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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 : 유폐의 자리를 향한 앙각(仰覺)의 자세

<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하엔/만화경

2022-11-07 이현재

<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 : 유폐의 자리를 향한 앙각(仰覺)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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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만화경/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하엔

 

하엔 작가는 데뷔 때부터 동화적인 연출에 재능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의 데뷔작 <별이 내린 여름밤>은 절망적인 사건으로 정신적인 외상을 입은 주인공이 마법적인 사건들을 통해 일상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외부 세계와 차단되는 일종의 유폐를 겪게 된다. ‘동화적인 이세계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이 과정에는 서사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그럴 듯함(plausibility)이 없다. 그럴듯함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마치 일본의 치유계() 장르가 가지고 있을 법한 환각성과 최면성이다. 다만, 환각과 최면이 소환되는 이유가 주인공의 정신적 외상이었다는 점에서, 하엔 작가의 만화가 그려 내고 있는 유폐의 자리는 명확히 작가의 선택으로 보인다. 주인공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작가의 배려인 셈이다.

 

작가의 배려를 등에 업은 주인공은 마법적인 사건들과 유폐를 통해 상처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회복의 시간을 갖고, 상처 입은 자신을 되돌아본 뒤 일상으로 복귀한다. 마치 외적 갈등을 소멸시킨 지브리의 세계에서 일어난 법한 성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마법적인 사건들로 회복하여 일상으로 귀환한 뒤에도, 주인공은 마치 연어가 고향을 찾아가듯 유폐의 자리로 돌아간다. 물론, 주인공은 그 유폐의 자리에 침잠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주인공이 유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결말은 하엔 작가가 어떤 지향점을 가진 작가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엔 작가는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유폐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도가적인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는 작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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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만화경/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하엔

 

하엔 작가가 주인공에게 마련해 놓은 유폐의 자리는 <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에서도 이어진다. 그러나 하엔 작가는 대담하게도 전작과 달리 유폐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에서 하엔 작가가 주인공을 위해 마련한 유폐의 자리는 한 칸의 조그마한 방이다. 유폐를 근거하는 것은 여기서는 시간이 멈춰 있단다라는 방주인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다. 그리고 그곳의 시간과 상관없이 세상의 시간은 잘만 흘러간다. 심지어 그 유폐의 자리에 들어선 등장인물들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마치 어쩔 수 없이 인물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듯, 하엔 작가는 유폐의 원인과 근거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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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만화경/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하엔

 

유폐가 가진 차단의 힘을 과감하게 포기한 <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는 하엔 작가의 전작 <별이 내린 여름날>과 달리 환각과 최면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다만, 주인공을 배려하기 위해 유폐의 자리를 마련했던 전작들과 같이, <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다>에서 하엔 작가는 주인공을 고통의 자리에 내버려 두지 않는다. 주인공의 주변에는 주인공에게 언제든 선의를 베풀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조력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선의를 근거하는 힘은 선한 의지를 위해 마치 모든 주름과 얼룩을 표백한 듯한 놀랍도록 하얀 순진성이다. 여기에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서사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그럴듯함이 비어 있다.

 

하엔 작가가 서사적 리얼리티를 포기하고 획득하는 것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윤리를 향한 절대적인 당위성이다. 이는 양날의 검처럼 보인다. 윤리란 기본적으로 무엇을 해야만 한다, 혹은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배타성에 근거한 분별임과 동시에 분간이다. 그 치열한 해법 없는 갈등의 자리를 표백하여 그럴듯함이 거의 완전하게 소멸해 버린 자리에서 하엔 작가는 일본의 치유계 장르가 위안에 천착한 나머지 미처 그려 내지 못했던, 그래야만 하는 당위의 세계를 추수한다. 이 지점에서 하엔 작가는 서사가 지녀야 하는 그럴 듯함을 포기하는 순진함으로, 한때 있었으나 지금은 소멸하고 사라진 순수한 선의에 대한 당위를 앙각(仰覺)의 자세로 그려 내고 있는 향수적인 작가에 가까워진다. 믿을 순 없지만, 지지하고 싶은 자세다.



필진이미지

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리서치앤컨설팅그룹 STRABASE 연구원.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저작권 기술 산업 동향 조사 분석」(한국저작권위원회) 등에 참여했다.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2021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부문 신인평론상, 2023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