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 선이 남긴 궤적 혹은 공백의 형태
[출처] 만화경/Return/전희성
선으로만 무언가를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을 사용하는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사물의 형태를 자신의 손에 익히는 데생(Dessin)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여 사물의 형태가 자신의 인식 안에 남긴 흔적을 기록하는 크로키(Croquis)가 있을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보자. 데생은 바탕의 공백을 점차 줄여 나가는 성실한 방식으로, 내 손이 익어 가는 과정을 꼬박하게 채워 나가는 일이다. 손이 흘린 궤적 안에는 결국 ‘나’라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결국, 데생은 사물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 이르는 흔적일 것이다. 이에 반해 크로키는 내가 익은 손의 움직임으로 사물을 추적한 형태만을 남긴다. 크로키에 남는 궤적은 추적이라는 운동이 남긴 흔적 외에는 `없을 것이고, 결국 필연적으로 수많은 공백을 남긴다. 그리고 공백과 궤적 사이의 긴장 속에, 사물이 내 안에 남겨 놓은 형태가 드러날 것이다. 이 점에 있어 크로키는 형태로부터 나를 공지 받는 일일 것이다.
데생과 크로키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기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둘 사이의 중심에는 사물과 형태라는, 나를 제외한 ‘밖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선으로만 무언가를 그리는 행위는 밖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겠다. 전희성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 『Return』(만화경, 2020. 이하 ‘리턴’)은 짧지만, 선으로만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새겨진 작품이다. 전희성 작가는 크로키에 가까운 간결한 손놀림으로 과거의 경험이 자신에게 남겼던 형태들을 하나하나 꺼내 본다. 그리고 그렇게 했어야만 하는 이유를 1화의 시작에 명확히 밝혀 둔다. 『리턴』은 “망했다”라는 간결하고 급박한 진술로 시작한다. 망했다는 재난 상황이 주인공의 사정만을 봐 줄 리는 없다. 어떤 조치를 할 수 없는 주인공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다. 어쩌면 하나였을 것이다. 재난에서 벗어나는 일.
[출처] 만화경/Return/전희성
주인공은 그 와중에 과거가 남겼던 한 가지 흔적을 잡아 보기로 한다. 3~4학년 장학금을 타면 일본으로 대학원 유학을 보내 주겠다던 가족의 약속이 있었다. 물론 약속은 ‘망했다’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로 무너진 가세를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재난은 부모까지 이혼시켰다. 주인공의 손에 쥐어진 해결책은 없었을 것이고, 재난에서 벗어나는 일은 어쩌면 도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전희성 작가는 이 모든 과정을 크로키 같은 간단한 묘사로 넘긴다. 유학은커녕 밥을 걱정부터 하는 그에게, 최선의 기준은 재난의 원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그 뒤에 일본으로 떠난다. 중요한 것은, 그의 묘사 어디에도 가족은 나와 있지 않다.
[출처] 만화경/Return/전희성
가족을 공백으로 둔 그의 모습은 ‘サバイバル(survival)’이라는 한 단어로 간명하게 드러난다. 전희성 작가는 サバイバル라는 단어를 유학 노트에 새기는 모습이 담긴 2회차의 제목에는 ‘초심’이라는 단어를 썼다. 재난으로 사라진 공백의 자리와 낯선 생활 속에서 처음 들어선 サバイバル라는 마음을 작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야. 나는 내가 갈 길만 잘 가면 돼. 일단은 보이는 곳까지 잘 가 보자.” 그 뒤에 전희성 작가는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유학 노트 ‘サバイバル’를 검정 바탕 속에 놓는다. 유달리 하얀 공백이 많은 장면 속에서 홀로 어둠 속에 묻힌 마음은, 크로키가 드러낼 수 있는 ‘사물이 내 안에 남겨 놓은 형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출처] 만화경/Return/전희성
이러한 방식은 3화에서도 이어진다. ‘평정심’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회차에서 주인공은 ‘미안하지만, 손님이 없어서 오늘은 일찍 퇴근해 달라’는 가게 주인의 부탁을 받는다. 마치 가게 주인의 미안함을 대신하는 듯한 고기를 받고, 그는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의 집에 간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문뜩 화장실 휴지와 티슈를 구분해서 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발견한다. サバイバル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놓인 주인공의 모습은 당시의 상황이 자신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보여 주는 듯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척 짧지 않은 길을 걸어서 귀가하며, ‘とまれ(STOP)’이라는 단어를 본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작은 사치로 럭키스트라이크를 사는 주인공을 손으로 그린 프레임이 가둔다. 주인공이 내뿜는 연기는 애써 프레임을 모른 척, 프레임 밖으로 나가는 식이다.
전희성 작가의 작가성은 이러한 흐름의 운용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4화에서도 이어진다. ‘욕심’이라는 제목을 단 이 회차에서 주인공은 점차 빠르게 상황이 개선되는 것을 느낀다. 일본어 실력은 급성장하여 더 높은 수준을 향해 학원을 옮겼고, 거기서 새로운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선 받는다. サバイバル라고 새긴 노트에는 지출이 줄었고, 반대로 담배는 늘었다. 주선 받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손님이 놓고 간 담배를 쉽게 ‘득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희성 작가는 이 순간에 내뿜는 담배를 프레임처럼 사용하고, 그 안에 “담배가 늘었다”는 간략한 심상을 적어 놓는 운용은 그가 만화의 흐름을 탁월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같은 회차에서 그는 겨우 찾은 여유를 싸이월드에 성급히 자랑했고, 허세는 곧 부담으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그린다. 친구를 대접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그는 유학 친구 민우에게 미안한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일본으로 여행 온 친구를 대접한다. 이 순간 주인공은 다시 검정 프레임 안에 갇히고, 검정 배경 속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 위에 “마음에 뭔가 걸렸다”는 짧은 소회를 담는다. 이렇게 공백과 여백, 프레임을 적절히 사용해 가며 전희성 작가는 그 시간이 자신에게 남겼던 마음의 형상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는다.