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은 한국 만화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갖는 해이다. 만화 전문 잡지 창간 「러쉬」가 그 바로 비중의 이유인데, 이 해 6월에 창간된 두툼한 만화잡지가 한 권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만화 왕국」이었다.(70년대에도 동명의 잡지가 존재했었으나, 서로 연관성은 없는 것 같다.) 허영만의『미스터 손』, 이우정의『첩보원 보바』, 황미나의『그랑프리』, 김진의 『푸른 포에닉스』등 소년 만화를 메인으로 하고, 소녀 만화를 조금씩 싣는 잡지였는데, 이는 생각해보면 과거 「소년 중앙」이나 「소년경향」 등으로 대표되는 "어린이 교양지"의 형식을 이어받은 듯 하다. 『태권 V』,『20세기 기사단』등으로 유명한 작가 김형배 역시 「만화 왕국」 창간호부터 연재를 시작했는데, 그 작품이 다름 아닌 『고독한 레인저』이다.배경은 199X년으로 표기되는 근 미래로, 자유민주연합과 공생해방군의 양대 진영으로 나뉘게된 인류의 전쟁이 가져어온 참혹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고스트 훈은 자유민주연합진영의 사관생도로, 공생해방군의 마지막 도시 엔젤키스에 중성자탄을 투하한다. 그가 사랑했던 적 진영의 소녀 마리안느와 함께 사라져가는 엔젤키스를 뒤로하던 중, 그는 공생해방군의 킬러위성에 폭격기를 격추당한다. 전쟁 이후, 전체의 절반 이상이 사람이 살 수 없는 방사능 오염지역으로 변한 지구에 또 다시 두 가지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는 과거의 지구를 되찾으려는 보수 조직 <리틀 피스>,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력을 숭배하는 공생해방군의 사상을 좇은 <레드 스타>였다. 엔젤키스를 날려버린 최후의 파일럿,"레인저 세븐"의 전설이 회자되는 <리틀 피스>에 어느 날 한 명의 신병이 찾아온다...는 것이 작품의 도입부인 셈인데, 이 정도만으로도 대강의 전개를 짐작해보기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김형배라는 작가를 말할 때에 거론되는 두 가지의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바로 SF와 밀리터리이다. 그렇다면 『고독한 레인저』는 저 두 가지 중에 어느 쪽에 속하는 작품이 될까. 우선 작중에서 보이는 밀리터리적 묘사는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판초 우의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폭발을 피하는 모습이나, 화생방실에서 벌이는 고스트 훈과 위도우 안의 대결, 전투 후 방사성 낙진을 철저히 세척하는 모습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전설로까지 추앙받는 주인공이, 전쟁터의 일개 병사로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은 당시의 관점으로는 밀리터리 면에 있어서 합격점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후반부에 등장하는 천재소년 스켈레톤, 고스트 훈의 상관이었던 안톤의 재등장이나, 최종 보스 격으로 등장하는 모햄의 존재는 이 작품에 SF로서의 무게도 적잖게 실어주고 있다. 요컨대 『고독한 레인저』는 만화가 김형배의 양대 키워드가 적절히 배합된 밀리터리 SF물로 정의지을 수 있겠는데, 다만 이 작품이 『20세기 기사단』 등 그의 밀리터리 SF물의 후계자격인 작품인지, 아니면 이후의 밀리터리 중심 노선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작품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스토리면 에서는 역시, 사랑하지만 대립하게 되는 두 연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인류 재건의 희망을 좇는 전개가 되고 있는데, 그 사랑의 결말과 인류의 미래는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현재로서는 90년대 중반에 재 출간된 단행본도 구하기 쉽지 않으나 인터넷의 만화 사이트에서 열람이 가능한 것 같다.)밀리터리 SF라 하면 로버트.A.하인라인의 『스타쉽 트루퍼즈』를 들 수 있겠는데, 이 작품의 배경이 꽤 먼 미래이다 보니 밀리터리적 요소 자체가 SF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사실 현대적 밀리터리와 SF의 조합은 꽤나 까다로운 구석이 있어서, 한 쪽은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팬터지에 가깝다는 점, 즉 서로 대치 점에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고독한 레인저』에서의 절묘한 조합은 그것이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높이 평가할만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