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ed Days> : 예술과 예술 사이의 날들
[출처] goat 출판사/Edited Days/0.1
소설 『이만큼 가까이』(정세랑, 창비)의 주인공에게는 꽤나 독특한 습관이 하나 있다. 종종 ‘고래 고환’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래의 고환은 몸 안에 자리해 있고 지느러미 쪽 차가운 정맥과 이어져 있다. 몸속에 있는 고환이 뜨거워지지 않도록 연결된 정맥이 냉각기 역할을 해 준다. 그런 고래 고환을 그는 머리가 뜨거워질 때마다 떠올리곤 하는데, 그러면 다시 시원해진다는 것이다. 고래 고환을 마음의 냉각기로 삼은 셈이다.
고래에 관한 자연과학 상식을 제외하고도, 이 엉뚱한 이야기는 알아 두면 좋을 삶의 지혜 한 가지를 알려 준다.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는 데에 특정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에 갈피를 꽂아 넣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며 마음을 달래듯, 장면 역시 좋은 마음 갈피가 될 수 있다.
<Edited Days>(0.1, goat)의 장면들을 바로 그 갈피 삼고 싶다는 말을 하기 위해 조금 돌아온 것 같다. 번역하면 ‘편집된 날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일종의 무언 만화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림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자르고 그리는 일을 거쳐 재봉질이나 다림질을 하기도 하며 나르고 되짚어 보기까지 아무튼 간에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는 그림들인데, 그 손에 잡힌 대상이 눈에 띈다. 하나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작업하는 이가 자신이 작업하는 종이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어느 그림처럼 그리는 나를 그린 그림으로 읽게 되는 이유다. 베고 자르고 엮고 잇는 날들 사이로 컵을 쥐고 양치를 하고 잠에 드는 날들이 함께 놓여 있다.
[출처] goat 출판사/Edited Days/0.1
말하자면 이 만화의 장면들은 작업 일기인 동시에 삶이 예술이 되는 과정의 은유적 표현이다. 편집된 날들이라는 제목과 겹쳐 봤을 때 이 작품 자체가 삶을 추리고 다듬어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의 은유임을 유추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예술 작업을 위해서 필요한 하루하루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구체적인 하루하루가 곧 예술로 남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나는 특히나 후자의 의미에서 이 장면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삶은 자주 버려진 헝겊보다도 너저분하고, 오탈자가 뒤엉킨 이면지보다 볼품없다. 진부하고 지루한 날들이 끝도 없이 나열되는가 하면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해 차라리 도려내고 싶은 날들이 곳곳에 박혀 있기도 하다. 예술이란 것이 고정된 무엇이 아닌데도 이런 일상은 예술과는 너무나 멀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날들도 있다. 그러나 드물게 사랑스러운 사실은 그렇게 괴로운 날들에도 글이 쓰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괴롭기에 나오는 글도 있다. 좋은 날들도 싫은 날들도 공평히 하나의 문장으로 남는다. 바보 같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지난한 날들을 통과할 수 있다.
사실 <Edited Days>의 장면들은 전혀 너저분하지도 볼품없지도 않다. 오히려 건조하고 깔끔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편집이란 언제나 그보다 주름진 원본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에 <Edited Days> 속 편집된 날들도 어쩌면 나의 것과 아주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상상해 본다. 담백하게 생략했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것 같기도 하다. 너저분하고 볼품없는 날들을 자르고 이어 붙여 편집하다 보면 예술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되기도 한다. 부단한 와중에 그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복잡한 말이 아닌, 자르고 잇고 꿰매고 나르며 되짚는 그림들을 통해서 말이다. 완성된 책을 들춰 보는 마지막 장처럼 만화 속 장면들을 때때로 꺼내 보면서 잃어버린 마음의 갈피를 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