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작가들에게 그림 그리는 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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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이야기와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법

만화 작가들에게 그림 그리는 것이란? 2화

2024-07-21 문종필

자신만의 이야기와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법

  만화가 초록뱀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 서술된 모든 내용이 만화가의 온전한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상당 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 책에 소개된 작가소개 탓이 크다.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2012년부터 그림을 업으로 삼아 살고 있습니다. 늘 마음 한구석에 있던 만화를 이제야 꺼내 만들어보았습니다.”(초록뱀, ‘프로필’, <그림을 그리는 일>, 2020, 창비, 2. 이 인용문 이후, 별도의 각주 표시 없이 초록뱀 만화가의 <그림을 그리는 일>을 인용할 경우, 페이지만을 적기로 한다. ) “이제야 꺼내 만들어 보았습니다.”(2))

  우리는 이 문장을 통해서 그가 오랜 시간 그림 그리는 작업을 해왔음을 알 수 있고, 지금은 이 작업을 잠시 멈추고 만화작업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구석에 있던 만화를 꺼내 놓았다는 말은 오랜 시간 만화로 표현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속사정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초록뱀 이전의 이름을 알 수 없으니, 밥벌이로 그림을 그렸던 이 작가의 과거 작업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수소문해서 알아낼 수는 있지만, 이런 방식으로 앎을 소비하는 것은 의미 없다. 오히려 의미가 있는 것은 왜 그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초록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썼느냐일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작품을 출간했다는 것은 과거의 흔적과는 다른 변별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 작품을 깊게 읽는 하나의 방법이며 그림을 이해하는 새로운 통로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이름을 바꿔 작품 활동을 해야만 했던 다양한 예술가들의 사연도 떠오른다.

  초록뱀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 출간된 시기는 2020년이다. 내가 이 작가에 관해 이야기를 쓰고 있는 시간이 20247월이니 그는 12년 전부터 그림을 그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누구인가. 2012년부터 그림을 업으로 삼아 먹고 살기 애썼던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신의 이름을 초록뱀이라는 가명으로 새롭게 명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과거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그러면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만화가 초록뱀은 자신의 새로운 작품(<그림을 그리는 일>)을 통해 앞선 질문들에 대해 친절하게 답하고 있다. 이 짧은 지면에 이런 궁금증을 모두 적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자신이 해왔던 그림 작업을 밀어내고, 당당히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꾸리고자 했던 여정에 대해서 귀 기울이다 보면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이 과정을 천천히 음미해 본다면 어떤 방식이든지 만화를 그리고 몽상하고 생각하고 꿈꾸는 존재들에게 유익한 경험이 될 듯하다. 굳이 만화가 아니어도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보고 싶었지만, 만화가처럼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될 수도 있다.

1. 초록뱀이라는 가명에 숨겨진 의미

  <그림을 그리는 일>은 만화를 좋아하는 한 명의 소년이 학창 시절을 통과한 후, 대학생이 된 다음, 사회에 진출해 그림을 그리며 먹고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가혹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 짧은 문장이 텍스트의 전부다. 한마디로 성장 만화로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성장속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작가탄생서사이다. 그러니까. 이 만화는 한 명의 무명 만화가가 처음으로 세상에 발을 내딛는 여정을 담는다. 그러니 만화를 그리고자 하는 예비 만화가들은 초록뱀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여러 지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공감 속에서 자신의 개인 작업을 치열하게 밀고 나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초록뱀 만화가는 2012년부터 자신의 작업을 해왔는데 왜 굳이 2020년에 와서야 작가탄생서사가 핵심 소재인 만화를 출간했느냐고 말이다. 2012년에 작가탄생서사를 창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작품 속에 있다.

△ <그림을 그리는 일> 49.

  이 텍스트에서는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만화가의 분신인 문성민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출판사와 종종 마찰을 빚는다. 편집장이 성민의 작품을 보면서 이런 말을 내뱉기 때문이다. 성민씨. 우리 순수예술 아니야. 상업미술이야. 알지?”(49)라고 말이다. 그렇다. 성민은 상업미술 쪽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자신만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으로 표현되고,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색과 자신의 그림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편집장은 애써서 만든 결과물이 팔리지 않을 거라고 예단해 퇴짜를 놓는다. 작품이 안 좋다고 하면 상관없겠지만, 우리 출판사는 상업미술을 하고 있으니 돈이 되는 작품을 그려야 한다고 윽박지르니 성민의 자존감은 내려간다. 괴로운 것은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내려놓고 출판사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출판사가 내세우는 기준에 맞추면 출판사나 작가나 둘 다 편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자신이 구상하고 계획한 것을 알리고 싶은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는 것이니 수치스럽다. 그래서 성민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상업적인 것(독자 취향의 것)’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런데 이 지점은 하루 이틀에 문제가 아니다. 초록뱀의 작품에서만 다뤄지는 내용이 아니다. 만화 장르만의 것도 아니다. 문학이나 영화나 미술, 음악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작품을 가지고 유통해야 하는 출판사(매체) 입장에서는 어떤 방식이든지 책을 팔아야 하므로 상업성이 있는 것을 선호하니 암묵적으로 작가에게 압박을 가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작품이 상업적인 것만을 쫓는 풍경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에 걸려있다. 그 누구도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민은 이런 갈등 속에서 방황한다. 다행인 것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작품 속 성민은 점차 자기 모습을 건강하게 찾아간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 247.

  출판사는 성민에게 잘해보자고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하지만, 성민은 용기 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송합니다. 그림을 못 그리겠어요. 도저히 안 그려집니다. 제 거라는 생각도 없어진 지 오래고요. 알아서 마무리 좀 부탁드립니다.”(247)라고 말이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존재들은 늘 이런 고민에 휩싸이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마음껏 투영하고 싶지만,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 때론 작가의 자율성이 오만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오만은 이 글에서 제외하자. 자유를 남발하는 작가들을 작가라고 부를 수 없으니 말이다. 여하튼, 상업주의 입장에서는 작가의 고유한 숨결이 쓸모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쓸모는 작품 자체의 쓸모라기 보다는 독자들에게 읽히지 않으니 쓸모없다는 말일 테다. 왜냐하면 난해한 것소통되는 것사이를 두고 순수한 것상업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난해한 것은 소통될 수 없으니 독자가 당연히 적을 것이고, 소통되는 것은 작품이 좋지 않아도 매체가 유통을 잘한다면 팔릴 수 있는 구조적인 위치에 놓이니 좋은 작품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술적인 작품과 소통이 수월한 작품 중, 어느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전자라고 말하겠지만, 상업주의 입장에서는 후자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상업적인 것과 순수예술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에서 나오는 작품이 가장 이상적인 작품이겠다. 가장 위험한 것은 특정한 이익을 위해 하나의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일 테다. 이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문화적 흐름으로 봤을 때도 득보다는 실이 많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움직인다면 그를 작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 예술가는 조금 시시할 것 같다.

  최근에 읽고 있는 래리 샤이너가 쓴 책 예술의 발명에서는 이런 긴장에 대해서 다룬다. 그러니까 예술적인 것과 예술이 아닌 것이 경쟁하면서 어느 시기에는 예술이 되기도 하고 어느 시기에는 예술이 되지 않기도 하다는 맥락이 그것이다. 이처럼 전복되는 예술의 흐름을 다루는 이 책은 설득과 이해관계에 따라 예술이 발견되는 것이 아닌, ‘발명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발견은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발명은 쌓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등장하는 이 장면을 두고 어느 쪽이 옳다고 확정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작가의 대리자인 성민이 그것을 선택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그러니까 성민은 상업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출판사의 의견을 뒤로 밀어내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조금은 자유로운 영역에 와닿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간다. 이 지점은 소중하다.

  예술가의 믿음은 없던 길을 만들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상식적인 사진의 역사에 대해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기술발전으로 사진이라는 기술이 도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사진작업을 기계의 일이라고 손쉽게 간주했다. 물론, 사진기로 재현된 풍경에 대해 옹호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 풍경을 부정적으로 본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었던 이들은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예술의 형태에 대해서 치열하게 논쟁한다. 그들 중 스타글리츠라는 인물은 이런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독창성은 표현된 것과 표현한 방법의 독창성을 의미하며, 이는 시든 사진이든 회화든 모두 마찬가지라고 썼다(래리 샤이너, 순수예술과 수공예를 넘어서, 예술의 발명, 조주연 옮김, 바다출판사, 2023, 364.)라고 쓴 문장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어떻게이다. 성민은 자신을 어떻게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상업미술을 옹호했던 출판사 입장이 모두 부정되어야 할 것은 아니지만, 출판사는 성민에게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 어떻게를 배려해 주지 않았다. 획일적이고 단순했으며 무례했다. 그것을 온몸으로 알아차린 성민은 과감히 출판사를 밀어낸다. 이런 믿음과 용기가 <그림을 그리는 일>을 탄생시켰다고 본다.

2. 형식과 내용

  이 책에는 예비 만화가들이 익혀두면 좋은 것들이 적혀 있다. 굳이 만화가가 아니어도 좋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여러 팁을 알고 있으면 어디를 가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여기서는 형식내용에 관련된 여러 팁을 알아보자. 성민은 대학에 진학한 후, 그림 그리는 동아리(‘그림이랑’)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명식 선배를 만난다. 명식은 성민과 성민의 친구 재훈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준다. 이 과정에서 여러 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익혀두면 유용하다. 첫째는 연필을 감싸듯 쥐고 손목 스냅을 이용해 그으면 선이 달라져 보인다는 것이다. 요즘 누가 그림을 연필로 그리냐고 따져 물을 수 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쥐고 만지고 긋는지에 따라 선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사실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연필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손목의 강약 조절만으로도 선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다양한 표현이 가능할 듯하다. 둘째, 빛은 명암(明暗)뿐만 아니라 감정(感情)’을 담아낸다는 말이 있다. 빛이 어둡거나 밝기를 조절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은 만화를 그릴 때도 기억해 두면 좋은 팁이다. 무엇보다도 감정의 영역을 표현함에 있어 이 활용된다는 점을 숙지한다면 말풍선이나 칸 또는 인물의 연출 외에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또 하나 늘었으니 유익할 듯하다.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렇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지나가면 된다. 초보자들은 이 사실을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세 번째부터는 내용과 관련이 있다. 성민과 재훈은 앞서 그림 동아리 선배에게 미술을 배운다고 했다. 선배는 이 두 명에게 기술(技術)’을 가르친다. 말 그대로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기술을 알려준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림을 그리는 기술만 숙지하고 있으면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데 있어 기술만 온전히 습득할 수 있다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만화가는 회의적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기술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점이 만화(예술)에는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만화가는 선배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술도 물론 필요하지 근데 석고상을 똑같이 그리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할까? 더 중요한 건 이걸 통해 뭘 표현하고 싶은거야. 석고상에 집중하기 전에 네 마음에 먼저 집중해 봐(138)라고 말이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내가 어떻게자신을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럴 때 석고상은 다르게 표현된다. 기술은 기술일 뿐인 것이다. ‘를 알지 못하면 표현도 불가능하다. 유독 이 텍스트에서는 를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다루었던 선배의 조언도 그렇지만 성민이 미대로 전과한 후 그림을 그릴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 같이 전과한 재훈은 자신만의 느낌을 자유자재로 수업 시간에 표현하지만 성민은 그렇지 못하다. 수업 시간에 교수는 자신에 대해 표현하라는 게 어려운 주제(257)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성민은 그것이 참 어렵다. 특히나 수업 시간에 배운 뒤샹의 (1917)이나 철학자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2021, 민음사) 같은 책은 어떤 의미인지도 정확히 와닿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성민은 미술 수업 시간에서도 나를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다 고민 상담을 하러 찾아온 성민에게 선배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면 되는데, 왜 굳이 창작자가 되어 그림을 그리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성민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야 가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행동했다. 작가는 누군가가 가르쳐 주거나 알려주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변 동료들에게 영향을 받거나 선배 예술가들에게 자극을 받을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홀로 자신과 치열하게 다투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돌파해야 한다. 자신만의 살결을 작품에 불어 넣을 때, 생명을 얻고 는 드디어 작가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작가는 스스로 돼어야 하는데(55) 성민은 그것을 이행하지 못한다. 늘 주변 눈치를 봤고, 그저 다른 친구들처럼잘 그릴 수 있기만을 바랐(23)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는 작가가 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성민에게 선배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림을 그리는 일> 261~262.

  “넌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거야. 네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표현되지 않아. 어렵게 생각말고, 너의 이야기를 너의 방식으로 드러내 봐.(261)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이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이 목소리 이후 성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무엇보다도 이 장면은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기술을 익힌다고 작가가 되지 않는다. 기술은 기술일 뿐이다. ‘가 어떤 사람인지, ‘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자신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인지, 냉정하게 응시할 때 작가적인 힘을 발휘한다. 선배의 이 말을 듣고 주인공은 작은 노트에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 행위는 시간이 점차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쌓여가고 끝내는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것이 바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초록뱀 만화가의 작가탄생 서사는 이렇게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의 이야기를 너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말일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여러분들만의 목소리로 여러분만의 표현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방법임을 어떻게 하랴. 그런데 궁금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정답을 잘 알고 있어도 그곳에 쉽게 도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텍스트에서 선배와 성민의 친구 재훈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선배는 그 어떤 인물보다도 완벽한 사람이었다. 성민은 형은 늘 작가(112)였다고 말했다. 생각의 깊이나 작업의 완성도 면에서 자신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그림을 왜 그리는지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반면, 재훈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성민과 함께 미대로 전과해 취미로 그림 그리기보다는 꿈을 찾아 미대에 온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보고 성민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꿈을 서랍에 넣어 놓는 사람은 나뿐만이(101)아니었다고 안심하며 즐거운 대학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은 끝내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운명이 갈리는 것일까. 자신과 함께 꿈을 찾아 미대로 온 재훈과 그 어떤 사람보다도 예술가 같았던 형이 그림 그리는 일을 하지 않고 학원 입시 선생님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입시 선생님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꿈을 같이 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이 갈라지는 것은 이유가 있어 보인다. 나는 이 지점이 사후성(事後性)’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재훈은 힘들게 그림을 그리며 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그것에 걸지는 않았다. 그는 그림 그만두고 취직(196)을 했다. 물론, 그의 사연도 들어보면 짠하지 않을 수 없고, 꼭 누구나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모순이다. 그러나 내가 한발짝 떨어져 보니까 말야. 그림 그거 별거 아니더라. 너무 매달리지 마. 괜찮아(197)라고 성민에게 말했을 때, ‘매달리지말라는 말은 절박함이 없었던 자신의 생활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하고 싶은 거 한다는 핑계로 이기적으로 살아(247)왔던 성민의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부끄러움마저 견디며 자신을 길을 걸어가야만 작가가되는 길이 이곳의 풍경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작가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디든 모든 것을 걸어야만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능력 있는 선배가 작가가 되지 못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을 걸지 못했던 탓이었을 수 있다. 그것이 이기적인 행위였을지라도 이런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작가는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이다. 가진 게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성민이 어둠(243) 속에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58)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방법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초록뱀 작가는 이 방식으로 작가 작가가 되었다.

3. ‘낙서상상

  신기한 것은 이 작품에서도 만화에 대한 편견이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성민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런 행동을 주변 어른들은 좋게 보지 않는다. 너 또 낙서했지! 쉬는 시간에 칠판 지워놔(25)라는 목소리에서 알 수 있듯이 만화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이런 낙서가 그에게는 즐거움이었고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짝꿍이 그림을 보고 기뻐해주던 순간 환해지던 마음이 나를 아직까지 그림 그리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33)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그림을 해맑게 좋아해 주던 그때 그 당시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소중했던 즐거움 때문인지 모른다. 나아가 이런 기억이 있는 만화가라면 어떤 방식이든지 살아있는 동안에 수많은 짝꿍을 위해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것 같다.

 어린이 만화 석탄과 불꽃, 좋은 아빠, 좋은 남편, 그림을 그리는 일표지와 그림, 석탄과 불꽃, 좋은 아빠의 경우 초록뱀의 인스타에서 발취함.

  그렇다면 초록뱀 만화가의 <그림을 그리는 일> 이후의 삶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초록뱀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너의 이야기를 너의 방식으로 그리는 것인데, 이 주장을 2024년에는 어떻게 밀고 나가고 있는 것일까. 그의 또 다른 작품을 읽어본다. 그는 초록뱀이라는 이름으로 첫 책을 출간한 이후, 1년 만에 좋은 남편(2021, 사계절)을 출간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의 마지막 장면은 공사판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을 때, 출판사로부터 책 출간 소식을 전달받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자신이 정말로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를 검열 없이 책으로 출간하는 순간이니 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좋은 남편작가탄생서사와는 거리가 있다. 제목 그대도 좋은 남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었다. 밥벌이가 쉽지 않아 퇴근 후, 다른 일을 하는 가장의 모습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신을 했을 때, 불편함을 겪어야만 하는 아내의 입장을 담아 놓는다. 이 작품 이후, 초록뱀은 좋은 아빠를 블라이스(Blice)29화 연재했다. 이 작품 역시 아이를 갖게 된 부부가 겪는 사회적인 부조리와 함께 부끄럽지 않은 부모 되기에 대해 다룬다. 초록뱀 만화가의 첫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두 작품에 대해서는 상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앞서 이야기한 방법론을 유지한 채 자신의 작품을 성실히 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의 경우, 유년부터 책을 출간하기까지의 긴 시간을 담고 있는 텍스트라는 점이다. 이 이야기는 300페이지 분량의 장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20년 이상의 시간을 한 권의 책에 응축해 놓았으니 탄탄한 구성이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이후의 작업은 결혼한 후, 아이를 낳게 되는 과정에서 가족의 소중함과 자신이 잘 몰랐던 육아에 대해서 기록한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 냉정하게 말해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 작가에게 이야기가 고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뽑아 먹을 게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만화로 담겠지,라는 추측도 따라 나온다. 물론, 이런 방식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여러 명의 작가가 이 방식을 선호한다면 큰 차이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만화의 근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를 재현하는 방식은 삶이 굴곡지거나, 이동이 많거나, 자극적이거나, 화려할 때 유용하다. 물론, 소박한 삶이라고 해서 문제가 있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평범한 삶이라면 작품도 평범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평범을 허물어뜨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중에 한 방법이 상상(想像)’일 수 있다. 다행히 초록뱀 만화가는 이 상상을 통해 어린이 만화인 석탄과 불꽃(2024)를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바다가 배경이다. 첫 작품에서 읽었던 선한 매력이 어디까지 펼쳐질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여정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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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글쓴이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을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