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지마! (1학년 1학기)
다른 어떤 장르가 안그렇겠는가만은, 학교 생활을 주제로, 그것도 네거티브한 빈정거림을 담은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 환경에 대해 정도 이상의 힐난을 퍼붓는 행위가 터부시되고 있으며, 실상은 어떨지언정 적어도 가상의 ...
2002-03-14
황규석
다른 어떤 장르가 안그렇겠는가만은, 학교 생활을 주제로, 그것도 네거티브한 빈정거림을 담은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 환경에 대해 정도 이상의 힐난을 퍼붓는 행위가 터부시되고 있으며, 실상은 어떨지언정 적어도 가상의 세계에서만큼은 밝고 건강한(참으로 하릴 없는 소리이겠으나) 학교 생활을 묘사해주기를 요구하는 무언의 압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현(스토리 김경훈)의 『학교 가지마』는 상당한 파격성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기성 세대들에게 있어서 이 만화를 대한다는 것은, 변해버린 세상에 대해 자신이 느려터진 체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와닿게 해주는, 일종의 컬쳐 쇼크가 될 것이다. 『학교 가지마』의 화풍에서 기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수법들은 독특한 과장, 왜곡, 그리고 비틀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림체가 매서워 서슬푸른 날카로움을 품고 있거나, 보는 이의 구토중추를 자극할만큼 엽기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 보다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면모에 대해, 힐난에 가까운 야유를 서슴없이 던지는 자유로움이야말로 이 만화에 최대의 특질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고 싶었던 대상들에게 거꾸로 경멸을 보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비록 웃음(?)을 느끼도록 희화화(戱畵化)했을 지언정, 이 만화는 보는 사람의 기분이 껄끄러워질 정도로 비아냥대고 있다. 그것은 안주하기보다 아직 분노할 수 있는 기력을 가진 이들이기에 표출될 수 있는 뒤틀림인 것이다. 4컷 혹은 그것을 약간 변용한 스타일의 표현양식은 그런 목적에 아주 잘 부합되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왜곡된 성격의 캐릭터들은, 한층 더 뒤틀려서 과장되게 우리 눈에 들어온다. 서슴없는 목소리와 더불어 짧은 분량(1페이지 전후) 안에 함축적으로 밀어넣는 표현법. 이 두 가지가 『학교 가지마』를 가장 잘 대변하는 요소라 하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일까. 『학교 가지마』를 다른 작품과 구별지어주던 특질은, 회를 거듭함에 따라서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올가미로 바뀌어버린 듯 싶다. 풍자가 안겨주는 쾌감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자극이 약해지는 법이어서, 작가는 새롭게 타개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존에 주어지던 자극을 더욱 강하게 부여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고, 혹은 허용하는 범위를 늘려 이야깃감을 다양하게 만들 수도 있으리라. 『학교 가지마』가 취한 방식은 굳이 어느쪽인가 규정한다면 전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소어린 블랙 코미디가 점점 강도를 심화한다는 것은, 때로 독자에게 짜증을 유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바라는 시점들은 재미가 있을런지는 몰라도, 그것이 점점 에스컬레이트되면 피곤함을 안겨줄 수 있다. 『학교 가지마』는 잡지 연재물로서는 그 템포가 걸맞을지언정, 만일 한 권의 묶여진 단행본으로부터 접하여 쉼없이 볼 경우에는, 상당한 피로를 느낄 것이다. 이런 지적은 어쩌면, 중간 과정을 통해 걸러진 완성물을 보면서부터 시작되는, 독자의 입장이기에 나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소재와 표현에 있어서 심히 껄끄러운, 위험 수위를 일상다반사처럼 넘나드는 이 만화가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리라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속에서 『학교 가지마』가 이만큼의 결과물을 도출했다는 것은 인정해주어야 할 터이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라고 싶은 것은, 읽는 이들이 느낄 약간의 정신적 피로에 대한 배려이다.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만, 오브라이트로 감싸는 것 또한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