식’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 하나의 요소를 더 추가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자의식’이다. 이 자의식은 만화가의 자의식이기도 하지만 만화를 읽는 독자의 자의식이기도 하다.
자의식은 무의식적으로 내용과 형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독자에게도 중요하게 작동한다. 특정한 만화가는 문학이나 미술, 또는 영화의 형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재현할 수도 있었지만, 만화를 선택했다. 만화를 선택한 이유가 존재한다면 이 예술가가 ‘만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텍스트가 쏟아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굳이 만화책이나 웹툰을 선택한 이유에 관해 물을 수 있겠다. 만화를 읽는 이유가 재미있어서 즐거워서 읽기 편해서일 수도 있지만, 이 독자가 선택한 그 순간은 자의식이 반영된 자신만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만화(웹툰)를 읽는 창작자나 독자의 ‘자의식’에 관심을 품는 것은 흥미롭다. 하지만 이 글은 독자의 자의식보다는 창작자의 ‘자의식’에 무게를 둔다. 독자 반응 연구는 이미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니 독자의 자의식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창작자의 자의식에 많은 애정을 표현하기로 한다. 만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서, 그들이 고민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들이 만화창작을 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볼 생각이다. 이 연재 글은 그들이 무슨 이유로 절박하게 그림이 아닌 만화를 그리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동시대의 작품을 선별해 묻고 답할 것이다. 그래서 연제 제목이 바로 〈만화(웹툰) 작가들에게 그림 그리는 것이란?〉이다. 그렇다면 만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만화에 대한 인식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웹툰 10년사 –국립중앙도서관 ‘올 웹툰’전』에는 아래의 재미있는 그림(김정영, 박인하, 박석환, 『웹툰 10년사 –국립중앙도서관 ‘올 웹툰’ 전』, 재담미디어, 2014, 7쪽.)을 확인할 수 있다.
△『웹툰 10년사 –국립중앙도서관 ‘올 웹툰’전』 7쪽.
웹툰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이 그림이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저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웹툰의 현재와 미래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만화를 응시하는 한 선생님의 태도이다. 어느 한 학생은 널브러진 만화책에 둘러싸여 만화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선생님이 등장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화만 보고 있니!”라고 꾸짖는다. 학생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아 보이는데, 이유 없이 두 손에 만화책을 번쩍 들고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저자는 이 장면으로 무엇을 연출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만화를 보는 주변의 시선이다.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부끄러운’ 감정을 품어야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면 왜 부끄러운가. 지식 탐구와는 무관한 행위가 바로 만화 읽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만화’ 자체를 바라보는 인식에 대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만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처럼 부정적인 것이며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창피한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역으로 이런 만화를 그리고 창작하는 예술가들의 심정은 어떨까. 이 부분은 오랜 시간 주목받지 못했다. 만화의 상품성과 독자의 반응만을 탐닉할 뿐, 정작 만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창작자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그 어떤 평론가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작품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만화 평론상과 같은 제도를 통해 중요하게 다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만화 창작자들의 만화 이야기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담론화되지 못했다. 물론, 만화사를 들춰 보면 그러한 흔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주목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만화책을 읽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꾸지람을 받는 학생의 시선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만화가는 어떤 기분일까. 이런 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만화(작품)를 만들어가는 존재들은 어떤 사람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텍스트가 존재하지만, 최근에 읽은 몇몇 작품만을 선택해 논해보기로 한다. 이 부분은 만화를 평가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창작자들의 목소리다.
가장 먼저 살펴볼 작가는 전지 만화가이다. 그녀는 『선명한 거리』에서 ‘음악’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자신의 유년과 청년 시절, 그리고 예술가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곳의 표정을 흥미롭게 담아 놓았다. 탄탄한 구성을 통해 독자들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로 자신의 삶을 고백했다. 나의 이야기가 작품이 될 정도로 흥미로우니 그녀의 삶 역시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이 텍스트 끝부분에는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볼 만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어느 한 예술가의 표정이 선하게 담겨 있다. “돈이 되는 것은 일,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작업’으로 분류”(전지, 「너의 마이 웨이」, 『선명한 거리』, 코난북스, 2020, 204쪽.)하는 만화가는 돈이 되면서 작업이 되는 일을 하고 싶지만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돈이 되는 것과는 무관한 자신의 첫 책 작업을 이행한다. 또한 “좋아서 하는 건 작업, 해야 해서 하는 건 일”(위의 책, 206쪽.)이라며 ‘의욕’에 따라 일과 작업이 구분되는 예술가의 삶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 말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작업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 치어 온전한 작업을 하지 못한다는 투정이 섞인 고백일 테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것을 증명한다.
만화가: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이
음악을 그만둔대.
더 이상 뮤지션으로 살지 않겠대. 음악이 일이 된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대.
음악하는 사람들.
음악 진짜 힘들게 만들거든
남편: 그래도 일이 들어오는 건 좋은 거 아니야?
작업이 일로 연결조차 안 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만화가: 그치. 작업이 일처럼 돈이 되는 건 좋은 거고 일이 들어온다는 것도 좋은 거지. 단…
남편: 일을 선택해서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지. (위의 책, 215~216쪽. )
만화가가 자신의 남편과 대화하는 이 장면에서는 만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고충과 함께 만화가와 ‘같은’ 예술(음악가)을 하는 사람들의 밥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고충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인디 밴드 그룹 〈언니네 이발관〉의 한 멤버가 음악을 일처럼 하기 시작하자 뮤지션 생활을 그만두었다는 말은 의무감이나 습관의 맥락에서 음악을 창작하는 것이 뮤지션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음악가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후, 일이 많이 밀려왔을 것이고,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슬럼프가 찾아왔을 것이다. 열정적으로 음악을 대했던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음악을 그만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해 이들 부부는 그래도 그 사람은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적어도 그는 일을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일을 선택해 고를 수 있다는 것은 복(福)이지 않겠는가. 나아가 그에게는 음악과 관련된 일이 계속해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니, “작업이 일로 연결조차 안 되는” 예술가를 생각한다면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이 들어오는 사람과, 일이 들어오지 않는 사람, 일이 많이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권태나 슬럼프로 일을 포기하는 사람을, 구별 짓기 해 평가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예술가의 삶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험이다. 그렇다. 예술은 고독하고 외롭고 가난하며 이런 여정이 만화가의 삶이기도 한 것이다. 마이클 그랜디지 감독의 영화 〈지니어스〉(2017)에 등장하는 유명세가 끝난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처럼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이 만화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2017)처럼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며 먹고 사는 문제에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이 만화가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만화가들은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놓지 않는다. 이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변하지 않는 자명한 진리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지란방만두』 13쪽.
예술가의 삶과 관련해 그다음으로 살펴볼 작품은 만화가 권용득의 『지란방만두』이다. 그는 이 텍스트 초반부에 2년 동안 연재한 특정 신문사에서 잘렸다고 고백한다. 잘린 이유가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만화가에게 글과 함께 요구되는 ‘삽화’에 대한 원고료를 인상해 달라고 요구(권용득, 『지란방만두』, 삐약삐약북스, 2023, 13쪽.)한 탓이 크다. 이런 경험 이후, 만화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만화가로서의 삶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원고청탁 관련 글을 받을 때, 만화가들이 삽화를 보내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만화가는 그런 무리, 그러니까 삽화를 무료로 원하는 잡지나 출판사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다른 예술가들에게는 다양한 측면을 염두에 두고 청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만화가들에게는 야박하다는 말일 테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만화가의 처우에 대해 재치 있게 고백하는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만화가들도 똑같은 예술가인데, 왜 이렇게 가볍게 치부하냐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이 편견이라면 이들의 대우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만화는 이런 ‘저항’을 숨겨 놓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만화가들에 대한 주변의 시선일 것이다. 서두에서 만화책을 읽고 있는 학생을 혼내는 선생님의 예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만화 텍스트가 온전한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만화의 처지나 대우가 과거에는 좋지 않았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은 웹툰 IP가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최근 웹툰의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문종필, 〈웹툰의 만화‘화(化)’- 애니플러스의 웹툰 원작 애니메이션 제작 발표 내용을 살펴보며〉, 만화규장각, 2023. 8. 2. 〈웹툰의 ‘자기애’ 시대, 확장되는 웹툰 IP를 바라보며〉, 만화규장각, 2023. 5. 30. / 〈출판 만화에서 웹툰으로 걸어간 만화가〉, 만화규장각, 2024. 4. 29.)되는 시기여서 웹툰의 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대다. 즉, 만화의 힘을 외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만화는 이제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닌 주류 담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정한 장르가 다양한 영역으로 반복되고 확장되는 것 자체가 문화의 중심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과거의 문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시선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섣부른 태도이다. 웹툰 IP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웹툰과 만화의 힘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만화는 여전히 아웃사이더의 질 낮은 텍스트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은 잠시 후 읽어 볼 동시대의 다양한 텍스트들이 증명해 준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얻는다. 동시대의 만화와 웹툰은 문화의 중심일 수 있으나,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던 탓에 만화를 두근거리며 읽는 행위를 주변에서 좋게 바라봐 줄 리 없다. 겉으로는 ‘만화’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면서 새롭게 변신한 매체라고 목소리 높일 수 있지만, 결국은 재미나 장난에 불가한 장르로 인식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동경일일』(2023), 『아티스트』(2019), 『엘프와드』(2021), 『Point Zero(다시 돌아오는 곳)』(2022) 등의 작품을 예로 들면서 확인해 보자. 이 부분은 예전에 발표했던 글의 일부(문종필, 「모험의 흔적」 《서정시학》 101호, 2024, 220~222쪽. 나는 「모험의 흔적」이라는 글에서 일부를 재인용했음을 밝힌다.)를 빌려왔다.
△ 『동경일일』, 『아티스트』, 『엘프와드』, 『Point Zero』 표지
우선, 마츠모토 타이요(松本大洋)의 신작 『동경일일』에서 확인되는 편견의 표정은 다음과 같다. 오랜 시간 만화 편집자로 살아가던 시오자와 카즈오는 자신이 맡고 있는 만화 잡지 《코믹 밤》이 폐간하게 되자, 책임지고 회사를 그만둔다. 그 이후로 시오자와 카즈오는 회사를 나와 간절히 원하던 자신만의 이상적인 만화책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시오자와에게 인수인계를 받았던 편집자 리리코는 젊은 만화가 아오키를 담당한다. 하지만 자신을 담당했던 편집자가 바뀐 것에 불만이 있었던 아오키는 “‘사실은 저…문예지를 만들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는 부류의 편집자”(마츠모토 타이요, 위의 책, 46쪽.)가 리리코라며 비아냥거린다. 그러니까 문예지를 만들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경쟁에서 밀려나 만화책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아오키의 입장과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정은 만화가 문학보다 못하다는 의미와 닿아 있다. 만화가 마영신의 『아티스트』(2019)에서 시간강사이자 화가인 곽경수는 술자리에서 어느 한 평론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웹소설 같은 수준 낮은 글 쓰면서” 살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그때 평론가의 말을 받아 “난 웹소설 재밌던데. 한국 소설은 개폼 잡는 얘기가 많아서 노잼”(마영신, 『아티스트 1』, 송송출판사, 2018, 146쪽.)이라고 조롱한다. 통쾌한 이 말 역시 만화와 같은 비주류 장르의 편견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의 원작자로 친숙한 장마르크 로셰트의 작가탄생 서사를 담은 산악 만화 『엘프와드』(2021)에서도 마찬가지다. 로셰트는 학창 시절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을 상찬하는 선생의 입장에 반기를 든다. 보편적이고 순수한 예술보다는 ‘사소한’(만화)것이 더 매력적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로셰트를 선생은 “너 네가 예술가 같지? 네가 하는 짓은 그냥 낙서야, 낙서”(장마르크 로셰트・올리비에 보케, 『엘프와드』, 조안나 옮김, 리리 퍼블리셔, 2021, 74쪽.)라며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다. 아마도 이 선생이 시간을 거슬러 웹툰IP가 여러 장르로 변주되는 현상을 목격한다면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만화가의 꿈을 품고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주인공 이정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임성민의 『Point Zero(다시 돌아오는 곳)』(2022)도 마찬가지다. 정우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유학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의 동료들은 이런 정우를 못마땅해한다. 배가 불렀다고 꾸짖는다. 그러면서 “어중간하게 할 거면 뭐하러 여기 왔냐. 하긴, 어중간한 새끼니까 만화나 그리고 있지”(임성민, 『Point Zero(다시 돌아오는 곳)』, 이숲, 2022, 113쪽.)라고 말한다. 이 대화에서도 다른 장르와 비교해 만화의 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처럼 비주류의 창작자들은 온몸으로 짖은 혐오와 눈빛을 받아내며 자신의 작업을 이행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권위 있는 다른 장르와 동등하게 “만화로도 충분히 울림을 줄 수 있”(임성민, 위의 책, 67쪽.)다고 믿는다. 위의 사례에서 중요한 것은 정우의 ‘믿음’ 자체일 것이다. 아무리 만화에 대한 편견이 작동할지라도 자신이 하는 행위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이행하는 것 자체가 값지다. 이 과정이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지 않겠는가. 이런 움직임이 오히려 문학적이고 시적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믿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잘못된 믿음은 존재를 비극적으로 소멸시키지만, 온전한 믿음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한다.
이처럼 만화가들에게는 편견이 여전히 작동한다. “낙서”라는 말이나, “어중간한 새끼니까 만화나” 그린다는 소리는 만화를 연구하는 연구자나, 만화를 즐겁게 읽는 독자들에게 여전히 작동하는 관성이다. 아무리 동시대에 만화의 문화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고 한들, 오랜 시간 아류로 취급받았던 만화는 예술이라기보다는 소소한 소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재미를 위한 만화가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만화를 그리는 행위 자체가 소비적이고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역사가 존재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좀처럼 수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만화가의 언급처럼 “만화로도 충분히 울림”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가능하지 않다. 어쩌면 영화나 문학보다 강력한 만화가 탄생할 수도 있다. 이 울림을 진심으로 믿는 만화가들이 존재하기에 자신만의 시선(형식)으로 만화를 재현하는 것이겠다. 만화를 그리고, 만화를 생각하고,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재생하는지 모른다. 이처럼 만화에 대한 편견이 아무리 작동할지라도 자신이 하는 행위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몸으로 이행하는 것 자체가 값지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진정성이 증명되는 순간이지 않겠는가. 예술이라고 하지 않는 편견에 맞서 예술임을 증명하는 것이 만화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으로부터 탈출시키는 것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1년 동안 총 12회 연재될 〈만화(웹툰) 작가들에게 그림 그리는 것이란?〉 코너에서는 진정성 있는 만화(웹툰) 작가들이 펼치는 창작의 흔적을 끈기 있게 쫓을 생각이다. 이 글은 이런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첫 번째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