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정벌 (대한민국세계전쟁사)
무협물이 가진 매력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무엇보다도, 통쾌한 액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대개의 무협물은 적이든 아군이든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구사하며 그것이 오랜 수련에 의한 것이든, 혹은 주인공의 천재적인 오성(悟性)에 의해 깨닫게 된 것이든, 아니면 기연(奇緣...
2004-03-17
양준용
무협물이 가진 매력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무엇보다도, 통쾌한 액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대개의 무협물은 적이든 아군이든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구사하며 그것이 오랜 수련에 의한 것이든, 혹은 주인공의 천재적인 오성(悟性)에 의해 깨닫게 된 것이든, 아니면 기연(奇緣)을 얻어 한 순간에 엄청난 내공을 얻게 된 것이든 간에,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인지의 여부는 철저하게 무시된다. 무엇보다도 총이나 기타 첨단 무기로 싸우는 것보다 서로 얼굴을 맞대는 원초적인 감정 교류가 있고,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데 비해 등장인물들이 비교적 쉽게 죽진 않는다는(싸움에서 지더라도 다시 실력을 갈고 닦아 복수에 나선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인 요소라고 할 것이다. 상대를 향해 총알을 무차별 난사하는 현대물의 액션 장면들에 비해, 무협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은 좀 더 오랜 인간들의 유전인자 속에 내재되어온 야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한편, 서양의 기계 문명에 상대적인 동양의 정신문화가 잠재해 있다고 (우리 스스로) 믿는 구석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무협이 가진 매력 중의 하나는, 그것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있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써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무협”이라는 장르가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안정되고 주어진 제도적 한계 속에서 엄청난 신분상의 변화를 꿈꾸기 어려운 지금 이 시점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입장에서, 무협물의 주인공들은 거의 절대 다수가 무(無)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을 얻으며 행복이 보장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 진행 과정에서 온갖 고난을 겪긴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과정”상의 문제일 뿐이고 이야기의 종반부에서는 ‘누구도 감히 범접하려 들 엄두조차 내기 힘든 천하제일의 무공(武功)’, ‘적어도 의식주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필요 없는 수준의 재력(財力)’, ‘강호(江湖)를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명예(名譽)’, 그리고 ‘경국지색의 미녀(들)’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도시정벌(都市征伐)』에서는 시간적-공간적 배경에 있어서 현재의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곤, 앞서 열거한 무협물의 갖가지 특성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주인공인 백미르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온갖 험한 꼴을 다 보면서 자란다. 대한민국의 지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아버지가 성장한 그를 찾아와서 마음껏 행동할 수 있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사찰에 은거해 있는 국내 제일의 무술가로부터 절세의 무공도 전수받는다. 가뜩이나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자신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100 발휘해서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대에 입학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 경제, 언론 및 폭력에 이르기까지 어둠 속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를 움직이는 조직 “일도련”과 맞서 싸우던 아버지가 죽게 되면서 하루아침에 가진 것을 모두 잃게 된 백미르는 복수를 결심한다. 이른바 무협물에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주인공이 복수를 결심하는 것과 똑같은 과정, 똑같은 동기로 출발하는 것이다. 한편, 가만히 있어도 뭇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잘생긴 외모와 상대를 마음으로부터 굴복시키는 매력까지 갖춘 주인공 백미르가 암흑가로부터 정계와 재계에 이르기까지 명실상부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그 과정은, 바로 이 만화의 이야기 구조적인 측면에서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만화의 인기 요인, 바꿔 말하자면, 이 만화의 이러한 구조가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온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이 “무협물”의 전형적인 이야기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여기에 시간적-공간적인 배경을 다루는 데 있어서 막연히 옛날의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다루는 등 좀더 현실적인 고려가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든 간에, 이 만화는 한마디로 “현대판 무협”인 것이며, 그 이상의 것을 (물론 그 이하의 것도) 요구해서는 (요구해서도) 안 될 것이다. 여느 무협물에 대해 우리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