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지난 1990년대 초중반, 도서출판 『창과창』에서 출간된 박흥용의 단편집 『나무 위의 나무』를 보았을 때 이 작가는 사회 비판 의식을 갖춘 운동권 만화가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회 고발적인 만화를 그려오던 그가 1994년 당시 (주)대원에서 창간된 성인지 「트웬티...
2002-01-20
강영훈
지난 1990년대 초중반, 도서출판 『창과창』에서 출간된 박흥용의 단편집 『나무 위의 나무』를 보았을 때 이 작가는 사회 비판 의식을 갖춘 운동권 만화가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회 고발적인 만화를 그려오던 그가 1994년 당시 (주)대원에서 창간된 성인지 「트웬티 세븐」에 이 만화의 연재를 시작했을 때 상업지의 논리에 휘말려 그가 추구하던 만화의 색깔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 박흥용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단행본의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르믈 버서난 달은 시대, 계급, 환경 등에 있어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여졌던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려는 몸짓을 그린 이야기이다. 주인공 犬子가 얻으려는 심안은 모든 세대에 걸친 화두가 아닐까? 특히나, 암울한 삶으로부터 진저리치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가 상업지로의 첫발에서 내세운 타협은 역사를 뒤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주인공 堅柱(견주)는 서자라는 이유로 犬子(개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공부해도 벼슬할 수 없는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온갖 개망나니 짓을 하다가 스승 황정학을 만나 여행을 떠난다. 견자의 스승 황정학 역시 뼈대있는 가문의 적자이나 태어날때 부터 맹인이란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죽었다고 알려지고 독안에서 살아야했던 사내. 벗어나고자 하는 불리한 상황속의 인물들이다. 견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 그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한가득 싣고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스승 황정학의 밑에서 한사람의 무인으로서 성장하며 사회의 불합리한 현실들을 보여준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김혜린의 『북해의 별』이나 황미나의 『엘 세뇨르』는 이러한 사회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뭉쳐 일어서는 민초들의 힘을 그린다. 그러나 작가 박흥용은 이몽학이란 인물을 통해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을 그 역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욕망을 만들고 채워 가려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황정학이 견자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 -- 『심안』을 통해 작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과연 그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 구름을 벗어난 달은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결국 달은 구름과 함께 밀려가며 있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깨뜨리지는 못한다. 그 한계를 깨뜨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은 또 다른 자기 한계일 것이다. 그 한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야말로 정말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 대해 눈뜨는 것이라 작가는 말한다. 1990년대 후반들어 국내의 성인지들이 줄줄이 폐간되면서 박흥용은 영지 수준의 작품 활동만 하고 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가 보여주었던 진정한 성인 취향의 걸작이라 말하고 싶으며, 국내 성인 잡지의 부활과 함께 다시 한번 그의 성인 취향의 작품을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