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금렵구 (天使禁獵區)
아직 일본만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던 1995년 무렵 해적판으로 발간된 『천사금렵구』는 많은 순정만화 독자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정판은 대원출판사를 통해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전 20권으로 완결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소재, 내용, 주제면...
2002-11-22
박소현
아직 일본만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던 1995년 무렵 해적판으로 발간된 『천사금렵구』는 많은 순정만화 독자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정판은 대원출판사를 통해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전 20권으로 완결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소재, 내용, 주제면에서 "도발성" 이 강해서 당시 우리나라 순정계 독자들에 낯설고 자극적인 매력을 한껏 선사했기 때문이다. 우선 천사와 악마를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선과 악이 아니라 다분히 인간적인, 엄밀히 말하면 일본색이 강한 캐릭터들이다. 근사한 제복에 맹목적 충성을 주고 받는 천사 군단과 이들의 동성애적 애정 행각, 극단적인 여성차별은 분명 천사의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악마 루시퍼의 헌신적인 사랑에서 천사의 속성을 발견한다. 신(神) 역시 완전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이와 같이 기존의 통념을 부숴버리는 과감성은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장기간의 연재에도 작품을 기다리게 하는 힘이 되었다. 주인공의 사랑 역시 도발적이다. 무도 세츠나가 사랑하는 대상은 친여동생 사라다. 이들의 사랑은 작품을 끌어가는 원인이자 원동력임과 동시에 갈등을 해소하는 열쇠로 제시된다. 즉 작품 내 바탕이 되는 사건인 세츠나와 사라의 사랑이 다름아닌 근친상간이라는 점은, 다시 주인공이 원래 천사였다는 사실과 어우러져 그 도발성이 배가되었다. 게다가 세츠나가 원래는 여성형 (실제 천사는 무성이지만) 천사인 알렉시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근친상간-천사의 사랑-동성 연애"라는 세가지가 뒤섞이게 된다. 이 도발성은 주제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이 세계를 설계하고 창조하신 하느님,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던 자애로운 하느님은 사라졌다. 신은 대천사 아담 카다몬을 만들고 다시 그의 몸을 조각 내 다른 천사들에게 먹임으로써 스스로 피조물에게 "원죄"를 내린 하느님, 충실한 천사 루시퍼에게 악마가 되라고 명령하는 신이 되었다. 실체가 없는 고귀한 지성체인 하느님은 졸지에 실체도 없으면서 무자비한 네트워트를 통해 세계를 만들고는 무심히 리셋(reset)하려는 신이 되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시작한 세츠나의 여행은 그리하여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다시 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스스로 신이 되는 여행이 된다. 세츠나를 만들고 그가 사랑하는 사라를 만든, 곧 자신을 있게 한 ‘아버지’를 제거하는 과정은 충분히 도발적이다. 이러한 도발성은 유키 카오리의 아름답지만 퇴폐적인 그림체와 어우러져 완벽해진다. 현재 진행중인 『백작 카인 시리즈』에서도 지속되는 이 퇴폐미는 유키 카오리의 작품군을 묶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녀가 작품을 통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천사도 인간도 아닌, 강한 힘과 여린 마음을 가진 무도 세츠나의 불완전성에서 나온다. 이러한 양극단의 혼재와 더불어 근친상간, 동성애, 독신(瀆神)과 같은 금기에의 도전이 어우러져 질서를 깨는 아슬아슬한 퇴폐미가 완성된다. 자기만의 개성이 확실한 작가 유키 카오리의 작품 『천사금렵구』는 그녀의 고유한 색을 충실히 담아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