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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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주인 (無限의 住人)

無限의 主人은 없다. 무슨 말인가 하니, 현실에 너무도 충실한 우리는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인의 자세를 견지할 뿐 하늘에 다다를 경지의 사색(思索)을 이루며 살아가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생은 유한한데, 그 짧은 시간 안에 사랑도 하고, 돈도 벌고, 눈...

2000-01-01 만화규장각
無限의 主人은 없다. 무슨 말인가 하니, 현실에 너무도 충실한 우리는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인의 자세를 견지할 뿐 하늘에 다다를 경지의 사색(思索)을 이루며 살아가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생은 유한한데, 그 짧은 시간 안에 사랑도 하고, 돈도 벌고, 눈물도 흘리며 웃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세(俗世)의 그 어떠한 사상가도 현실(現實)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無限의 住人』은 있다. 자기만의 영역에서 살아가며,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 즉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지점의 문제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벌레 혈선충으로 인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주인공 만지는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아무리 베이고 찔려도 다시 재생하는 몸, 황천으로 갔다가 다시 부활하여 살아나는 몸뚱아리는 그를 無限의 住人으로 유지하게 만든다. 그렇다. 無限의 主人이 아니라 그저 住人일 뿐이다. 영원을 선택하여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검객이 아니라, 부여된 운명에 의해 상처를 보듬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저 남다른 능력이 하나 더 부여된 것 일 뿐, 상처입고 살아가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이 만화 『無限의 住人』, 애초부터 定石의 길을 걷지 않는다. 일단 주인공 만지의 모습부터 그러하다. 검 하나로 승부를 짓는 정통 사무라이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객이나 가지고 다닐법한 요상한 칼을 몇 자루씩 품에 넣고 다닌다. 주류(主流)의 모습이 아니다. 正道에서 삐딱하게 비켜선 자의 모습이다. 자신에게 희생된 자를 박제해서 자신의 신체일부로 가지고 다니는 변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검객이 가슴 저린 詩를 읊는가 하면, 마당 가득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한창인데 방에서는 화가의 고뇌가 넘쳐흐르기도 한다. 변종(變種)을 시도하며, 여타 만화에서 보여주었던 사무라이의 고정틀을 깨고 있다. 몸파는 여자의 입으로부터 스스로 약한 여자도, 불행한 여자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 죽어도 죽지 않는 몸으로 인해 만지의 무사도는 사무라이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잘못이 있으면 할복으로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겉치레도, 살인이 아니라 道의 구현을 위한 수련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검을 잡았지만 검객이 아니다. 그저 無限의 住人이다. 無限속에는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린의 복수를 위해 선(善)의 길을 간다고 보여지는 만지의 실체도 결국 살인을 자행하는 것이다. 일도류의 우두머리로 모든 도장을 멸하고 유파의 통일을 이루려는 아노츠 역시 불행했던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한 몸부림이 숨어 있기에 악(惡)으로 정리될 수는 없다. 이제 독자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정통(正統)이 아니며, 절대악은 무의미하다. 이제야 혼란이 도래(到來)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혼란은 없었다. 시대극과 무협물의 진수를 보여주는 『無限의 住人』은 그보다도 더욱 철학적이다. 일본인들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무사도의 길을 보여주는데 힘쓰기보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을 보여주기도 하며,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진리(眞理)는 단순하다. 검법(劍法)은 검을 사용하다보니 만들어진 보편적인 방법이다. 검법이 만들어진 다음에서야 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다. 또 검법이래서 꼭 검을 들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휘두르다가 검법이 익혀지기도 한다. 진리는 진리에 도달하는 자들의 몫이며, 그 방법은 한가지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